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2화
“맥주 한 잔.”
캐나다, 레드디어. 앨버타 주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인구 8만의 이 작은 도시에서 검은 머리 이방인은 눈에 띄는 법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배틀 필드> 생중계의 영향으로 거리는 한산했고, 상가의 손님들은 대부분 TV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덕분에 흑발의 사내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높은 콧대와 흰 피부는 백인에 가깝고, 작은 입술과 덜 발달한 눈썹 뼈, 그리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동양인에 가까운 사내였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언뜻 보이는 눈동자 또한 검다.
한국인 아버지와 캐나다인 어머니를 둔 그의 이름은 레이. Satisfy 아이디는 페이커다.
물론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몰랐다.
“그놈의 선글라스는 벗는 법이 없군. 요즘 발길이 뜸한데, 자주 오도록 하게. 제니퍼가 툭하면 자네의 안부를 묻는다니까?”
허름한 펍을 홀로 운영하는 중년인이 맥주를 건네면서 말한다.
괜한 오지랖으로 여긴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과묵한 성격 탓인지,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페이커가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그의 시선 또한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TV에 꽂혔다.
“오우, 그리드의 움직임이 환상적이군.”
“하지만 크리스가 한 수 위야.”
“하하하! 크리스가 괜히 캐나다의 자랑이 아니지.”
“힘내라, 크리스! 이 순간만큼은 그리드가 너의 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
손님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계단을 홀로 지키고 선 그리드의 무용에 찬사를 보냈고, 그를 압도하는 크리스의 솜씨에 흥분했다.
TV 속 그리드는 계속해서 경전을 읽고 있었지만 벅차 보였다. 수적 열세를 떠나서 크리스와의 실력 차가 너무 컸다.
‘하지만 충분히 잘하고 있다. 생명력 안배에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버틸 수 있을 거야.’
페이커의 감상이었다.
‘작년의 그리드였다면 배틀 필드에서 크리스와 맞수를 펼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지.’
정녕 빛나는 성장 속도다. 그리고 그 성장의 근본은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었다.
‘훌륭해.’
씨익.
페이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리드를 관찰할 때마다 미소 짓는 습관이 생겼다.
페이커가 자신을 이토록 각별히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드가 알게 된다면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할 것이다.
노말 클래스로 태양급 강자를 꺾은 실력자.
페이커는 태양 위의 태양이었고, 그리드에게는 동경의 대상 중 하나였으니까.
“뭐지?”
“크리스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페이커가 맥주를 절반가량 비운 시점이었다. 배틀 필드의 전개가 급변했다.
크리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가 싶던 그리드가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듯 크리스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수세에 몰리자 그를 중심으로 연계하던 다른 랭커들까지 혼선을 빚었고 그리드는 승기를 잡았다. 적들을 차례차례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페이커의 시선이 한 여성에게 꽂혔다.
크리스와 동맹을 맺고 있는 랭커 중 하나인 그녀의 아이디는 유라. 한국 대표다.
‘그녀의 움직임이 크리스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어.’
페이커는 정확하게 간파했다.
실제로 유라는 크리스를 방해하는 중이었다. 크리스가 그리드의 공격에 반응하려고 할 때마다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물론 노골적이진 않았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현재 그녀가 크리스를 훼방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전투 현장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녀의 꺼림칙한 의도를 읽지 못하고 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오로지 크리스만이 그녀의 방해를 눈치채고 이를 갈았다.
“도련님의 위기로군.... 그리드 님에 대한 유라 양의 마음이 갸륵하구먼.”
TV에 집중 중인 페이커의 귓가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힐끗 고개를 돌려 본 페이커가 내심 놀랐다.
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쓸어 넘긴 노년의 신사.
지르칸. 한때 검사 랭킹 1위였으나 어느 시점부터 자신의 성장은 뒤로하고 크리스의 육성에 열의를 다 바친 인물.
그는 크리스의 스승이었고, 자이언트 길드 칠대장의 중심이었으며, 현재는 템빨단의 든든한 전력이었다.
“당신.... 크리스를 따라 일본에 갔던 것 아닙니까?”
