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30화 (625/1,794)

템빨 37권 - 15화

“이 또한 괜찮구나.”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을 맛보는 황제 쥬앙데르크의 표정이 내내 흡족하다. 다른 대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륙 전역의 음식 문화를 재해석한 제국식 요리는 본래부터 맛 좋기로 유명했지만 오늘따라 특히 더 맛이 좋았다.

귀빈이 방문한 날이니만큼 황실 주방장들이 단단히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았다.

‘후후훗, 촌놈에게는 이 맛이 충격적일 테지.’

천공왕 리갈이 그리드의 반응을 살폈다. 템빨국의 특산물은 감자라고 했던가? 역사도 없는 나라의 돼지 사료 같은 음식만 먹다가 대제국의 음식을 맛보게 된 촌놈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리갈은 기대됐다.

역시나.

“음식 맛이 하나같이 좋군요. 특히 밀가루로 만든 음식들이 일품입니다.”

그리드의 반응은 리갈의 기대대로였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음식을 칭찬했다.

사하란 제국은 모든 면에서 최고여야 하는 법.

그리드의 감탄이 황제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황제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확인한 리갈이 눈치 빠르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총주방장이 달려왔다.

“부, 부르셨사옵니까.”

황제 폐하의 어전에서 부름을 받다니?

총주방장은 우선 두려움이 앞섰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범해서 황제와 대신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에게 리갈이 말했다.

“음식들에 대해서 귀빈께 설명해 드리도록 하게. 아무래도 귀빈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음식이 많을 게야. 자네가 이곳의 책임자답게 배려를 해 드려야지 않겠나?”

모든 음식에는 역사와 배경이 존재한다. 알고 먹는 음식이 더 맛있다.

리갈은 이와 같은 이치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리드를 촌놈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드를 보는 눈빛에 담긴 경멸이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이를 마주한 그리드는 울컥하지 않았다. 도리어 차분하게 웃으면서 상황을 즐겼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리갈 공.”

“별말씀을요…….”

그리드의 감사에 답하는 리갈이 속으로 혀를 찼다.

‘눈치까지 없는 놈이로구나.’

자기를 놀리는 것도 모르다니, 역시 촌놈은 촌놈이다. 놀리는 맛도 없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리갈에게 레이첼이 이죽거렸다.

“당신은 아직도 애네. 약한 사람이나 괴롭히고 말이지.”

“네가 할 말이냐? 어릴 때 너한테 괴롭힘 당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 요즘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난다.”

가문의 인연 때문에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이다. 추억을 회상하는 그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템빨왕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요리는 모두 템빨국산 밀을 사용해서 조리하였습니다.”

“……!”

“……?!”

총주방장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 상황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대신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어쩐지 밀을 사용한 요리들의 맛이 특히 좋더라니, 템빨국산 밀을 사용했던 거였어.”

“역시 알고 계셨군요. 네, 맞습니다. 대륙 최고의 밀을 선물로 보내 주신 전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

총주방장은 일개 요리사일 뿐이다. 정치적인 부분에는 무지했다. 그는 그리드를 액면 그대로 황제의 소중한 손님으로 인식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순수하게 템빨국산 밀을 극찬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총주방장은 어쩌면 오늘 당장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대춧빛으로 물든 리갈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 그리드는 이대로 리갈을 비꼬아 줄까 했으나.

‘그건 아니야.’

치졸한 사람보다는 대범한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법이다.

본인이 템빨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현명하게 처신했다.

“우리 밀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을 보아하니 과연 황실의 총주방장답소.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처럼 훌륭한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이 멋진 제국의 음식들을 매일 맛볼 수 있으시니 어찌나 행복할까. 내 부러울 따름이오.”

“과, 과찬이십니다.”

귀빈의 극찬에 감격한 총주방장이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고, 망신당했다는 생각에 불쾌한 낯을 하고 있던 황제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드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템빨왕의 말이 옳다. 좋은 재료로 이토록 멋진 음식을 만들어 주는 요리사를 곁에 두고 있으니 짐은 행복한 사람이야. 오늘이야말로 천년포도로 담근 와인을 꺼낼 때다. 술잔을 대령하라.”

“예, 폐하!”

그리드의 처세 덕분에 만찬회장의 분위기가 다시금 화기애애해진다.

황제와 그리드, 그리고 대신들 모두가 술잔을 돌리며 이 순간을 즐겼다. 황제가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대신들 모두 속내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쯧.’

회장 구석에 앉아 음식을 씹던 검공 리미트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황비 마리의 궁전이다.

***

“산전수전 다 겪은 자입니다.”

리미트는 그리드를 이처럼 평가했다.

“상황을 읽는 능력이 무척 뛰어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아 쉽게 도발에 넘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도발을 역으로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현명한 자입니다.”

시녀가 정돈해 주는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마리가 큰 흥미를 보였다.

“의외로군요? 순전히 무력 하나로 나라를 집어삼킨 인물답게 단순하고 난폭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만… 아무래도 타고난 정치인 같습니다.”

타고났다는 표현은 그리드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리드는 본래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인물이었고, 심지어 어리석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리미트가 알 리 없다.

오늘 리미트가 만난 그리드는, 리미트의 말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리드였다. 이미 성장한 그리드인 것이다. 리미트의 입장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베라딘의 말대로 만만찮은 상대네요.”

베라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황비 마리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인물.

리미트는 그가 영 수상하고 미덥지 못했으나,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맞습니다. 오늘 반드시 계획대로 그리드를 치고, 그리드가 황제 폐하와 척을 지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적기사단에게는 말해 놓았습니다.”

