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14화
단 1분.
극검은 세상 사람들이 지존으로 인식하고 있는 존재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극검 본인 또한 사망하고 말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말도 안 돼! 버그다!!”
<영웅>을 숭상하던 자들은 현실을 부정하였고.
“저 정도면 올해의 크라우젤도 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진정한 지존은 크라우젤도, 그리드도 아닌 극검이었군.”
호사가들은 상황을 즐겼다.
지구 전역을 혼란의 소용돌이가 휩쓸었다.
하지만 당사자 극검은 모르는 일이었다.
“허억… 허억…….”
도취 상태의 이야루그트를 2회 사용한 대가로 사망에 이르렀던 극검.
로그아웃된 그의 전신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빗나간다면 필패.
막중한 부담감 속에서 <영웅>과 싸웠던 찰나가 극검에게는 억겁과도 같았다.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저런 괴물과 수십 분을 싸웠던 갓리드는 대체…….’
캡슐에 누운 채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극검에게 그리드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미 1년 3개월 전에 <영웅>과 호각을 겨뤘던 그리드가 대단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심지어 올해의 그리드는 작년의 크라우젤을 2격에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아이템 <이야루그트집>까지 제작하지 않았는가.
‘과연 갓리드… 너는 신이다.’
“…극검 선수? 극검 선수!”
“아.”
상념에 잠겨 있던 극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캡슐에서 몸을 일으켜 옆을 보니 진행자가 다가와 있었다.
흥분한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대단한 활약을 펼치셨습니다! 하늘 위의 하늘을 단 1분 1초 만에 무너뜨리다니, 당신이야말로 지존이 아니냐는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데요. 여태까지는 실력을 숨겨 오셨던 겁니까?”
작년 국가대항전 당시, 극검은 ‘쓸모없는 극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었다.
통합 랭킹 15위권의 최상위 랭커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극검의 통합 랭킹은 20위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올해의 그가 활약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다. 한데 반전적인 활약을 선보인 것이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진행자와 숨죽이고 있는 관중들.
세계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은 극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슬쩍 닦아 냈다. 그리고 최대한 멋진 표정을 짓고 말했다.
“두 유 노우 템빨?”
“…….”
“두 유 노우 갓리드?”
“…….”
안타까운 일이다.
마치 이야루그트집의 마력에 도취된 이야루그트처럼, 그리드와 템빨에 도취돼 버린 극검은 정상적인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약 세계 최고의 스타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었다.
<극검의 금메달 비결은 그리드의 템빨?>
<쓸모없는 극검을 쓸모 있게 만든 그리드.>
<(칼럼)만약 그리드가 영웅 깨기에 출전했다면, 그리드는 극검보다 빠르게 영웅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
등등.
각국 언론사의 헤드라인이 극검보다 그리드에게 집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갓리드으으으으!!”
<영웅 깨기>와 <폭포 뚫기> 종료 후.
5천만 국민의 염원이 담긴 금메달 2개를 목에 건 극검이 곧장 대기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리드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대단해! 네가 만든 아이템 덕분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어! 정말 넌 최고야! 신이라고!!”
“…….”
퉤퉷! 퉤퉤퉷!!
얼마나 흥분한 것인지, 극검은 말할 때마다 침을 다발로 튀겼다. 그리드의 얼굴이 흥건히 젖을 지경이었다.
“아니, 이런 괴물 같은 칼집은 어쩌다가 만들게 된 거야?”
“그건…….”
<이야루그트집>
내구력:200/200
*이야루그트 착검 시 이야루그트에 마기를 공급합니다. 마기는 10초당 1퍼센트씩 충전됩니다.
*이야루그트 발검 시 이야루그트의 마기가 소모됩니다. 마기는 초당 1퍼센트씩 손실됩니다.
*마력이 20퍼센트 충전되면 이야루그트의 상태가 <만족>에 돌입합니다. 이때 이야루그트는 주인에게 쉽게 복종하며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이 상태는 발검 후 30초 동안 유지됩니다. 발검 시 마기 충전률은 초기화됩니다.
*마력이 70퍼센트 충전되면 이야루그트의 상태가 <흥분>에 돌입합니다. 이때 이야루그트는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으며, 발검 시 멋대로 실체화합니다. 이 상태는 발검 후 70초 동안 유지됩니다. 발검 시 마기 충전률은 초기화됩니다.
*마력이 100퍼센트에 도달하면 이야루그트의 상태가 <도취>에 돌입합니다. 이때 이야루그트는 주인을 자신의 먹잇감으로 인식합니다. 발검 시 이야루그트의 공격력이 500퍼센트 상승하며, 사용자는 4초 내에 생명력 50퍼센트를 잃고 30초 내에 사망합니다. 사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발검 후 10초 내에 착검해야 하며, 마기가 하락하는 2분 동안 다시 발검해선 안 됩니다. 다시 발검하는 순간 즉사합니다.
사용 조건:없음. 단, 착검할 수 있는 무기는 이야루그트로 한정됨.
그리드는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 지옥 최고의 광물 블러드스톤 확보에 성공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쓰임새를 쉽게 찾지 못했다.
