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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67화 (562/1,794)

템빨 34권 - 21화

“다 계산하고 행동하신 거죠?”

7번 뱀파이어의 도시 입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로그인한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질문해 왔다.

로그인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리드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라우엘? 왜 벌써 와 있어? 아직 약속 시간까진 멀었잖아?”

“레이드 공략을 짜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 봤습니다. 전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7번 도시에 남아 있는 2마리의 직계는 여태까지의 직계와 달리 협동할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도 그리드와 라우엘이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른 길드원들과 달리 통솔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빠르게 행동하여 보다 더 궁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역시 라우엘이다. 의지가 된다.

생각하며 기특해하던 그리드가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내가 뭘 계산하고 행동했다는 거야?”

라우엘이 음흉한 미소를 피어올렸다.

“유페미나 님과 크리스 님에게 크레이의 팔찌와 에티마의 대검을 양보하신 행동 말입니다.”

“....?”

“직계 아이템의 등급을 올리는 일,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하께서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계시잖습니까? 당신께서 그들에게 아이템을 양보하신 이유, 그들에게 대신해서 아이템 등급을 올려 달라는 뜻이셨지요?”

“....?”

“당신께서는 모든 직계들의 왕이 될 여지가 있는 분. 유페미나 님과 크리스 님께서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시니까 추후 상황에 따라서 크레이의 팔찌와 에티마의 대검을 반납할 의향이 있으시겠죠.”

“....??”

“뭐, 반납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아닐 테고요. 그때 가서 전하께 보답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해 달라하면 그만일 테니까.”

“......”

그리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는 순전히 호의에서 동료들에게 아이템을 양보했을 뿐이다. 그들이 기껏 등급을 올려놓은 아이템을 나중에 다시 돌려받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지만 라우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꽤나 그럴 듯했다. 그리드와 유페미나, 크리스 모두가 윈-윈 하는 방법이었다.

“대단하네.... 나는 그렇게 깊은 생각 안 해 봤는데....”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멍청한 척 연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근 전하의 사고력이 상당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저는 벌써 여러 차례 목격하였는걸요.”

‘멍청해 보인다는 말이냐....’

여기서 굳이 진실을 밝혔다가는 멍청이가 되게 생겼다.

결국, 그리드는 라우엘의 추측을 부정하기 어렵게 됐다.

“하...하하하, 맞아. 역시 라우엘 너는 속일 수가 없구나? 네 예상대로야. 나는 사전에 다 미리 계획하고 둘에게 아이템을 양보한 거라고.”

“후후훗... 전하께서 아무리 똑똑해지셨다고 해도 저를 속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거지요.”

진실도 모르고 기고만장하게 웃는 라우엘이었다.

그리드는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

***

“명심해. 신호를 보내면 아까 봐 둔 퇴로를 이용해서 바로 퇴각하는 거야. 뒤도 돌아보지 마. 알았지?”

“알았다.”

“명심할게.”

전날 에티마를 레이드한 이후, 7번 도시는 아직까지도 보스가 리젠 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주인을 잃은 도시로 설정되어서 출입구가 항시 개방된 상태였다.

생존한 직계 둘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는 여파인 듯했다. 출입구의 존재는 템빨단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백작급 직계 둘과 동시에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제로’라는 결론을 내린 템빨단.

그들의 오늘 원정 목적은 단순했다. 백작들의 클래스를 파악하는 것. 루쏜과 놀, 둘 중 어느 쪽의 탱킹 능력이 떨어지는지 파악해 놓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그리고 내일 다시 도전해서 탱킹 능력이 떨어지는 쪽의 백작을 다구리 놓는 거지.’

일단 한 마리의 백작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남은 한 마리의 백작은 언제든지 재도전해서 레이드할 수 있으리라.

“마법 저항력보다는 물리 저항력이 낮은 쪽을 체크해 두는 편이 좋아. 메인 딜러들의 공격력이 온전히 적용되는 쪽이 공략하기 수월할 테니까.”

“백작 둘이 나타나면 바로 총공격을 퍼붓는다. 마법사들은 어느 쪽의 마법 저항력이 더 높은지 바로 체크해서 알려 주도록 하고.”

서걱-!

푸욱!!

템빨단은 언제 나타날지 모를 백작들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이동했다. 도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마주치는 뱀파이어들과 사역마들을 오로지 평타만으로 사냥했다. 스킬과 마법은 백작들에게 퍼붓기 위해서 아껴 두는 것이다.

그리고.

“호...? 저놈들이 정말로 다시 왔군?”

“거봐, 내가 뭐랬어. 기고만장해 있을 거라고 했지?”

“흥, 멍청한 크레이와 에티마가 우리들 직계의 위엄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군.”

템빨단이 도시에 입장하고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다수의 뱀파이어를 사냥한 덕분에 루비와 섹시여고생의 경험치 게이지가 10퍼센트쯤 차올랐을 때 백작 루쏜과 놀이 등장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이번에도 역시 상공에서부터의 출현이었다.

새카만 도시 천장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들이 기이.... 아니, 멋지다.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잘생긴 놈들은 뭔 미친 짓을 해도 멋있네.’

세상은 어찌 이리 불공평할까!

나는 왜 잘생기지 못한 걸까!

새삼 원망을 품은 그리드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제드노스, 라엘라! 시작해!”

“네!!”

화르르르륵-!

라엘라의 강력한 화염 마법이 제드노스의 바람 마법과 결합되어 신속을 얻는다.

거칠게 파도치는 화염의 해일이 상공의 루쏜과 놀을 동시에 덮쳤다.

[대상에게 41,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이 저항하였습니다.]

“....!!”

