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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70화 (565/1,794)

템빨 35권 - 2화

사하란 제국 황도 타이탄에는 대륙 최대 규모의 레베카 신전이 존재한다. 신전 하나의 크기가 교황청의 전체 규모를 압도할 정도로 컸다.

제국과 레베카교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민족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으로 쌓아 올려진 신전.

이 추악한 장소에 자애의 상징인 레베카 여신상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국의 국수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타이탄의 레베카 신전을 곱게 보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 쥬앙데르크의 입장에서 이 신전은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오로지 제국 신민만을 위해서 웃어 주는 ‘진짜’ 레베카 여신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신성한 장소인 것이다.

“급보라...”

여신상 앞에 앉아 기도를 올리던 쥬앙데르크가 슬그머니 눈을 뜬다. 기도를 방해받은 일이 적잖게 언짢은 눈치였다.

보고를 위해 달려온 백작 리샤가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템빨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동맹의 병력까지 동원한 대군을 레이단에 집결시키는 중이라고 합니다.”

“....흐음.”

레이단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이다. 템빨국이 그곳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행위는 제국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쥬앙데르크가 ‘제국 신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죄’라는 죄목을 템빨국에 뒤집어씌운 후 군대를 파견해도 하등 문제없을 수준이다.

하지만 쥬앙데르크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현재 제국의 주력 부대는 대부분 발할라 인근으로 파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 움직인 거겠지.... 과연 템빨왕이로군.”

쥬앙데르크가 발할라 인근에 대규모 부대를 배치한 이유는 무패왕의 후예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수만 제국군을 몰살시키고 카일과 적기사단까지 해친 그를 쥬앙데르크는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누구 앞에서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는 필시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혹 무패왕의 재림은 아닐까, 하는.

하여 쥬앙데르크는 발할라의 비호를 받고 있는 무패왕의 후예를 경계할 요량으로 그쪽에 군대를 배치한 것이다. 재침공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할라와 템빨국은 그 사실을 모를 터였다. 제국이 당장에라도 발할라를 침략할 거라고 해석할 공산이 컸다.

그러니까 템빨국이 레이단에 군대를 배치한 이유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너희가 발할라를 침공하면 우리는 너희의 후방을 치겠다, 라는 뜻이 내포된 경고.

“후우.... 큭, 큭큭! 큭큭큭!”

깊은 한숨을 내쉬던 쥬앙데르크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실소였다.

감히 제국에 경고를 보내는 국가가 탄생할 줄이야. 제국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국가가 탄생할 줄이야.

시대의 변화가 쥬앙데르크는 새삼 놀라웠다. 스스로의 꼴이 한심해서 웃겼다.

한참을 웃던 그가 리샤 백작에게 질문했다.

“레이단에 집결한 템빨국 군대의 정확한 숫자는?”

제국은 대륙 전역에 눈과 귀를 지녔다. 제국의 첩자는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 다수 존재했다.

쥬앙데르크는 그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즉각 해답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

제국의 정보기관 <눈>의 총수인 리샤 백작은 벌써 여러 차례 템빨국에 첩자를 심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템빨국의 모든 영토는 방비가 삼엄하였으므로 첩자를 심어도 금방 발각당해 버렸다.

특히 왕도 라인하르트는 첩자의 생환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여태까지 라인하르트로 파견하였던 300명 이상의 첩자가 대부분 연락두절 상태였다. 그 탓에 <눈>의 운영에 큰 제약이 생겼을 정도이다.

쥬앙데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템빨국에 한해서는 정보가 취약하군. 실망이로다, 리샤.”

“면목이 없사옵니다... 아무래도 템빨국에는 수준 높은 어쌔신이 다수 존재하는 듯하여...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해결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의 숫자는 대충 몇으로 추측하는 거지?”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지만, 추측 정도는 가능할 터.

쥬앙데르크가 재차 묻자 리샤가 대답했다.

“약 4만이옵니다.”

4만.

정녕 하찮은 숫자다.

백만 단위 대군을 거느린 제국 입장에서 4만은 언제든지 지워 버릴 수 있는 적은 수였다.

하지만 전쟁은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특히 템빨국에는 적기사단 못지않은 무용담을 쌓은 인물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템빨왕은 벌써 2개의 국가를 멸망시켰고 2개의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템빨왕이 없었다면 발할라도 없었을 것이다.

