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2화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것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 앞서간다.
‘이번에는 그리드가 앞섰다.’
악룡 번헬리어.
절대로 레이드할 수 없는 세계관 최강의 존재.
크라우젤은 놈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반면, 그리드는 놈에게 복수하기를 꿈꿨다.
엄청난 차이다.
번헬리어를 염두에 둔 채 성장해 나가는 쪽이 더 빠른 발전을 이룩할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상대적으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크라우젤 또한 번헬리어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천하의 천외천을 그리드가 강제해 버린 셈이다.
“단죄 검!”
대상의 방어력을 100퍼센트 무시하는 단죄 검은 막강한 공격력 계수를 자랑하는 검성 고유의 궁극기 중 하나다.
번헬리어의 절대방어는 꿰뚫지 못했으나 그리드에게는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은빛의 검기를 두른 백아도가 그리드에게 쇄도하는 그때.
“십만대군 학살검!”
“……!”
방어나 반격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리드가 예상치 못한 스킬을 전개했다. 번헬리어에게조차 큰 피해를 입혔던 최강의 스킬이었다.
크라우젤이 예측하지 못한 전개다.
‘왜지?’
그리드는 투기가 축적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 봐도 투기를 최대치로 유지하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십만대군 학살검을 사용함으로써 투기를 소모했다. 크라우젤에게 종횡무진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말이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내린 걸까?
의문에 휩싸인 크라우젤이.
“종횡무진!”
<은밀한 영웅>의 힘을 개방, 지근거리에서 수십 회 방출되는 십만대군 학살검의 투기를 모조리 회피했다.
“우와……!”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을 단 1초 만에 30회 휘두르는 그리드와, 그 신속의 공격을 코앞에서 모조리 회피해 버리는 크라우젤의 현란한 움직임에 사람들 모두 넋을 잃었다.
파직! 파지지지직!!
허공에 아로새긴 적흑색의 검광들이 채 사라지기도 전.
터억-!
잔광을 남기면서 그리드의 측면에 도달한 크라우젤이 단죄 검을 꽂아 넣었다.
[대상에게 53,4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푸우우우욱-!
그리드의 허리 깊숙이 꽂히는 백아도!
치명상을 입은 그리드가 검붉은 피를 토한다.
크라우젤이 승기를 잡는 순간이었다.
관중들이 탄식했다.
악룡 번헬리어를 잠시나마 주춤거리게 만들었던 그리드를 사람들은 이제 전보다 더 동경하고 있었다. 천외천과 비슷한 수준으로 말이다.
그가 긴 싸움 끝에 패배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생겼으니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크라우젤은 단죄 검에 연계할 수 있는 <백익 검>과 <흑익 검>, 그리고 <쌍익 검> 콤보를 완성하기 위해서 백아도를 회수하고 있었다.
이때.
“……!”
크라우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드의 검끝에 맺혀 있는 강렬한 기운을 감지한 까닭이다.
이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크라우젤은 알고 있었다.
‘연살파극(聯殺派極)……!’
그리드가 대악마 벨리알 레이드에서 선보였던 궁극의 검무!
그리드와의 대결을 앞둔 크라우젤이 가장 두려워했던 힘이다.
크라우젤이 결승전 내내 그리드의 보법을 차단, 그가 검무를 연계하지 못하게끔 노력했던 이유는 오로지 연살파극(聯殺派極)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리드가 완성해 버렸다.
크라우젤이 십만대군 학살검에 집중하는 동안에 말이다!
‘이걸 의도하고……!’
나의 신경을 분산시키고자 투기까지 소모해 가면서 십만대군 학살검을 사용한 건가?
순전히 보법을 밟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 최강의 스킬을 소모했다고?
아니, 애초에 십만대군 학살검이 최강의 스킬은 맞는 걸까?
아니다.
연살파극(聯殺派極)이야말로 최강일 것이다.
오싹!
크라우젤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고.
고오오오오오오-!
열망의 무아검이 포효했다.
불꽃이 점멸하는 묵색의 장검을 눈앞에 둔 크라우젤이 깨달았다.
