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11화
‘그리드가 레전드리 아이템을 만들었다고? 심지어 이토록 짧은 시간 만에?’
판미르는 그리드의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을 0.01퍼센트 미만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근거는 충분했다.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시점은 최소 3~4년 전.
즉, 그리드는 벌써 3~4년 전부터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 된다. Satisfy 시간으로는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이다.
한데 그 긴 세월 동안 그리드가 제작한 레전드리 아이템은 고작 10개 이하로 추정됐다.
‘푸른 대검과 묵색 대검, 그리고 칠흑의 미늘갑옷 등…….’
그리드는 똑같은 아이템을 벌써 몇 년째 꾸준히 사용해 오고 있었으니까.
템빨왕이라는 이명과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아이템 기근 현상을 심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판미르는 이를 토대로 그리드의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을 무척 낮게 보았고, 이번 대회에서 그리드가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신의 기술을 넘보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Lv.8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그리드의 대장장이 기술은 이제 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과거의 그리드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었던 반면, 지금의 그리드는 ‘희박’한 확률로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드에게는 본인이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전설의 대장장이 망치>가 있다.
레전드리 아이템의 제작 확률을 무려 1퍼센트나 올려 주는 망치 말이다.
이론적으로 그리드는 100개의 아이템 중 1개를 레전드리로 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여태껏 만든 레전드리 아이템이 적은 이유?
순전히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라는 인물 개인이 타고난 악운이 시스템적 확률을 퇴색시켜 왔다.
S.A그룹 운영팀장 윤나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수년 전, 그리드가 운영팀에 보내왔던 수십 통의 e-메일 내용을 말이다.
<운영자님아, 저 전설의 대장장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분명히 제작법대로 아이템을 만드는데도 왜 만날 노말 아이템만 만들어지는 거죠? 버근가요??>
<영자님아?? 저번에 메일 보낸 사람인데요. 아이템 하나를 몇 시간 동안 정성들여서 만드는데도 왜 노말이나 레어만 뜨죠?? 심지어 레어도 잘 안 뜸.>
<야, 이 사기꾼 XX들아!! 내가 벌써 아이템을 수백 개를 만들었는데 에픽 이상이 안 뜬다!! 앙?! 이게 말이냐, 방귀냐!! 명색이 전설의 대장장인데 왜 전설 템을 못 만드냐고, 이 XXX들아!! 이게 버그 아니면 조작이지 뭐냐? 어?? 어?!>
<아오! XX! 이 사기꾼 새끼들! 내가 꼭 본사로 찾아가야 돼?? 좋은 말로 할 때 조작질 그만둬라??>
“…….”
내용의 태반이 육두문자로 도배되었던 그리드의 메일.
당시의 윤나희 팀장과 운영팀원들은 그리드에게 그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의 몰지각한 행동을 조용히 눈감아 줬다.
너무나도 불쌍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 확률은 운영팀이 봐도 너무 낮았다. 운영팀조차도 버그를 의심해서 조사해 봤을 지경이다.
물론 결론은 버그가 아니었다. 그저 그리드의 운이 나쁜 것으로 밝혀졌다. 운영팀 전원 그리드를 동정했었다.
‘그때는 상상도 못했지.’
대장장이 승부의 결과를 확인한 윤나희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저 사람이 이런 거물이 될 거라고는.’
그리드가 평소에 축적하는 불운은 중요한 순간마다 행운이라는 잭팟을 터뜨렸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드가 자신을 괴롭히는 불운에 좌절하거나 포기하기는커녕 끝까지 맞서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윤나희 팀장이 그리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축하해요.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하시기를 바라죠.”
***
‘…운 또한 실력. 나의 패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대는 무려 전설의 대장장이.
애초에 전설로 전직한 것부터가 그의 행운이 나의 행운을 압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판미르는 그리드에게 2년 연속으로 패배한 것을 납득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노력해 온 것이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자 강한 허무에 휩싸였다.
재단사 승부와 세공사 승부를 보라.
그 2개 종목 모두 재단사 랭킹 1위와 세공사 랭킹 1위가 우승을 차지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반면 대장장이 랭킹 1위인 자신은 여태까지 단 하나의 금메달도 목에 걸어 보지 못했다.
‘나 따위가 노력해 봤자 부질없구나.’
하늘은 왜 나와 그리드를 동시대에 낳았는가!
판미르가 한탄하며 좌절하는 그때, <실패작>의 성능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와! 성능 봐라. 진짜 미쳤다.”
“저게 제작 아이템이라고? 제작 아이템이 드롭 아이템보다 훨씬 더 좋은데?”
“아니, 뭐야? 저거 심지어 그리드가 창조한 아이템임??”
“그래서 이름이 실패작…….”
“저게 실패작이면 성공작은 대체……?”
그리드의 첫 창조물인 실패작은 현재 그리드의 기준에서 2티어 아이템에 불과했다. 주작궁이나 열망의 무아검 등과 비교하면 실패작은 많이 부족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실패작이 지존 무기로 인식되고도 남았다.
각국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실패작과 성공작이 올랐고, 네티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성공작의 성능을 분석하느라 바빴다.