‘강병들을 모조리 발할라로 파견한 상태에서 오합지졸 수십만을 보내 봤자....’

좋은 먹잇감밖에 안 될 터.

판단하는 쥬앙데르크가 큰 아쉬움에 휩싸였다.

‘인재가 없다.’

검공 리미트와 적기사단은 황비 마리의 측근으로 전락해 버렸고, 다섯 기둥은 아직 일선에 내세울 타이밍이 아니다. 그들 모두 적기사단을 뛰어넘을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육성하느라 바빴다. 그나마 일신의 재주가 다소 부족하여 한가했던 카일은 무패왕의 후예에게 한쪽 팔을 잃어 반푼이가 되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일이 꼬인 것일까.

되짚어 보면 무척 오래 전부터다.

피아로를 잃었을 때부터...

그리고 종국에는 무패왕의 후예가 나타나면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저벅.

쥬앙데르크가 손짓하자 근위대장이 다가와서 망토를 건네준다. 그를 몸에 두른 쥬앙데르크가 신전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고배를 마셔야겠군. 외교라는 것을 해 볼까.”

외교.

적어도 쥬앙데르크는 외교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가 황위를 이어받았을 당시부터 제국은 대륙의 지배자였고, 그는 타국에 그저 명령만을 내렸을 뿐이다. 그건 외교가 아니라 일방적인 거래였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한 바.

“템빨왕에게 사신을 보내라. 당분간 발할라는 침공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일러라. 짐은 그 증표로써 발할라에 휴전을 청하겠다.”

“....!!”

천하의 황제가 한발 물러서겠다는 선언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 대사건이었다.

리샤 백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근위대장 베인은 얼굴을 대춧빛으로 물들이고 분개했다.

“폐하! 차라리 제가 전장으로 나가겠나이다! 저 쓸모없는 적기사단을 대신하여 이 베인이 무패왕의 후예와 템빨왕의 목을 베어 오겠나이다!!”

“안 된다. 베인 네가 곁에 없으면 짐은 한시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 잠조차 잘 수 없다.”

“.....”

대륙의 지배자를 곁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어디 아무나 맡을 수 있겠는가?

근위대장 베인은 쥬앙데르크가 인정하는 진짜배기 실력자였다. 쥬앙데르크는 베인의 무력을 세상에서 가장 신뢰했다. 그가 이렇듯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베인 덕분이었다.

“무패왕의 후예....”

베인을 진정시킨 후, 카일이 묘사했던 무패왕의 후예의 실력을 되새겨 보는 쥬앙데르크.

그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다.

‘전설의 십만대적검으로 부족해서 마법까지 사용하는 괴물.... 다섯 기둥이 전부 복귀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아. 그래, 오늘의 선택은 치욕이 아니라 현명한 것이다.’

***

“하하하하하!! 너희도 보았겠지? 그 괘씸한 놈들이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을 말이야!”

뱀파이어 백작 놀.

현재 그는 특이점에 도달해 있었다.

나태의 저주를 극복한 것이다.

놀 본인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저, 그리드라는 인간 놈과 여러 번 마주치다 보니 어느 순간 ‘귀찮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놀은 이것이 분노라는 감정에 의거한 변화라고 믿었다.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직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까불어 대는 같잖은 녀석. 놈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순간 놀은 자신이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기쁨에 휩싸였다.

그가 뚜렷한 감정을 느낀 것은 태어나고 수백 년이 지나 처음이었으니까. 이제야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브라함과 엘핀스톤이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겠답시고 애썼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군.’

브라함은 지식의 포식을, 엘핀스톤은 사랑을 갈망했던 존재.

다른 형제들보다 일찍 욕구와 감정에 눈을 뜬 그들은 나태의 저주가 지독히도 싫었을 터다. 그래서 그토록 발버둥쳤으리라.

“큭....! 크하하하!! 하지만 결국은 내가 가장 먼저 극복해 낸 것인가!!”

자신이 브라함과 엘핀스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는 놀이었다.

그에게 진혈족 뱀파이어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저기... 놀 백작님, 우리 이제 그만 자러 가도 될까요?”

“.....”

진혈족과 일반 뱀파이어들은 직계와 비교해서 미약한 나태의 저주만을 받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직계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만사가 귀찮고 졸렸다. 다만 직계의 명령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놀이 쯧쯧, 혀를 찼다.

