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2화
따앙! 따앙! 따앙!!
화르륵!!
치이이익---
제련과 단련의 반복.
그리드의 대장일은 하루를 꼬박 지새우고 있었다.
하지만 2개의 백호의 숨결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불꽃과 망치질에 끝까지 저항하며 도리어 더 흉포해진다. 그리드의 망치에 얻어맞을 때마다 길게 뻗어 나가는 가시의 속도가 처음보다 배는 빨랐다.
따아아앙!
콰르르륵!!
[고귀한 백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백호의 숨결이 분노합니다!]
[8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844의 피해를 입었…….]
…….
…….
‘이거야 원, 주작은 양반이었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애쓰는 고슴도치 같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수십 개의 돌가시를 내뿜는 백호의 숨결에 베이고, 찔리는 그리드의 얼굴이 상처투성이다.
그는 고귀한 백호의 자존심이라는 문구가 무척 거슬렸다.
백호가 토해 낸 숨결조차도 자존심을 챙기는 실정이니, 백호 본인은 얼마나 콧대 높은 녀석일지 가늠하기 힘든 것이다.
‘언젠가 동대륙에서.’
따아앙! 땅!!
‘사신수들과 만날 일이 생겨도.’
콰륵!! 콰르르륵!!
‘백호랑은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아니, 아예 만날 일 없기를 바라야지.’
생각하면서, 단조질에 열중하는 그리드의 두 다리는 제자리에 붙어 있는 법이 없었다. 가시 세례를 조금이라도 회피하고자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였다.
그리드는 아직 자각하지 못한다.
크라우젤이 물약을 먹여 주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의도였나.’
크라우젤의 눈동자에 이채가 실리고 있었다.
‘그리드가 갓 핸드에 의지하지 않고 굳이 직접 맞섰던 이유……. 사물에 담겨 있는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이에 따른 패턴을 분석하는 연습을 하면서 본인의 회피력을 발전시키기 위함이었어.’
아이템 하나를 만들 때도 여기까지 생각하다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는 그리드의 열망. 그러니까 그리드의 노가다 정신이 크라우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노력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겠지.’
그리드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크라우젤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드가 갓 핸드를 꺼내지 않은 이유, 아이템 제작에 열중하느라 머리가 굳어서 생각지 못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의도한 것일까?
맞다. 의도한 거다.
그리드는 백호의 숨결이 저항하는 모습을 확인한 시점부터 이미 이를 단련의 기회로 삼았다. 갓 핸드를 꺼내서 쉽게 방어하기보다는 아이템 제작과 동시에 공격을 회피하는 연습. 즉, 사고의 확장과 컨트롤 숙달에 초점을 맞췄다.
처음부터 사서 고생하기를 자처한 셈이다.
크라우젤은 이를 간파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크라우젤도 한 가지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바로.
[<티라멧의 허리띠(유니크)>의 경험치가 0.01퍼센트 올랐습니다.]
아이템 숙련도 노가다다.
백호의 숨결의 등급이 높게 책정되기 때문인지, 백호의 숨결의 공격력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티라멧의 허리띠의 경험치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무려 천 대 이상을 맞아야 간신히 0.01퍼센트 오르는 수준이었지만 이게 어딘가?
‘단조질이 타격으로 분류됐으면 엘핀스톤 반지의 경험치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아쉽네.’
그렇다.
그리드는 아이템 제작 과정을 통해서 컨트롤 솜씨와 아이템 숙련도, 그리고 사고력 발달 3가지 모두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따앙! 따앙!
아이템 제작을 대충 할 리도 없다.
본말전도의 우를 범할 정도로 지금의 그리드는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그리드가 가장 우선시 두는 부분은 당연히 아이템 제작의 결과물이었고, 이에 따라서 백호의 숨결 단련에 최선을 다했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눈앞에 튀어 오르는 불똥의 개수를 정확히 셀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집중한 상태였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
콰르르륵!!
“큭……!”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제작 3일 차에 접어든 그리드가 정신적으로 크게 지치기 시작했다. 백호의 숨결의 기세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얼마나 고집이 센 거야?’
동급의 다른 제작 재료들과 비교해도 극성이다.
