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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33화 (628/1,794)

템빨 37권 - 18화

12년 전, 배신자 피아로와 그의 충복들을 색출하여 단죄한 아스모펠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불렸다.

타락한 영웅.

그래, 피아로의 배신 이후 아스모펠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한때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피아로와 전우들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였다는 사실에 큰 회의감을 느꼈는지, 그는 몇 년이 지나도록 저택에 틀어박힌 채 약과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건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죽음을 부르는 의식.

“....그런 당신께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죠.”

비록 폐인이 되었다지만, 천하의 화검이 무려 납치를 당해버렸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스모펠의 무위를 잘 알고 있는 메르세데스는 납득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추측을 했다.

“자작극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빛의 기둥과 함께 나타난 옛 영웅, 아스모펠.

찬란했던 시절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메르세데스가 쓴 미소를 짓는다.

“지독한 삶을 외면하고 싶었던 당신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우리들 적기사단의 보호를 뿌리치고 제 발로 제국을 떠나신 거라고 생각했죠.”

하여, 슬펐다.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죽는 기사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와 함께 자신의 우상이 되어주었던 기사가, 영웅이, 피아로와 마찬가지로 수치와 타락의 상징으로 변질되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그래요. 저는 당신께서 이미 죽으신 줄 알았습니다.”

한데.

“한데 살아계셨군요. 배신자 피아로의 곁에 말이죠.”

꽈악....!

두 자루 검을 쥐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양쪽 손에 큰 힘이 실린다. 급기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에서 흥건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영웅이었던 당신께서 친우와 함께하고자 조국과 폐하를 배신한 건가요?”

“.....”

오해를 해소하라고 부른 열쇠가 도리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그리드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아스모펠이 입을 여는 순간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그리드의 부름에 호응한 이후.

잠자코 선 채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아스모펠이 드디어 입을 연다.

“우선 하나. 적기사단은 나를 보호했던 게 아니라 감시했던 거다. 네 번째 기사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겠지?”

네 번째 기사는 일반적인 적기사들과 다르다. 황제가, 혹은 단장이 임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계승되는 자리다.

“오로지 적기사단을 수호하기 위해서 존재해왔던 그 수호의 기사가 당대에 이르러서 타락했다. 내가 추측하기로 당대의 네 번째 기사는 야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마리의 최측근이었던 흑마법사 디브.... 사실은 야탄의 일곱 번째 종이었던 그자가 네 번째 기사의 심복들을 마치 수족처럼 부렸었지. 내 저택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감시했던 적기사들이 바로 네 번째 기사의 심복들이었고 말이야.”

“....?”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황비 마리의 최측근이 야탄의 종이었다는 주장부터가 문제다. 말인 즉, 황비 마리가 그 사악한 야탄교와 관계된 인물이라는 뜻 아닌가?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적기사들은 아스모펠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했다.

“황비는 아무나 될 수 없어요. 황실은 출신성분을 철저히 조사한 후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여성만을 비로 맞이해왔습니다. 한데 마리 황비께서 야탄교와 관련이 있다고요?”

“처음에는 깨끗한 여자였겠지. 하지만 아들을 황위에 앉히겠다는 야심을 품은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었다. 대악마를 섬기는 사악한 세력과 거리낌 없이 손을 잡게 될 정도로 말이야. 인간은 유혹에 약한 생물이거든.”

아스모펠의 표정이 쓰리다.

“나 또한 유혹에 약한 생물이었고.”

“....?”

“나는 마리의 미인계에 넘어갔다. 그녀와 정을 나눴지.”

“뭐, 뭐라고요...?”

<야탄의 정수>에 지배당해 정신력이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세뇌를 당했었다는 핑계 따위, 아스모펠은 읊지 않는다.

피아로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마음에 빈틈이 생겼고, 그로 인해서 야탄의 정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거니까.

애초에 다 자신의 잘못이다.

“맞다. 나는 이미 진즉부터 기사의 자격을 상실했어. 내가 바로 조국과 황제를 배신한 원흉이다. 피아로는 순전히 피해자일 뿐이다.”

자신의 죄를 상기할 때마다 심장이 산산조각 나고 영혼이 뿌리 채 뽑혀나가는 고통에 휩싸이는 아스모펠이었다. 피아로와 조국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나락의 구렁텅이처럼 끝없이 깊었다.

“바로 내가.... 이 내가 황제를, 조국을, 그리고 피아로와 적기사단을 배반했다.”

꾸욱.

내게는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다.

생각하며 이를 악 무는 아스모펠의 눈이 붉게 충혈된다.

“나는 오로지 내 죄를 덮기 위해서....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친우와 전우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들의 가족과 연인을 살해했다.”

단죄라는 명목 아래 저지른 끔찍한 죄악이다.

진실을 고하는 아스모펠의 몸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들바들 떨린다.