그리드가 번헬리어에게 십만대군 학살검을 사용했던 시점부터 자신은 함정에 빠졌음을.
십만대군 학살검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가장 경계해야 할 연살파극을 망각하게 되었고, 연살파극을 위해 아껴 놨어야 할 종횡무진을 섣불리 소모하고 말았다.
푸욱-!!
푹푹!!
연살(聯殺)의 묘리를 담은 열망의 무아검이 크라우젤을 연속적으로 찌른다.
열망의 무아검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강력한 살기가 담긴 일검, 일검을 나비처럼 현란하면서도 벌처럼 빠르게 쏘아 내었다.
[43,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큭……!”
크라우젤은 완벽하게 피하기 어려웠다.
패시브화된 초감각.
액티브 스킬이었을 때의 초감각과 비교하면 페널티가 없다는 장점을 지녔으나, 기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만약 크라우젤이 300레벨을 달성해서 스탯이 3차 각성을 맞이한 상태였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높은 민첩성을 기반으로 패시브화된 초감각을 극대화시키고 연살파극을 회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크라우젤은 고작 200레벨대다. 심지어 갓 핸드를 견제하느라 이기어검을 전개 중이다.
검성으로 전직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푹푹!!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고정되며,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도검류에 받는 피해를 줄여 주는 검성의 효과가 무색하게도 불사 상태에 돌입하는 크라우젤.
연살에 이어지는 파(派)의 묘리에 휩쓸려 자세를 무너뜨리는 그에게 그리드가 소리쳤다.
“내년의 영웅은……!”
작년 PvP의 우승자 크라우젤은 새로운 종목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모두의 우상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드는 그를 보며 욕망을 불태웠었다. 내년에는 기필코 자신이 영웅에 등극하고 말겠다는 탐욕이 그를 지배했다.
“내년의 영웅은 바로 나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승리를 향한 그리드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했다. 마치 이에 호응하듯이, 열망의 무아검이 평소보다 더 미쳐 날뛰었다.
검은 불꽃이 연속적으로 폭발하였고, 붉은 벼락이 내리치면서 크라우젤을 넝마로 만들어 버렸다.
“크윽! 하늘 넘기기!!”
파도처럼 일렁이는 검기에 휩쓸린 크라우젤.
이를 악물고 몸을 가눈 그가, 코앞으로 떨어지는 극(極)을 반격기로 맞받아쳤다.
하늘 넘기기.
크라우젤이 <하늘 찢기>를 모티브로 삼아서 <검술 창조> 스킬로 창조한 최강의 반격기다. 위력은 회(回)와 최소 동급이었고, 그리드와 달리 보법을 밟지 않아도 즉시 시전할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회(回)를 상회하는 반격기였다.
그것이.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연살파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극을 맞받아치자.
“쿨럭!”
그리드의 가슴으로부터 대량의 피가 분출되었다.
여기서.
“우오오오오오!!”
불사 상태에 의지한 크라우젤이 공격일변도로 전향했다. 강력한 피해를 연달아 입고도 여전히 생명력이 남아 있는 그리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그 또한 불사를 소모하게 만든 다음 전투를 처음으로 되돌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계획은 차단되고 만다.
[생명력이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암흑의 룬에 귀속된 <티라멧의 힘>의 효과로 31,600의 생명력이 즉시 회복됩니다.]
[대왕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로 92,800의 피해를 흡수하는 보호막을 얻었습니다!]
“뭐……!”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크라우젤이 경악성을 뱉는다.
그리드를 노리고 꽂혔던 그의 백아도가.
쩌저저저저정!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드의 보호막에 가로막혔고.
“대박!”
“헐…….”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감탄하느라 바빴다.
마치 물약을 마신 것처럼 대량의 생명력을 회복함과 동시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호막까지 얻은 그리드의 모습, 반트너나 부바트 등의 유명한 탱커들의 탱킹력을 가뿐히 압도하고 있었기에!
“흑화!!”
“파천……!”
크라우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계승한 피아로의 검술이 그리드를 위협하였다.
