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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13화 (608/1,794)

템빨 36권 - 20화

미국 선수 대기실.

라우엘과 나란히 앉은 판미르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마치 생일 케이크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들뜬 모습이다.

이제 곧 국가대항전이 끝나면 템빨단의 일원으로서 새 삶을 살아갈 거라는 기대감에 흥분한 것이었다.

“템빨국에도 대장장이 장인이 있다며?”

“네. 총 다섯 분이 계십니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판게아의 대장장이들과 칸.

그들 모두 그리드에게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장인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칸의 장인 레벨이 높았다. 라우엘이 감히 자부하건대 대륙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에 드는 수준이었다.

“대장장이 칸이라……?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네. 20년 전까지만 해도 에트날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칭송받다가 아들을 잃은 후로 은퇴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분 맞습니다.”

“허허, 사실은 은퇴한 것이 아니라 그리드 전하를 따르고 있던 건가. 덕택에 장인의 반열에 오르다니, 칸에게 있어서 전하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겠군.”

그리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재를 선별하여 육성해 온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자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감탄하는 판미르에게 라우엘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구원자라……. 도리어 칸 님께서 그리드 전하의 구원자가 아니었을까요.”

“음?”

“하하, 아닙니다.”

칸의 대장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 봤자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작 NPC다.

NPC인 그가 그리드의 첫 번째 친구이자 동료였고, 스승이자 제자였으며, 또한 가족이었다는 사실.

백날 말해 봐야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모니터 속 그리드.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그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깃들었다.

***

“…….”

“…….”

밤의 어둠에 잠긴 고성.

매해 PvP의 무대가 되고 있는 이 <사자의 성>은 규모가 무척 컸다. 7층짜리 첨탑이 4개나 있었고, 끝없이 길게 펼쳐진 복도를 좇아 시선을 돌려 보면 방이 족히 수백 개였다.

하지만 결국 폐허다.

과거에는 찬란한 문명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거성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 누구의 발길도 없이 쓸쓸한 바람에 스러져 가는 유적에 불과했다.

치칙, 치지직.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수백 개의 기둥.

당장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생길 정도로 위태로운 모양새로 있던 그것들 중 하나가 밤바람을 맞고 균열을 키운다.

툭, 투두둑.

지면 위로 떨어지는 돌가루가 신호가 되었다.

극도로 집중한 채, 이끼가 낀 분수대를 중심에 두고 마주하고 서 있던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동시에 움직였다.

채애애앵-!!

어둠에 잠식된 일검.

흔적도 없이 쏘아진 크라우젤의 <+9 진 백아도>가 그리드의 어깻죽지를 스쳐 지나갔고.

[완전한 회피에 실패하였습니다. 1,2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삼겹갑>의 내구력이 1 하락합니다.]

콰자자작!!

어둠을 가르는 검광.

맹수의 발톱처럼 위협적인 반월을 그린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은 낡은 분수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칫!”

<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무장하고 날린 공격조차도 손쉽게 피해 버리다니?

패시브화된 <초감각>과 타고난 혜안을 십분 활용하는 크라우젤의 움직임에 경탄하며 이를 간 그리드가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회전했다.

그러자,

쩌어어어어엉-!!

때마침 그리드의 등 뒤로 나타난 크라우젤의 백아도와 열망의 무아검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강력한 일격을 막아 내었습니다!]

[양손이 일시적으로 마비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9 진 백아도의 내구력이 2 하락합니다.]

“큭……!”

신검을 무장한 그리드의 공격력은 크라우젤의 상정 범위를 초월하고 있었다.

단지 검과 검이 충돌했을 뿐이건만, 그 일검에 실린 무게가 워낙 대단하여 크라우젤은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어때?”

<도살귀의 안대>와 높은 통찰력 덕분에 크라우젤의 등장 지점을 비교적 빨리 파악하고 반응할 수 있었던 그리드가 질문한다.

“강해졌지?”

“최고다.”

“핫……!”

크라우젤의 긍정이 그리드를 한껏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더욱더 격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박동을 느낀 그리드가 앞으로 전진했다.

열망의 무아검에 짓눌려 있는 백아도와 크라우젤을 통째로 밀어 버리면서 보법을 전개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순간.

“파쇄 검.”

크라우젤이 소드 브레이커 계열의 검성 고유 스킬을 전개했다.

휘리릭!

백아도에 맞물려 있던 열망의 무아검이 백아도의 회전을 쫓아 함께 회전하였고, 자연히 그리드의 손목도 함께 돌아갔다.

콰자자작!!

소름 돋는 기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손목이 꺾여 나갔습니다.]

[상태 이상 골절에 걸립니다.]

[앞으로 20초 동안 공격 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하고, 주는 피해량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의 현재 내구력이 12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미친!’

저항 불가의 물리적 상태 이상을 유발함과 동시에 무기의 내구력을 대폭 하락시키다니?

그리드는 상기한다.

지금의 크라우젤, 검의 묘리를 통달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검성의 경지를 이룩한 상태임을.

Satisfy 세계관을 통틀어도 몇 없던 최강자가 바로 지금의 크라우젤임을!

서걱!

파파파팟!!

[4,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9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230의 피해를…….]

[4,110의 피해를…….]

공격을 한 번 허용함과 동시.