“좋아요. 바로 임모탈을 보내도록 하죠. 이번 일, 잘 마무리하도록 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저 그런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 별 볼 일 없던 자신이 제국의 공작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큰 희열을 주었다.

아들을 황좌에 앉히고, 더 큰 권력을 거머쥐게 되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지 않을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인다.

***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황도 타이탄 외곽.

그리드를 배웅하는 백성들의 환호가 멀어질 무렵, 그림자 속 카심이 질문해 왔다.

세간에 폭군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의외로 평범했다. 제국민들에게는 좋은 통치자일 수도 있겠다, 라고 대답하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카심에게 있어서 황제 쥬앙데르크는 찢어 죽이고 갈아 마셔도 부족할 철천지원수임을 상기한 것이다.

결국 그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황제야 뭐, 황제지. 엄청 거만하더군.”

-…생각이 깊어지셨군요.

“응?”

-예전과 달리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읊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카심은 아직 로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드를 관찰해 왔다.

그리드가 철부지였던 시절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드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그는 지금의 그리드가 성장의 끝에 도달한 상태로 보았다.

-저를 배려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의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재차 질문하는 카심에게 그리드가 답한다.

“예상과 달리 제멋대로인 사람은 아니었어.”

무려 대륙의 주인이다. 뜻대로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니만큼 보다 난폭하고, 흉포하고, 이기적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리드가 직접 만난 황제는 보다 신중했고, 존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권력을 갓 거머쥐기 시작했을 무렵의 그리드보다 지금의 황제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의외로 친구가 많을 것 같더군.”

-…….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쥬앙데르크라는 개인의 모습이야.”

그리드는 알고 있다.

“황제로서의 그는 당신과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흉포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거다.”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제국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인명을 해치고 정복해 온 황제가 아닌가?

“결국 싸우게 될 거야. 황제는 카심 당신에게 영원히 증오의 대상으로 남을 거다. 이제 와서 걱정할 필요 없어. 그저 복수만을 꿈꿔.”

카심의 원동력은 제국에의 복수다. 복수를 꿈꾸면 꿈꿀수록 그는 발전한다. 그리고 그리드는 당연히 카심의 발전을 원했다.

“오늘 내가 본 사람 중에 다섯 기둥은 없었어. 칠공작과 기사들뿐이었다. 하지만 난 그들을 보고 다섯 기둥이라고 착각했었지.”

그만큼 모두가 강했다는 뜻이다. 다섯 기둥은 얼마나 더 강할지 상상도 안 된다.

일전에 만났던 카일만 해도 브라함과 무무드의 협공(?) 덕분에 쉽게 해치울 수 있었지, 브라함이 없었다면 그리드와 아레스 군단 모두 위험했을 것이다.

“강해지자, 카심.”

-예, 전하.

그리드는 이미 지존이 되겠다는 꿈을 이뤘다.

그리드의 바람대로 이제는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고, 도리어 선망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에서의 이야기다.

Satisfy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그리드는 여전히 약자였고, 그리드는 그들로부터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힘이, 더 강한 힘이 필요했다.

달그락, 달그락.

그리드를 태운 마차가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을 천천히 이동한다. 뒤를 따르는 병사들과 수송대원들의 체력을 안배한 속도였고, 이 또한 그리드의 지시였다.

템빨왕 그리드는 현군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가소로운 일이죠.”

깊은 숲속.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그리드의 마차를 눈에 담은 베라딘이 말한다.

“인간의 선택과 행동 저변에는 반드시 보상 욕구가 깔려 있죠. 인간은 무엇인가를 바라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는 겁니다. 성욕을 예로 들어 봅시다. 사람이 성욕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번식과 쾌락이라는 보상을 원하기 때문이죠. 보상욕이야말로 최상위 욕구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늘 무표정하던 베라딘의 얼굴에 조소가 실린다.

“그리고 그리드를 지배하는 보상 욕구는 ‘존중받는 것’이죠. 평생을 남에게 멸시당했던 인물답게 그는 타인의 평가에 극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를 꿈꾸죠. 지금 병사들을 배려한답시고 마차를 천천히 운행하는 저 가식적인 행위 또한 병사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지, 그리드의 마음씨가 정말로 고운 게 아니에요.”

그리드는 가식덩어리다.

허세로 똘똘 뭉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복수에 집착할 거라고 보았다.

당한 것을 몇 배로 갚아 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무시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워서 복수심을 불태울 거라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드는 베라딘의 예상을 뛰어넘는 복수극을 진행 중이다.

“흔하디흔한 인간.”

점차 가까워지는 그리드의 마차를 바라보는 베라딘의 얼굴에 별 감흥이 없다.

그리드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 그리드에게 흥미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아그너스는?

아그너스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보상 욕구는 ‘상실’이다. 무척 특이한 케이스였다.

베라딘은 그를 보다 더 오랫동안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곁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이번에 틀어진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 회복 수단은.”

철컥!

<망령의 목걸이>를 손에 쥔 베라딘이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드, 당신이 쥐고 있지요. 죽으세요. 그리고 더 강한 복수심을 불태우세요.”

그 원한을 고스란히 아그너스에게 향하고, 아그너스의 광기를 자극하라. 그리하면 아그너스는 다시 망각의 단계에 접어들 것이고, 나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소환, 데스나이트.”

쿠워어어어어…….

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독귀 카일로가 베라딘의 명령에 호응, 땅속으로부터 몸을 일으킨다.

이미 수백 구의 스켈레톤 나이트와 스켈레톤 메이지가 그리드의 마차를 포위하고 있었다.

‘옳지 않아.’

한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의 투명한 눈동자가 연신 흔들린다.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