레벨이 낮아 자원이 부족한 까닭에 검성 고유의 스킬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쩌저정!
채채채채채채챙!!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검이 쉬지 않고 맞부딪쳤다.
보호막의 비호 속에서 흑화까지 전개한 그리드의 투기는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반면, 크라우젤은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는 불사를 잃어 갔다.
결국 크라우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기어검의 회수.
갓 핸드를 무시하고 분산된 신경을 하나로 합친 그가 집중력을 회복하고 본연의 컨트롤 실력을 되찾았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큭……!”
그리드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찬란하게 빛나던 그의 보호막이 점차 빛을 잃어 갔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꺼지기 직전의 불꽃에 불과했다. 갓 핸드들이 그리드에게 합류하기 시작하자 이미 대부분의 자원을 소실한 상태인 크라우젤은 차츰 무력화됐다.
급기야.
쩌어어어어어엉!!
푹-! 푸우우우욱-!!
크라우젤의 마지막 혼신의 일격이 그리드의 보호막을 갈라냄과 동시에 그리드의 검은 크라우젤의 심장을 꿰뚫었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온갖 레이드와 퀘스트에 성공하고 심지어 왕위에 오른 그리드이다.
반면 검성으로 전직한 이후 레벨링에만 집중해 왔던 크라우젤에게는 아직 검성이라는 직업 외엔 새로운 무기가 없었다.
두 사람의 차이.
사실은 처음부터 명확했던 것이다.
시간은 크라우젤의 편이 아니었다.
“그리드.”
<아이템 변신>으로 재현된 4자루 리파엘의 창과 살(殺)에 무참히 꿰뚫린 크라우젤.
잿빛으로 산화하기 전,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뻔히 알고도 말한다.
“앞으로는 네가 나의 우상이고, 내가 도전자다.”
크라우젤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리드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 왔는지.
선망과 동경.
그처럼 부담스러운 시선이 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드디어 해방이다.
피식.
더없이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크라우젤의 피 묻은 손이 그리드의 뺨을 감싸는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
크라우젤의 몸이 잿빛으로 산화했다.
제3회 국가대항전의 PvP 우승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종합 순위 1위가 확정되었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반도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5천만 국민들.
누군가는 행복에 겨워 웃었고, 누군가는 감격해 울었다.
“우리 아들 최고다!!”
“오빠……!”
물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그리드의 가족이었다.
드디어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를 꺾고, 심지어 그에게 인정받는 그리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그들이 감격해 엉엉 울었다.
한편, PvP 무대에 홀로 남은 그리드는.
“…….”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방심했다가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로그아웃.”
이제 현실로 돌아갈 때다. 그토록 꿈꿔 왔던 <지존>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서.
***
『하늘 위의 하늘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을 종합 순위 1위로 이끈 그리드 선수가 단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아아, 한국이 1위라니,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너무 뿌듯하고 행복해서 눈물이 흐릅니다. 대한민국의 아들 그리드 선수가 참으로 자랑스럽네요.』
“그리드 선수!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새로운 하늘에 등극하신 기분이 어떻습니까?”
수백, 수천 대의 카메라 셔터가 쉬지 않고 터진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와 관중들의 환호도 끊이질 않는다.
Satisfy가 오픈한 지 4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지존이 바뀌었으니 세상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리드의 얼굴과 이름이 전 세계 뉴스를 장식했고, 여태까지 그리드가 쌓아 올린 위업이 만천하에 소상히 공개되었다.
새로운 하늘이 될 자격, 그리드에게는 차고도 넘쳤다.
‘모두…….’
부모님과 세희.
그리고 칸과 아이린, 로드.
단상 위에 오른 채, 선망에 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그리드의 머릿속에 자꾸만 그들의 얼굴이 맴돈다.
그리드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에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들의 품에 안긴 채, 또는 그들을 품에 안은 채 자신이 보다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리고 싶었다.
찰칵! 찰칵찰칵!!
각국 언론사의 카메라 셔터가 더욱 빠르게 터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본능적인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없이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그리드의 지금 모습을 반드시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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