페이커는 지르칸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점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크리스의 가문이 캐나다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크리스 가문의 집사인 지르칸에게 자신을 찾아내는 일쯤이야 손쉬운 것이다.
“이 나이에 장거리 여행은 쉽지 않거든. 괜히 쫓아갔다가 짐이 되느니 집에서 쉬는 편이 낫지 않겠나?”
허허 웃은 지르칸이 페이커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무릎을 두드리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하지만 페이커는 코트 너머 그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엿봤다.
“그리드 님도 참 복 받으셨지. 저런 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니 말이야. 이거야 원,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질투심을 느꼈겠군.”
지르칸은 크리스를 훼방 놓는 유라에게 일말의 악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같은 템빨단 소속인 이상 유라 또한 그에게는 소중한 동료였고, 무엇보다 그녀의 그리드에 대한 마음을 절실히 엿본 까닭이다. 연륜이었다.
“사랑은 좋지. 암, 좋아.”
코트를 벗어 단정히 접어놓은 지르칸이 주인장에게 주문했다.
“여기 콜라 한 잔 주시게.”
“네, 알겠습니다.”
주인장이 지르칸을 무척 친절하게 응접했다. 단지 고령자라서가 아니다. 저 음침한 젊은이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뻐서였다.
“좋은 사람이군.”
‘그래서 자네가 몇 년째 이 가게를 이용 중인 거구만.’이라는 말은 삼키는 지르칸이었다. 뒤를 캔 것을 광고해서야 좋을 리 없다.
“술자리에서 콜라를 먹는 건 양해해 주시게. 몸이 노쇠하여 알코올 분해 능력이 떨어졌거든. 술은 되도록 멀리하려고 노력 중이야.”
연신 넉살 떠는 지르칸이었다. 그에게 페이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토록 힘든 분이 토론토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자네가 외로울 것 같아서.”
“....?”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이 노인이 뭐라는 거지?
드물게 당황하는 페이커에게 지르칸이 인자한 미소를 그려 주었다.
“자네는 누구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또한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노력해 왔지. 그리드 님과 크리스 도련님처럼 자네 또한 양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실력자야. 메달도 우습게 따겠지.”
“.....”
“하지만 자네는 입장 때문에 음지를 지킬 수밖에 없잖은가. 그렇기에 올해 또한 국가 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고.”
“.....”
“피가 끓어오를 게야.”
맞다. 지르칸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국가 대항전 시즌만 되면 페이커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느꼈다.
대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리드를 비롯한 실력자들과 멋진 승부를 겨루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페이커는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인물이다.
“들끓는 피쯤이야 쉽게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저는 알고 있거든요. 제가 굳이 양지에 나서지 않더라도, 이미 대중들은 저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걸로 충분합니다.”
“....훌륭하군.”
지르칸이 흐뭇해했다.
“작년의 나보다 훨씬 나아. 이거야 원, 내가 나이를 헛먹은 건가?”
지르칸이 크리스의 교육에 열중하기 시작한 이유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더 이상 대외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크리스의 집사이자 스승으로서의 역할에만 전념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지르칸은 본인이 가늠한 것 이상으로 게임을 좋아했다. 대중 앞에 서기를 즐겼다. 자신의 은퇴가 너무 일렀음을 깨달은 그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녹슨 탓에 작년 국가 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을 당시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무척 컸다. 그래서 페이커를 찾아온 것이다.
지르칸은 자신과 비슷한 고충을 느끼고 있을 페이커를 달래 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페이커는 이미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그 젊은 나이에 재능에 도취되지 않고 심력까지 성숙할 수 있던 것은.... 역시나 조부의 피를 이어서인가?”
수십 년 전, 아직 한국이 e-스포츠 강국이라고 불리던 시절, 한국에는 전설적인 게이머가 수도 없이 많았고, 젊은 시절의 지르칸은 그들을 동경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페이커의 할아버지였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정보는 아니지만 페이커를 처음 만났을 당시 지르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으니까.
“....재능은 조부에게 물려받았을지 몰라도.”