“정 졸리면 제자리에서 자라. 언제 다시 그 인간 놈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

고귀한 뱀파이어인 우리에게 관이 아니라 땅바닥에서 자라니!

진혈족과 일반 뱀파이어들은 반발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직계가 베리아체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한편 사랑하였듯이, 진혈족과 일반 뱀파이어들 또한 직계에게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니까.

눈치를 보던 진혈족 몇 명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 놀 백작님, 그 인간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 찾아올 일은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알고도 또 찾아온다면 완전히 미친놈일 텐데요.”

그래, 무척이나 상식적인 해석이다.

그리드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이곳에 다시 돌아올 리는 없었다.

그래서 놀은 계속 진을 쳐야 한다고 믿는 것이었다. 놀은 그리드를 미친놈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그 인간 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몇 번이고 이곳을 되찾아 와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되풀이했고 나의 형제들을 차례차례 죽였어. 정신 나간 놈이라는 증거지.”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지. 그놈은 반드시 올 거야.”

그리고.

“내게 포식당해 죽겠지. 큭, 큭큭큭!!”

놀은 이미 한 번 그리드를 죽였다. 그 피를 맛봤다. 무척이나 달콤했다. 놈의 피를 마시는 순간 힘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진화다. 플레이어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클래스 업이었다. 놀은 이미 한차례 템빨단 파티를 궤멸시킨 끝에 이전보다 더 강력해져 있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10년도 더 전이었던가? 인간의 군대가 우리 도시로 쳐들어왔던 것을 너희는 기억하느냐?”

“예, 그때 인간 놈들의 숫자가 족히 수천은 되었죠.”

“덕분에 완전히 잔치였어요. 그렇게 배 터지게 식사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조만간 또 잔치가 벌어질 거야.”

“네?”

“개미가 그렇듯, 나약한 놈들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뭉치기를 좋아하니까. 그 미친 인간 놈, 우리에게 저항한답시고 필시 원군을 모아 올 것이다. 그 숫자가 최소 우리와 비슷하겠지.”

“오오....!”

졸음으로 가득했던 뱀파이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본디 인간은 나약한 존재.

뱀파이어들의 먹잇감에 불과하다.

그들이 수천이나 동시에 찾아오는 것은 전혀 위협이 아니고 오히려 뷔페가 차려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끈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희열에 찬 놀이 소리쳤다.

“와라....! 언제든지 와라!! 얼마든지 데리고 와라!! 너희 인간 놈들을 모조리 포식하고 힘을 비축하여 언젠가는 지상으로 도달할지니!!”

그때였다.

“그래, 왔다.”

도시 입구 쪽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놀이 잊을 리 만무했다.

그리드.

그 미친놈이었다.

“킥....! 키하하하하하하하!! 왔구나!! 정말로 다시 왔어!!”

그리드를 발견한 놀이 기쁨에 몸서리쳤다. 그는 제 발로 찾아와 준 먹잇감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깨물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한껏 들떠서는 소리쳤다.

“설마 혼자 온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친구들 좀 많이 데리고 왔니? 아가야.”

너무 들뜬 나머지 수다스러워진 뱀파이어들!

그들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친구가 좀 많아.”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출입구로부터 발소리가 들려온다.

수십, 수백 수준의 발소리가 아니다.

수천?

그것도 아니다.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

놀과 뱀파이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출입구를 통해서 도시에 진입하는 인간의 숫자가 어째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인간들은 정말이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도시에 몰려 들어왔다.

그 숫자가....

“....저거 몇 명인지 못 세겠는데.”

“나도.....”

생전 처음 보는 단위!

상상도 못해 본 대군의 출현에 놀과 뱀파이어들이 위축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놀이 나섰다.

“왜들 굳어 선 거냐! 그토록 고대하던 잔칫상이 바로 눈앞에 차려졌다! 만찬이다!! 기뻐하며 포식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오오오오오오오!!!”

놀의 외침이 넋 나가 있던 뱀파이어들을 각성시켰다. 직계의 힘이었다. 겁을 상실한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에게 날아들었다.

놀은 물론 가장 선두에 있었다. 그는 오직 그리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인간 놈들은 사실 관심도 없었다.

“이번에도 맛있게 먹어 주마!!”

위협적으로 선포하는 놀!

그와 그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의 머리 위로.

“절구질.”

“....?”

도시 천장을 가득 메우는, 뭔가 엄청 큰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뱀파이어의 도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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