벌써 수십 번 이상 단련과 제련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숨결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귀한 백호의 자존심’이라는 문구를 떠올린 그리드는 작업에 진척이 없는 이유가 백호의 숨결의 성격에 있다고 보았으나.
‘아니, 가만.’
작업 3일째 밤을 맞이했을 때야 비로소 깨닫는다.
‘이건 성격보다 속성의 문제가 아닐까?’
백호의 숨결은 땅 속성이다.
그리고 땅은 불에 강하다.
이 기본 상성을 떠올린 순간, 그리드는 이번 작업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백호의 숨결은 땅의 기운 그 자체……. 기존의 방식으로는 제련할 수 없는 재료다.’
골치가 아파진다.
망치질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를 보면서, 3일 내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크라우젤 또한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지?”
“제련이 안 돼.”
“……?”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채 졸고 있던 판미르가 퍼뜩 놀란다.
“제련이 안 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지난 3일 동안, 판미르는 그리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설의 대장장이의 대장일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봤을 때 그리드의 작업에 잘못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정성을 다하는 그리드의 솜씨는 그저 최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숨결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제련 자체가 안 되고 있었던 거라니?
“그럼 아이템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잖아?”
신화급 제작 재료를 다뤄 본 경험이 없는 판미르는 혼란이 컸다. 이쪽으로는 문외한인지라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는 크라우젤과 다르게, 그는 계속해서 궁리해 보며 떠들었다.
“혹시 불의 온도가 부족한 거 아닐까? 땅 속성 제작 재료이니만큼 녹는점이 굉장히 높은 거 아니야?”
“아뇨. 녹는점에는 충분히 도달했습니다.”
광물은 순물질과 혼합물질로 분류된다.
간단한 예로, 철이 순물질이고 강철이 혼합물질이다.
철을 가열하면 녹는점인 1,530도까지 온도가 계속해서 상승하지만, 철이 다 녹을 때까지 그 온도가 유지된다.
반면 혼합물질인 강철은 온도가 유지되지 않는다. 온도가 녹는점까지 도달한 이후에도 100도가량 더 상승한다.
그리드는 이와 같은 온도의 변화를 토대로 순물질과 혼합물질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호의 숨결은 순물질입니다. 아무런 이물질이 첨가되지 않았어요. 용광로의 온도가 7,230도까지 오른 이후부터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있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래, 온도가 부족한 건 아니다. 시스템은 백호의 숨결의 녹는점을 7,230도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용광로에서 꺼낸 직후의 백호의 숨결은 찰흙처럼 강도가 낮아졌다.
“그런데 그 상태로 담금질과 단조질을 반복해도 모양이 변하질 않는다, 이 말인가?”
“네. 그래서 눈치채는 게 늦었습니다. 재질이 워낙에 튼튼해서 제련과 단련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서서히 모양이 변하겠거니,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다.
“제련 자체가 잘못되고 있었습니다. 백호의 숨결을 단련하려면 완전히 녹여 버려야 할 필요가 있어요.”
불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판단한 그리드가 크라우젤과 판미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땅 속성은 무슨 속성에 약하지?”
“그야 당연히 물과 얼음이지.”
“세부 분류로 들어갈 경우에는 식물 계열 스킬에도 취약하더군.”
“적셔서 변형시키거나, 얼려서 깨뜨리거나,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거나… 인가.”
그리드는 추측한다.
백호의 숨결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침으로써 백호의 숨결을 약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지만 대장일은 불과 관련이 깊다. 물과 얼음, 식물 등의 속성은 그리드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럼 결론은, 백호의 숨결은 대장장이가 제련하는 게 불가능한 재료라는 뜻인가?’
엄밀히 따지면 대장장이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타인과의 협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드는 브라함의 부재를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브라함이 있었다면…….’
“흥! 간단한 일이군. 이 몸의 마법으로 저 같잖은 구슬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 주마. 아니면 뭐, 얼음으로 만들어서 박살을 내 줄까?”
이처럼 말했을 것 같다.
얼굴처럼 멋진 브라함의 미성이 귓전에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
떠올리며 쓴 미소를 흘리던 그리드가 상기했다.