대답하는 페이커의 시선이 TV로 향한다. 그리드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노력의 자세는 그리드에게 배운 겁니다.”
거짓이 아니다.
페이커는 원래부터 부지런한 성격이었고 끈기가 충만했지만 그래도 적정선이라는 것을 알았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상식에 위반될 정도로 과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한도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만나고, 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페이커 또한 변했다. 이제 그의 노력에 한도는 없었다. 그렇기에 태양급 강자마저 꺾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드가 있는 이상 양지에 욕심은 없습니다. 양지의 왕은 그리드에게 맡기고, 저는 음지의 왕이 되겠습니다.”
“....패기마저 닮았는가.”
추억에 잠겨 눈을 반달로 그린 지르칸이 주인장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 주시게. 아무래도 나도 한잔 해야겠어. 전설의 핏줄과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
***
“꺄아아아악! 그리드 사마아!”
“갓리드! 갓리드!”
“유라! 유라! 유라!”
“.....”
입국 심사 후 짐을 챙기고 있는 한국 대표들에게 공항 직원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안전 구획을 확장할 때까지 잠시 대기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때부터 이미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아득한 인파를 확인한 극검이 혀를 내두른다.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구만.’
천 단위가 아니라 무려 만 단위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까지 뒤로하고 그리드와 유라를 만나고자 이곳에 달려와 모였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말이다.
극검은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역시 한국인은 위대해! 인구도 적은데 세계적인 위인을 잘도 꾸준히 배출한단 말이지!’
딱히 타국인을 비하할 의도는 없다. 그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국인이 타국인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음음.”
대한애국협회장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극검이었다. 그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흡족해하는 이때,
“그리드 선수, 1년 사이에 컨트롤 솜씨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평가를 듣고 계십니다. 실력 향상의 비결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래부터 잘했습니다. 단지 템빨에 묻혔을 뿐이지.”
“템빨국이 서대륙 국가 중 최초로 제국과 동맹 관계를 구축했는데요. 이로 인해 서대륙의 구도가 완전히 바뀔 거라는 것이 세간의 추측입니다. 제국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얻은 지금, 템빨국의 행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국과는 동맹 관계가 아닙니다. 일시적인 휴전 협정을 맺었을 뿐이죠. 제국을 뒷배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일본의 문화 중에 좋아하시는 문화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만화라든가요.”
“야.... 험, 험험! 야구 동영상을 좋아합니다.”
“야구 동영상이요? 일본 야구 리그 영상을 일부러 녹화해 놨다가 보시는 겁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일본은 대표적인 야구 성진... 아니, 선진국 중 하나이니까요. 관심을 갖고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야구를 좋아하신다니, 일본인으로서 참 기쁘고 자랑스럽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응원하는 팀을 여쭤봐도 될까요?”
“에스O디?”
“네? 그런 팀은 없는데요?”
“그것 참 아쉽.... 아니, 질문이 동시에 쇄도하는 바람에 제가 잠시 헷갈렸습니다. 저는 모든 팀을 다 좋아하고 응원합니다.”
“특정 팀을 응원하기보다 모두를 격려해 주시는 겁니까? 훌륭한 배려심을 갖추셨군요. 과연 일국의 리더답습니다.”
“실례합니다. 저도 질문 좀. 좋아하는 음식은 뭡니까?”
“쌈을 좋아합니다.”
“일본에서도 인기 많은 불고기나 삼겹살을 싸 먹는 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캔 참치 싸 먹는데요?”
“....?”
“고기는 채소랑 먹지 않죠... 기껏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고기의 맛이 채소 맛에 가리는 건 좀....”
그리드는 별에별 질문을 다 받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쑥스럽다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인터뷰를 거절했을 그였지만, 이제 그는 본인의 입장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었다. 본인이 일국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모든 질문에 충실히 답했다.
그 결과,
【상추, 캔 참치, 고추장 일시 품절. 스미마셍. 물량을 빠르게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일본의 각종 마트와 편의점에 이와 같은 팻말이 붙었다. 일본에 새로운 한국식 요리(?)가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역대급 대스타의 파급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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