하지만 아스모펠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숨겨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지금의 아스모펠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기에.

“그만하시게.”

이미 아스모펠을 용서했던 피아로가 말려보지만 부질없다.

아스모펠은 멈추지 않았다. 떨리는 음성으로 읊는 그의 고해가 넋을 잃고 선 메르세데스와 적기사단의 귓전에 쉬지 않고 맴돌았다.

“제국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이 한때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였던 그대들의 영웅은 건재하다. 부디 그에 대한 오해를 풀고 모든 비난과 증오를 내게 쏟아다오.”

“.....”

지금 이 사람이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적기사들의 인지 능력이 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혜안을 지닌 메르세데스는 깨닫고 있었다.

아스모펠이 진실만을 입에 담고 있음을 말이다.

결국.

주르륵.

메르세데스의 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금의 아스모펠이 ‘자신을 위한 진실’만큼은 감추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 채고 있었다.

만약, 아스모펠이 스스로 고한 대로 희대의 악인이었다면 피아로가 그를 용서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지난 12년 동안, 한 명의 영웅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았고, 또 다른 한 명의 영웅은 죄악감에 지배당한 채 죽지 못해 살았는가.

결국 모든 원흉은 황비 마리와 야탄교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당신께서 우리 영웅들의 영웅이 되어주셨군요.’

그리드를 바라보는 메르세데스의 눈빛에 감사와 회한이 서린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그녀는 이제 의무를 느끼고 있었다. 다른 적기사들 또한 아스모펠의 말을 믿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납득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요. 우리는 이대로 제국으로 돌아가서 12년 전의 사건을 재조사하고 당신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게 되면....”

잠시 말을 멈춘 메르세데스가 적기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적기사들 모두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메르세데스의 혜안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도와서 황비 마리의 죄목을 밝히고 그녀를 처단하도록 하겠어요.”

이는 제국을, 황제를, 그리고 두 영웅들을 위한 의무다.

‘우선 리미트 단장님을 조사해보는 게 먼저야.’

그 또한 황비와 한 패였을까? 아니면 네 번째 기사의 독단이었을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마음이 급해진 메르세데스가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살짝 목례했다.

“오늘 당신들은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다시 재회했을 때, 나의 칼끝이 당신들에게 향하지 않기를 빌겠어요.”

마음 같아서야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그녀였다.

지난 세월 동안, 당신들을 위해서 조금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나를 원망해 달라고, 메르세데스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다른 적기사들 모두가 진실을 납득하기 전까진 그녀 또한 태도를 바꿀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리드에게만 깊숙이 고개 숙일 뿐이었다.

“템빨왕 전하, 오늘 저희가 범한 무례를 부디 잠시만이라도 묵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죗값은 훗날,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모든 것이라.... 좋아. 기대하지.”

빙그레 웃는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적기사단의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와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이와 같은 알림창 때문이다.

네임드 NPC와의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그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믿고 있는 게 분명해. 앞으로 진실을 밝히는데 크게 공헌해주겠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메르세데스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상대는 무려 제국의 황비다. 결코 녹록치 않은 상대에게 메르세데스가 역으로 당해서 제2의 피아로처럼 죄인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리드 입장에서는 그것도 좋았다.

메르세데스를 제국으로부터 뺏어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죠.”

적기사들을 통솔한 메르세데스가 저 멀리, 자신의 말을 지키고 있는 종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이름은 스카이.

플레이어다.

투구를 눌러쓰고 있는 탓에 그리드는 그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큭큭큭.... 이거 대박이구만.’

그리드 덕분에 적기사단의 숨겨진 에피소드를 엿볼 수 있었던 스카이는 흥분 상태였다. 그는 메르세데스를 자신의 노예로 삼겠다는 원대한 포부에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적절한 때에 황비에게 접근하면 되겠어. 그리드, 고맙다. 크크큭!’

Satisfy는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세계 자체다. 정치와 배신이 난무했고, 음흉한 놈은 한둘이 아니다.

20억 플레이어와 수십, 수백만 개의 집단이 품은 목표가 상충하는 이 거대한 세계에서 오로지 한 명의 사람만이 승승장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카이는 이처럼 생각했고, 그것이 세계의 이치가 맞기는 했으나.

“카심.”

-예.

“조금 전에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의 대화를 엿들은 목격자를 쫓아가서 죽여.”

-첫 번째 기사의 종자 말씀이십니까....? 발각 되었다가는 첫 번째 기사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상관없어. 도리어 메르세데스는 납득할 거다. 최악의 경우 암살은 저지할지 몰라도, 눈치껏 종자를 파면할 거야. 앞으로는 그녀도 조심해야하는 입장이니까 말이지.”

-잘 알겠습니다.

지금의 그리드에게는 이치를 거스르는 힘이 있었다. 전설의 범주마저도 초월하기 시작한 그의 비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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