알림 창을 확인한 제드노스와 라엘라가 깜짝 놀랐다.

자신들의 협동 마법 데미지가 너무 약하게 들어가자 당황한 것이다. 심지어 놀은 저항해 버렸다.

“둘 모두 크레이와 에티마보다 마법 저항력이 높아요. 특히 놀 쪽이 더...!”

다급히 설명하는 라엘라.

그녀의 곁으로 뱀파이어 백작 루쏜이 떨어져 내렸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루비처럼 투명한 붉은 눈동자.

예의 뱀파이어들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자였다. 길게 늘어진 장발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이고 있다.

“한낱 사냥감 따위가 감히 나를 공격해? 대가로써 피를 받.... 큭!”

라엘라의 목덜미를 움켜쥐던 루쏜이 신음을 토하면서 날아갔다.

흑화,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거기에 100을 달성한 투기까지.

거의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가 날아와서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까닭이었다.

하필이면 <검은 불꽃>까지 폭발한 바람에 루쏜의 비단 같던 장발이 꾀죄죄해졌다.

“이놈이!!”

버럭 소리친 루쏜이 그리드에게 살기를 보냈으나, 그리드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과 전투 중인 놀에게 날아가 이번에는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악!! 이자식이 비겁하게 뒤통수를!!”

갑자기 공격 받은 놀 또한 루쏜처럼 분노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중얼거렸다.

“물리 저항력도 놀 쪽이 더 높군.”

“인간 놈이!!”

무시당하자 더욱더 분노하는 루쏜과 놀!

그들의 어그로는 이제 완벽히 그리드에게 쏠리고 있었다.

당연하다.

어그로를 끄는 건 높은 공격력을 지닌 딜러의 숙명이었다. 템빨단 내에서도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리드였으므로 그는 늘 어그로를 독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딜러는 공격력이 강한 대신 방어력이 약한 법이었다. 강력한 공격력은 양날의 검처럼 딜러의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인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딜탱이다.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 최강이었다.

퍼억-!

콰작!!

동시에 날아드는 루쏜과 놀의 공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순순히 맞아주는 그리드였다.

반격해서 둘을 날려 버린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마법 저항력과 방어력은 놀 쪽이 훨씬 더 높고, 공격력은 루쏜 쪽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 같은데, 맞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들의 테스트 결과도 그래.”

템빨단원들 또한 그리드처럼 루쏜과 놀에게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갖고 있는 모든 종류의 스킬을 모조리 다 쏟아부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파악한 루쏜과 놀의 특성은 그리드가 파악한 것과 일치했다.

그리드가 다시금 자신에게 덤벼오는 루쏜과 놀을 확인하고 벨리알의 힘을 개방했다.

100퍼센트 전력이다.

“좋아. 내일 다시 와서 루쏜부터 공략한다. 내가 시간을 벌 동안 아까 말했던 퇴로로 도망쳐.”

“알았어.”

“네!!”

템빨단원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심지어 후로이조차도 즉각 자리를 떠났다. 그 누구도 그리드 홀로 남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것이다.

그리드가 풀 버프를 전개한 지금, 제아무리 백작급 직계 두 마리라도 그리드를 해칠 수 없다는 믿음.

퍼퍼퍼퍼펑!!

쿠콰콰콰콰쾅!!

마법과 검술이 난무한다.

먼저 떠난 템빨단원들을 쫓아 후퇴하는 그리드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자식들, 세긴 더럽게 세네.’

[대장장이의 분노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신속한 몸놀림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각종 버프가 해제되기 시작한다. 흑화도 머지않았다.

또한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거냐!!”

“순진한 놈 같으니라고!!”

그리드의 뒤를 쫓는 루쏜과 놀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거슬리는 인간 놈을 드디어 포식할 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펑-!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출구에 도달하기 300미터 전.

그리드가 사전에 설치해 두었던 알람 마법 수십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동하면서 마법을 날렸고.

“크아아아아악!!”

“함정이라고?!”

루쏜과 놀은 마법 저항력을 무시하는 그리드의 <매직 미사일(강화)>폭격에 큰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그리드를 쫓는 기세가 한순간 약해져 버렸다.

그 틈에 거리를 벌린 그리드가 도시를 탈출했다.

“내일 또 봐.”

***

“수고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생환한 그리드를 발견한 템빨단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안도하는 동료들에게 그리드가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일 재도전할 때는 계획대로 루쏜한테만 스킬을 퍼붓도록 해.”

몸빵 약한 놈만 철저히 다구리 해서 죽이겠다는 의지!

내일 본격적으로 진행될 레이드의 키포인트 플레이어는 반트너, 토반, 후로이였다.

“너희 세 사람이 놀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아 줘야 해. 만약 놈이 우리 딜러진이나 루비를 공격하게 되면 레이드가 힘들어질 거야. 자칫 실패할 수도 있어.”

“좋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놀을 묶어 둘게.”

“놀이 오로지 저만 신경 쓰도록 많은 대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

“...그, 루비랑 섹시여고생도 있으니까 너무 심한 패드립은 자제하고.”

“네....”

그리고 다음 날.

동료들 전원의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리드가 파티를 이끌었다.

“다시 간다. 어제 말한 대로 루쏜만 조져.”

“네!”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은 오늘 꽤 많은 인원이 사망할 것으로 추측했다.

제아무리 반트너와 토반, 후로이가 노력하더라도 루쏜을 레이드하는 동안 놀의 발을 완전히 묶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희생이 내일의 성공을 이끌게 되리라.

믿음을 품은 템빨단원들이 망설임 없이 7번 도시에 입장했다.

그리고 정확히 5시간 후.

또 한 마리의 직계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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