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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36화 (631/1,794)

템빨 37권 - 21화

화르륵!

환국의 국목(國木).

영겁의 나무라고도 불렸던 <백린목>이 한낱 장작이 되어 타오른다. 압도적인 불꽃의 기세가 대장간을 순식간에 열기로 물들였다.

‘전하께서 작업을 시작하셨다!’

저마다 일에 집중하고 있던 대장장이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집중된다.

대장장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불꽃을, 열기를, 온도를 이토록 완전하게 지배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 칸이 죽은 이후로는 이 세상에 그리드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칸 대장님께서도 말년에는.’

‘전하처럼 화려하게 불꽃을 다루셨는데....’

회상하는 대장장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때.

“크라우젤, 네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어.”

망치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은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 네가 특정한 아이템을 원하고 있을 경우 그 아이템의 도안을 내게 넘기는 거야. 그럼 나는 그 도안을 습득해서 도안 그대로 네게 아이템을 제작해줄 거다. 물론 알고 있겠지? 내가 제작하는 아이템의 성능은 도안에 표기된 것보다 높아.”

그리드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도안을 공짜로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이득이다.

“둘째, 아이템 제작을 순전히 내게 일임하는 방법도 있어. 이 경우, 나는 내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 도안을 토대로 아이템을 제작하게 된다.”

“그건 굉장히 멋진 일이군.”

“그렇지. 이 경우 너는 무려 전설의 대장장이가 직접 창조한 아이템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당연히 나는 네게 일임을....”

크라우젤은 두 번째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드가 직접 사용하는 도검류 무기들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에게 세 번째 선택지를 추천했다.

“아니, 이야기를 마저 들어봐.”

크라우젤의 입을 가로막은 그리드가 칸을 회상했다.

자신이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늘 곁을 지켜주었던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던가?

특히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할 때, 칸이 내놓았던 의견들은 하나 같이 뼈가 되고 살이 됐었다.

그리드가 존경했던 최고의 대장장이는 그리드 이상의 지식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리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전혀 새롭게 창조하는 아이템에 어떤 재질을 사용하면 좋을지, 어떤 특징을 담으면 좋을지 등등을 함께 생각해주었었다.

지금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바라는 역할이 바로 칸의 역할이었다.

크라우젤이 지닌 ‘검성의 안목’을 그리드는 원했다. 최강의 검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크라우젤, 네가 생각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검의 형태가 뭐지?”

“....?”

“말해봐. 너의 이상을 나의 기술로 실현시킬 테니까.”

“....그게 바로 세 번째 방법인가?”

“그래.”

두근!

그리드의 확고한 눈빛과 시선을 마주하는 크라우젤의 심장이 뛴다.

그의 뇌리로 <검술 창조> 스킬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검술을 창조할 수 있는 검성 고유의 스킬이 있듯이, 대장장이인 그리드에게는 <아이템 창조> 스킬이 있는 것이다.

꾸욱.

깨달으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자 주먹을 말아 쥔 크라우젤이 질문했다.

“템빨왕의 역사에.... 후대에 전설로 숭배 될 너의 역사 일부에 나의 이름이 함께 새겨지는 거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무척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지존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던 크라우젤은 알고 있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위업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그 위업에 타인이 함부로 발을 걸치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드의 대답은 빨랐다.

“괜찮냐고? 그게 질문이야?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영광이지.”

그리드는 떠올린다. 벨리알 레이드 당시에 피아로의 기술을 계승했던 크라우젤의 모습을.

그건 크라우젤이 피아로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경의였다. 지금, 그리드 또한 크라우젤에게 경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최고의 검사와 함께 최고의 검을 만들다. 이처럼 멋진 전설이 또 있을까?”

“....”

“둘이 함께 만들자. 최강의 검을. 최고의 전설을.”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싸웠으나 종국에는 친아들에게 목을 베였던 무패왕 마드라.

세상을 구원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친구를 배신하고, 악마와 계약하여 전대 전설들을 욕보였던 파그마.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동족을 멸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인간으로 전락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였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배신당한 브라함.