마검을 만들기에는 이미 이야루그트가 있었고, 방어구를 만들기에는 양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벨리알을 레이드하고 암 속성 제작 재료를 대량으로 확보했기 때문에, 블러드스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여 한동안 블러드스톤을 방치하고 있던 그리드는 국가대항전을 앞둔 어느 날 가설을 세웠다.
검귀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굳이 블러드스톤 재질의 검에 봉인된 이유, 이야루그트의 영혼과 블러드스톤의 상성이 좋아서가 아닐까?
블러드스톤으로 칼집까지 만들어 주면 이야루그트가 더 강해지지 않을까?
크라우젤과의 일전을 앞두고 템빨의 강화에 집착하고 있었던 그리드는 즉각 칼집의 제작에 돌입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야루그트집>이다. 이야루그트의 규격에 딱 맞춘 아름다운 칼집이었다.
“그리고 보다시피 강력한 칼집이 탄생했지. 그만큼 페널티도 강하지만.”
만족 상태의 이야루그트는 이미 <열망의 무아검>이 있는 그리드에게 메리트가 전혀 없다. 이야루그트의 공격력이 잠시 동안 20퍼센트 올라 봤자 열망의 무아검에 비하면 너무 약했다. 소환돼 봤자 통제가 안 되는 흥분 상태의 이야루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도취 상태의 이야루그트는 다를까?
공교롭게도 도취 상태의 이야루그트 또한 그리드에게는 매력이 적었다.
순수 공격력이 500퍼센트 상승한다고 해 봤자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3초에 불과했고, 각종 옵션을 보유한 열망의 무아검과 비교해서 데미지 기댓값이 크게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 공격력은 더 높으니까 옵션 발동을 기대해야 하는 열망의 무아검보다야 안정적인 딜량이 가능하지만.’
그 조금 더 높은 데미지를 바라고 열망의 무아검과 굳이 스왑해 가면서 사용할 가치는 없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리드가 ‘직접’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
씨익 웃은 그리드가 극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대여한 아이템은 반납해야지?”
갓 핸드가 사용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명력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갓 핸드는 도취 상태의 이야루그트를 적은 페널티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그래. 당연히 돌려줘야지.”
극검이 바로 캡슐에 누웠다.
높은 공격력 계수를 자랑하는 발검술과 이야루그트의 시너지는 분명히 환상적이지만, 마기를 다루지 못하는 극검에게는 이야루그트를 사용할 자격이 없었다. 극검은 도취 상태의 이야루그트밖에 사용할 수 없었고, 이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뜻이다.
국가대항전 같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이상 이야루그트는 극검에게 부적합한 아이템이었다.
극검은 이야루그트와 이야루그트집에 조금도 욕심내지 않았다.
다만.
“그… 저기, 갓리드. 이번에 얻은 금메달로 광물을 달라고 할 테니까, 그걸로 내게도 칼과 칼집 세트를 만들어 줄 수 없을까?”
극검의 조심스러운 요청.
그리드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사신수의 부산물.
<주작의 숨결>에 화염의 힘이 깃들어 있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청룡의 숨결>에는 전격의 힘이 깃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뇌 속성 아이템은 신속 옵션이 귀속될 확률이 크다.
“청룡의 숨결을 달라고 해.”
극검은 얼마나 강해지게 될까.
그리드가 전율에 휩싸였다.
자신의 기술이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자랑스러운 그였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이제 마지막 경기만이 남았군요!』
국가대항전 3일 차.
총 9개의 종목 중 8개의 종목 일정이 끝나고 이제 폐막전만이 남았다.
PvP.
세계인이 1년 이상을 고대해 온 빅 매치,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재대결이 성사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큭! 큭큭큭!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
아르헨티나의 수에론.
“그리드고 크라우젤이고 나발이고 간에 내가 멱을 따 버리면 되는 거 아이니?”
중국의 장췐.
“그리드! 올해 반드시 설욕해 주겠다! 풍화의 힘으로 너의 템빨을 무력화시켜 주지!!”
블러드 카니발 소속이었던 타르마.
그리고.
“…….”
천외천.
내로라하는 강자 32명이 무대 위에 집결했다.
개중에는 당연히 그리드도 있었다.
<한국> 금(6) 은(1) 동(2)
<미국> 금(5) 은(8) 동(4)
“그리드 힘내라!”
“올해는 제발 이겨 줘!!”
“크라우젤! 이번에도 꼭 이겨라!!”
“종합 순위 1위는 반드시 미국이 차지해야 한다고!!”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크라우젤! 크라우젤! 크라우젤!!”
관중들의 외침이 도쿄 전역에 울려 퍼진다.
들썩이는 도쿄돔의 열기가 뜨겁다.
하늘 위의 하늘과, 그 위까지 한번 도달할 뻔했던 철옹성.
올해 추락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성검 뽑기에서 말이야.”
무대 위의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드가 말하고 있었다.
“네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유라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나는 안도하고 있었어.”
“…….”
“다행이야. 그때 네가 지지 않아서. 만약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졌다면 지금 내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진 않았을 거야.”
하늘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나여야만 한다.
지존이 되기까지 남은 마지막 증명이다.
“올해는 반드시 내가 이겨 주마.”
의욕을 불태우는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이 짤막하게 답했다.
“기대하지.”
크라우젤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특별했다.
유일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오늘날의 이 대결, 어쩌면 그리드보다 크라우젤이 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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