자신의 가장 큰 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가 즉시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우리 길드원 중에 수 속성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 있어?
-특화까지는 모르겠지만, 강력한 수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분 계시긴 합니다.
라우엘의 눈은 높다.
본인부터가 지존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일뿐더러, 늘 그리드를 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강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드의 기대감이 고조됐다.
-그게 누구지?
-유페미나 님이요.
-아!
복제술사 유페미나.
맞다. 그녀라면 최상급 수 속성 마법을 복제해서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드에게 해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최상급 마법을 복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일단 술자를 찾아야 하고, 그가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한다.
유페미나가 최상급 수 속성 마법을 복제해 오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하지만 그리드는 지금 당장 백호의 숨결을 제련해야 하는 입장이다.
실망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유페미나 님은 무무드의 마법을 습득하셨잖습니까? 그녀가 습득한 마법 중에 무무드식 수 속성 마법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맞아! 그랬구나!!
그리드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역대 전설 중에서도 최강의 반열에 올랐던 브라함.
염룡 트라우카와 일대일로 싸우고도 ‘생존’했던 그 사상 최강의 마법사가 두려워했던 재능의 결정체가 바로 무무드였다.
무무드식 마법이 브라함의 강화 마법과 최소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건 당연하다.
흥분한 그리드가 곧바로 유페미나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유페미나! 지금 당장 대장간으로 와 줄 수 있어?
-당연해요. 누구의 부름인데요.
이유조차 묻지 않는다.
유페미나 또한 그리드의 대표적인 충신이었다.
무무드식 마법 덕분에 복제술사의 한계를 벗고 사냥에 열중하고 있던 그녀가 곧바로 라인하르트에 귀환했다.
***
“이걸 말이죠?”
백색의 구슬.
진주와는 다르게 그저 하얗다. 우윳빛깔이다. 하지만 표면이 반들거리고 영험한 기운이 있는 것이 무척 신비로웠다.
“그래, 맞아. 수 속성 마법으로 이걸 때려 줘. 깨지기 직전까지 계속.”
“네, 해 볼게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유페미나가 작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순간.
‘뭐지?’
그리드와 크라우젤 두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면 이따금씩 발생하는 푸른 무형의 기운. 소위 마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대장간 곳곳에 생성되더니 유페미나의 손끝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일반적인 연출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보통의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때는 본인의 마나를 ‘방출’하는 연출이 되는 반면에, 유페미나는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는 듯한 연출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이내.
퍼어어어엉-!!
유페미나가 손끝에 모인 마나를 일자로 쏘았고, 이는 물줄기가 되어서 백호의 숨결을 강타했다.
그러자.
“헉!”
“…강하군.”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그리드가 3일 밤낮을 망치로 후려쳐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백호의 숨결이 단 일격에 찌그러졌기 때문이다.
펑! 퍼펑! 퍼퍼펑!!
유페미나는 계속, 계속해서 마법을 쏘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만하라고 말하기 전까지 대장간 한쪽에 고정해 놓은 백호의 숨결 2개를 연속적으로 가격했다.
그녀가 쏘아 내는 물줄기는 마치 파도처럼 흉포해서, 성난 맹수들조차도 일거에 집어삼킬 기세였다.
‘마법이 주인 닮았어…….’
예전부터 유페미나를 두려워했던 그리드가 기세에 눌려서 벌벌 떨다가 소리쳤다.
“그만! 이제 충분한 것 같아!”
“네.”
유페미나가 마법의 발현을 멈췄고, 그리드는 곧바로 백호의 숨결을 챙겼다. 백호의 숨결은 깨지기 직전의 유리구슬처럼 균열이 잔뜩 발생해 있었다.
‘좋아!’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백린목을 장작으로 삼아서 7,230도까지 온도를 높여 놓은 용광로에 백호의 구슬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타닥! 탁!!
불길 속 백호의 숨결의 균열이 커지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완전히 쇳물이 되어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제련이 끝난 것이다.
새로운 제작 아이템에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경험뿐만 아니라 유페미나의 마법까지 보태지는 순간이었다.
그리드는 직감한다.
최강의 검이 탄생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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