그리드가 알고 있는 전대의 전설들은 하나 같이 슬프고 욕되었다.

그리드는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크라우젤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 없는 영광이다.”

“좋아. 그럼 곧바로 시작하자.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아이템 제작법을 3개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창조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법 횟수 9/24

*이 스킬을 사용해서 창조한 아이템을 생산 시, 아이템에 창조자의 이름이 자동으로 새겨집니다.

지잉-

눈앞에 떠오르는 공백의 설계도.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검성의 지식이 말하는 이상적인 검의 규격은....”

이 설계도의 거대한 여백을.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는 역시 중검이다. 폭과 길이, 무게 면에서 가장 사용하기 편하고 이에 따라서 효용성이 높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봤을 때 사용하기에 가장 불편함이 적어.”

“그래? 나는 여태까지 장검인 줄 알았어. 실제로 열망의 무아검도 장검이고. 검은 불꽃 토하는 검 말이야.”

“중검을 사용해본 적은 있나?”

“멋이 없어서 안 써봤지. 난 여태까지 대부분 대검 아니면 장검을....”

“....뭐, 앞서 말했듯이 이상적인 형태라는 건 개인마다 다른 거니까. 애초에 이상을 논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다. 과일을 깎을 때는 과도가 가장 좋고, 나무를 자를 때는 정글도가 가장 좋은 것처럼 용도에 따른 차이도 있고.”

검성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전설의 대장장이의 경험과 지식, 기술이 채워나간다.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그리고 전투에서는 중검이 좋다는 거지? 그 외에 특별한 특징은?”

“없다.”

“날의 모양에 특징을 줘서 다른 옵션이 추가되게끔 의도한다던가, 그런 아이디어 없어?”

“너의 그 실패작이라는 무기에 달린 상어 지느라미 같은 부분처럼?”

“응.”

“도라면 또 모를까, 검의 형태는 기본적인 게 좋다.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편이 도리어 나은 도와 다르게 양날을 지닌 검은 균형이 가장 중요하니까.”

“정답이야. 그래서 검의 단면이 마름모꼴을 하고 있는 거지.”

“단면?”

“날을 잘랐을 때 보이는 절단면. 검은 네 말대로 균형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단면의 사면이 완전 같은 마름모꼴이 선호되지. 반면 도는 육각이나 팔각이 선호되고.”

“그런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리고 넌 나에 대해서도 몰라.”

“....?”

“나는 전설의 대장장이야. 검날에 특수한 치장을 붙이더라도 균형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어. 내 기술이라면 가능해. 그러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날에 어떤 특징을 주면 유용할지.”

“그거 재밌군....”

웅성웅성.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곁으로 모여든 대장장이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운 얼굴의 흑발 사내가 우리의 왕과 함께 거침없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으니 놀라운 것이었다.

“저자는....?”

화이트를 비롯한 판게아 출신의 4대 대장장이가 가장 크게 놀랐다. 그들은 크라우젤이 판게아의 ‘작은 영웅’임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크라우젤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래, 대장장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의견을 그리드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왜지?’

과연 저자에게 칸의 빈자리를 대신해도 좋을 정도의 자격이 있는 걸까?

의문을 품는 대장장이들에게.

“저자는 검의 성인이요.”

“....?”

“뮐러 이후 최초의 검성이지.”

“....!!”

막내 대장장이 판미르가 흑발 사내의 진정한 정체를 알린다.

파장은 컸다.

거물 중의 거물을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보게 된 대장장이들이 경악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는 그들에게 콧대 높아진 판미르가 의견을 말한다.

“저 둘이 힘을 합쳐서 만들게 될 검은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명검이지 않을까?”

판미르의 의견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전설의 대장장이와 검성의 지식, 경험, 기술이 합쳐져서 탄생하게 될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컸다.

“그런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화이트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더니 묻는다.

“판미르, 오늘 쓸 장작은 다 해온 거요?”

“....전하께서 만드시는 검만 보고 내 후딱 다녀오리다.”

내 참, 서러워서.

입을 비쭉 내미는 판미르.