도살귀의 안대와 통찰력으로도 간파할 수 없는, 사각으로부터의 검격이 세 차례 연계되며 그리드의 몸을 난도질한다.

‘도검류 무기를 무장한 경우’ 최소 데미지 보정을 받고 방어력 비례 데미지, 그리고 모든 종족에게 추가 데미지를 입히는 검성 고유의 능력이 삼겹갑의 방어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갓 핸드!!”

흐름이 좋지 않다.

상황을 초기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소리치자, 그의 등 뒤로 4개의 황금 손이 솟구쳐 올랐다.

때마침 걷히는 먹구름 아래로 완연한 달빛이 드리우자 찬란한 황금빛이 일대를 물들였다.

하지만 금세 걷혀 버렸다.

크라우젤이 개방한 인벤토리로부터 4자루의 검이 쏘아지더니, 갓 핸드를 모조리 날려 버린 까닭이었다.

<이기어검>이다.

검성은 최소 1자루에서 최대 10자루의 검을 원격 제어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육신과 검을 동시에 제어할 수 없겠지만.

스르륵.

천외천 크라우젤은 가능했다.

검을 제어함과 동시에 <백광보>를 전개, 달빛 아래 은신한 그는 이미 그리드의 측면에 도달해 있었다.

“익……!”

크라우젤의 접근을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황급히 검을 휘둘러 보지만.

스파앗-!

상태 이상 골절에 발목을 잡혔다.

‘도검류 무기를 무장한 경우’ 최고 공속 도달의 효과를 얻는 크라우젤의 검이 그리드의 검보다 훨씬 더 빨랐다.

[4,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쿨럭!”

옆구리를 크게 베인 그리드가 피를 토했고, 공격과 동시에 전진하여 이동한 크라우젤은 그리드의 후위를 장악하였다.

완전한 빈틈을 드러내고 있는 그리드의 바로 등 뒤에서.

철컥!

착검한 크라우젤이 허리를 숙이며 발도의 자세를 취한다.

세상을 가르는 검, <우주 검>의 전조였다.

서걱-!

백아도가 검광을 토해 냄과 동시에 대지가, 어둠이, 달이.

쩌적! 쩌저저저적!!

동시에 반으로 쪼개진다.

하지만 정작 표적이었던 그리드는 피해 버렸다.

모든 논타겟 스킬을 회피하는 <종횡무진>을 사용한 덕분이다.

검성의 궁극기조차도 세상을 구원해 온 <은밀한 영웅>은 해치기 어려웠다.

콰작-!

상승 후 하강.

간단한 동작으로 우주 검의 범위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던 그리드의 반격이 크라우젤의 몸을 베어 버린다.

[9,4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

‘도검류 무기에 받는 데미지의 최대치를 40퍼센트 감소시킨다’는 패시브가 제대로 적용된 것이 맞는가?

의문이 생길 지경으로 강력한 피해를 입은 크라우젤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더 큰 문제는, 그리드의 공격은 1차적 피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확률적으로 최대 3차 피해까지 가능하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공격력의 300퍼센트 피해를 입히는 칠흑의 불꽃이 크라우젤을 집어삼키자,

『아앗……!』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침음을 토했다.

PvP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타르마를 일격에 소멸시켜 버린 최강의 즉발 스킬이 발현되었으니, 크라우젤의 치명상을 예견한 것이다.

『크, 크라우젤 선수! 설마 이대로 로그아웃당하는 겁니까!!』

전설 클래스 전직자에게는 불사 패시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정황을 토대로 이제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해설진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우젤이 이번 일격에 죽었을 리 없다는 사실, 해설진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극적인 해설을 위해서 자극적으로 떠들었고, 분위기에 휩쓸린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극도로 긴장했다.

특히 크라우젤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아찔한 심정으로 검은 불꽃의 잔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년 동안 동경해 왔던 하늘 위의 하늘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

촤르르르륵!!

은빛의 보호막이 검은 불꽃을 거두었다. 사자의 성 일대를 휩쓸고 있던 검은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검기를 자원으로 사용하는 검성의 방어 스킬, <검막>의 효과였다. 검을 수십 차례 휘두름으로써 보호막 기능을 만드는 검막은 마법 피해와 물리 피해를 모조리 차단하는 기능을 지녔다.

“…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크라우젤을 목도한 그리드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여태까지 자신을 상대해 왔던 무수한 경쟁자들.

어쩌면 그들 모두 나를 상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았을까?

“사기 아니냐?”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에 꺼내는 그리드였다.

최강의 레전드리 클래스, 검성.

템빨왕 그리드를 상대함으로써 완연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시대의 강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영웅왕의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드도 완전해진다.

크라우젤의 레벨이 낮은 탓에 10으로 유지되고 있던 그리드의 투기가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검성의 직업 효과가 만들어 낸 숨겨진 효과였다.

고오오오오오…….

실체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리드의 몸 주위로 마치 아지랑이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투기가 점차 실체화되자 사람들이 탄성을 토했다.

“저게 뭐지?”

“와, 엄청 멋지다.”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하나둘씩 눈치채기 시작한다.

그리드가 몸에 두르고 있는 적색과 자색의 기운을.

존재 자체가 전설이었던 무패왕의 막강한 힘.

그의 의지를 계승한 그리드를 통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두근!

크라우젤의 본능이 외친다.

올해의 대결, 작년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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