소란 속에서.
“판미르.”
그리드가 판미르에게 다가왔다.
그리드는 걱정하고 있었다.
판미르의 눈빛이 과거, 아들을 잃고 시름에 젖었던 칸의 눈빛을 쏙 빼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당장이라도 게임을 접을 듯한 기세였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전개였다.
뛰어난 대장장이는 템빨국에 꼭 필요한 인재였으니까!
“이것 좀 보시죠.”
[플레이어 그리드가 당신에게 아이템의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
판미르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망치를 건네 오는 그리드의 행동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헉……!!”
의아해하면서 정보 공유를 수락한 판미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그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다.
<전설의 대장장이 망치>
등급:레전드리
내구력:550/550 공격력:130~150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30%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20%
유니크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8%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1%
*제작 관련 스킬 경험치 획득량이 상승합니다.
사용 조건:파그마의 후예
“이, 이럴 수가!!”
13년.
Satisfy에서 판미르가 대장장이로 활동해 온 기간이다.
판미르는 그 긴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아이템을 제작하고, 온갖 고난이도 퀘스트를 클리어했기 때문에 0.01퍼센트의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을 얻을 수 있었다.
한데 그리드의 제작용 망치가 올려 주는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이 1퍼센트인 것이다.
템빨 앞에 다 부질없었다.
비틀!
또다시 큰 충격을 받은 판미르가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쓰러지려는 것이었다.
그를.
“당신을 위한 제작용 망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드가 부축해 주었다.
판미르의 두꺼운 허리를 감싸 안고 시선을 가까이 마주친 그리드가 제안했다.
“조건은 당신이 템빨국으로 이주해 오는 것. 판미르,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부디 템빨단에 가입해 주십시오.”
“…하, 하지만.”
판미르는 그리드의 제안에 무척 큰 욕심이 생겼다. 잃었던 의욕이 다시 들끓을 정도였다.
하지만 드워프의 나라에서 에고 아이템 제작법을 습득한 이후, 현재 판미르는 제국의 차석 대장장이가 된 상태였다. 쟁쟁한 장인급 NPC들을 제치고 황제에게 직접 인정을 받았다.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의 비호를 받게 된 그에게는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이 있었다.
그 모든 걸 포기하고 템빨국으로 이주할 가치가 있을까?
망설이는 판미르에게 그리드가 현실을 주지시켰다.
“세상에 템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제국은 당신에게 템빨을 주지 못합니다.”
“읏……!”
판미르의 마음속 안개가 걷힌다.
인생은 템빨!
지고의 진리를 깨달은 그의 망설임이 사라진다.
“알겠네……! 내 곧바로 템빨단에 가입 신청을 넣도록 하겠네!!”
“정확히는 템빨단이 아니라 템빨 인력소… 아니, 템빨단 2군에 신청을 넣으셔야 합니다. 거기가 비전투직업군을 수용하는 곳이거든요.”
“응……? 아, 알았네.”
인력소라는 말은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두 귀를 의심한 판미르가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지……?”
중년의 아저씨와 젊은 청년이 부둥켜안은 채 서로 속삭이는 모습, 수많은 시청자들과 관중이 목격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와 판미르의 사이를 오해했다. 판미르의 얼굴에 떠 있는 홍조가 오해에 더 큰 힘을 실었다.
‘뭔가 좀 싸한데.’
그리드는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크게 괘념치 않았다.
어찌 됐든 오늘은 템빨국에 든든한 노동력… 아니, 최고의 인재가 확보된 기념비적인 날이었으니까. 그리드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국가대항전이 거듭될수록 그리드가 얻는 것은 이토록 컸다.
***
“한심하군.”
미국 선수 대기실.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판미르를 스컬이 비난했다.
판미르가 그리드에게 2년 연속으로 패배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은메달을 획득한 판미르는 비난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했으니까.
스컬이 분노하는 부분은, 판미르가 그리드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다른 대장장이들이 나오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 템빨단에 가입하기로 했다며?”
“그렇다네.”
“큭……! 당신은 자존심도 없나? 하필이면 섬겨도 그리드를 섬기겠다고? 운 좋게 전설의 대장장이로 전직한 덕분에 당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그리드를?!”
“그의 위업을 단지 행운 하나로 폄하하지 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고작 템빨 따위에 눈이 멀어서 제정신이 아니야!!”
사실 내심 판미르를 동경하고 있는 스컬이었다.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판미르를 스컬은 존경했다.
그래서 더욱더 실망감이 컸다.
“판미르! 나는……! 나는 당신이 끝까지 그리드에게 저항하고, 종국에는 그리드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미안하네.”
스컬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 판미르라고 모를 리 없다.
판미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코 당신처럼 되지 않을 거다! 템빨 따위, 실력으로 부정해 보이겠어!!”
선언한 스컬이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2시간 후.
“…나도 템빨단 가입 가능?”
<몬스터 장애물 경주>에 출전했다가 지슈카의 <주작궁>에 개처럼 얻어맞고 탈락한 스컬이 남몰래 그리드를 찾아갔다.
템빨의 진정한 위력을 깨달은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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