템빨국의 막내 대장장이인 그는 대장장이 랭킹 1위다.

***

장장 3시간.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의견을 조율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검의 형태가 드디어 가닥을 잡았다.

이제 남은 건 재질의 선택이었다.

“청룡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

크라우젤이 보유한 2개의 숨결을 확인한 그리드는 당연히 이처럼 생각했다.

“검에는 청룡의 숨결을 담을 거지? 그럼 뇌 속성과 궁합이 좋은 광물을 주재료로 삼아야겠네.”

“아니, 나는 내 검에 백호의 숨결이 담겼으면 좋겠다.”

“뭐?”

그리드가 당황했다.

“백호의 숨결은 땅 속성이잖아?”

땅 속성은 방어력과 연관이 높다. 단단한 느낌으로 방어력 상승 옵션이 붙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전격 속성은 속도와 위력이다. 대체적으로 높은 공격력 상승 옵션이 붙는다.

말인 즉, 무기에 부여하기에 적합한 숨결은 백호가 아니라 청룡이라는 뜻이다.

“근데 왜 무기에다가 백호의 숨결을 넣겠다는 거야? 갑옷도 만들 거라면서? 백호의 숨결은 갑옷에 넣는 게 맞잖아?”

“아니, 갑옷은 그간 모아왔던 아다만티움만으로 충분해. 청룡의 숨결은 부츠에 귀속시켜서 전반적인 속도 상승을 노릴 계획이고.”

“그래도 말이야. 무기에 백호의 숨결을 넣으면 압도적인 공격력을 기대하기 어렵잖아? 무기는 공격력 높은 게 장땡 아니야? 설계도를 봐. 이미 검의 형태만으로도 방어력 추가 옵션을 기대할 수 있는 상태야. 근데 굳이 여기서 더 방어력을 높이겠다고?”

“속도가 즉 위력으로 직결되듯이, 무게 또한 위력으로 직결된다. 크리스의 천톤 검이 단편적인 예지.”

“....아.”

그리드의 상식이 깨진다.

“땅 속성이 강하게 깃든 광물은 대체적으로 단단하고 그만큼 무겁지.... 그 무게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높은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나는 백호의 숨결을 잘만 이용하면 높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동시에 겸비하는 최상의 검이 완성될 거라고 믿는다.”

“그거 가능성 높은 해석이네.”

마법을 예로 들어서 생각해 봐도, 땅 속성 마법들의 위력이 딱히 약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돌로 깔아뭉개는 계열의 마법들은 무척 강력했다.

“땅 속성 옵션이 깃든 무기라....”

씨익!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크라우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신 또한 땅 속성 무기의 결과물이 궁금해졌다.

‘아이템 이름 짓기도 편할 거고.’

땅 속성이 강하게 깃든 검. 돌로 만든 검. 그러니까 돌검.

“좋아. 돌검의 마무리를 짓자.”

‘돌검?’

돌검은 또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크라우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템빨단, 템빨국, 템빨왕....

그리드의 작명 센스가 최악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잠깐, 그리드.”

“재질은 만년석으로 정한다. 때에 따라서 만년석을 블러드 스톤으로 대체할 수 있고.”

중검은 양산이 편하다. 만년석으로 만든 돌검은 템빨국 기사들에게 보급하고, 블러드스톤으로 만든 돌검은 그리드 본인과 템빨단원들이 사용하면 이상적일 터.

그래, 크라우젤에게 아이템 창조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던 시점부터 그리드는 템빨국의 전반적인 국력 향상을 노리고 있었다.

템빨국 기사들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병사들이 검성이 설계한 검을 사용한다고 생각해보라. 압도적인 위용일 것이다.

“아이템 이름은.”

“이봐, 그리....”

“돌검이다.”

“.....”

설마, 설마 했던 그리드의 작명 센스에 사색이 되는 크라우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한다. 그리드가 만드는 아이템에는 각종 수식어가 붙을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 앞으로 크라우젤이 사용하게 될 검의 이름은 단순한 <돌검>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백호의 숨결을 귀속할 경우 <백호의 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크라우젤은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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