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45화 (640/1,794)

템빨 38권 - 9화

“후.”

황도 타이탄을 벗어난 그리드는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투명 후드 집업의 은신 기능을 적절히 활용, 마력 탐지기와 병사들의 시선을 동시에 회피하면서 느낀 쾌감이 여운으로 남는다.

컨트롤 솜씨가 상승했다? 아니, 그보다는 눈치가 좀 빨라진 감각이다.

“대악마라…….”

시야에 극히 일부만이 담기는 타이탄의 거대한 외성벽.

그 위로 솟은 하늘이 완전한 회색이다. 짙게 드리운 먹구름이 잠시 후 비와 천둥이 쏟아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떤 대악마지?’

헬가오, 푸르푸, 드라시온, 모락스, 아스타로트.

역사상 최강의 전설이었던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당한 대악마 목록이다.

규라탄은 필시 그중 하나였다.

‘헬가오는 아니고.’

불특정한 주기로 하급 악마의 육신을 빌려 강림하는 지옥 불의 주인 헬가오.

놈의 출몰 지점은 제국 황도가 아니라 전 템빨국령이었던 코크로 섬이다.

‘드라시온도 아니야.’

과거 그리드가 봉인을 풀어 준 크라우젤의 백아도 정보에 따르면, 드라시온은 이미 크라우젤이 레이드한 존재로 추측할 수 있었다.

놈의 출몰 지점이 제국 한복판이었다면, 크라우젤이 놈을 레이드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그럼 당연히 푸르푸도 아니겠지.’

아그너스가 사용했던 푸르푸의 힘을 떠올려 본 그리드는 규라탄의 정체를 모락스, 혹은 아스타로트로 축소했다.

둘 중 아스타로트는 ‘우레석’과 관련되기 때문에 번개의 힘을 다룬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모락스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다.

‘메르세데스가 무사해야 할 텐데.’

그녀의 강함이야 잘 알고 있다. 순수한 무력으로만 놓고 봤을 때 쉽게 당할 가능성은 적었다. 약화된 대악마는 완전한 대악마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규라탄이라는 놈이 엄청 교활한 것 같단 말이지.’

놈이 지껄였던 대사들을 떠올려 보면서, 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제국 내에서의 일이다.

메르세데스가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미련을 접은 그리드가 타이탄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템빨왕 전하.”

개나리색의 촌스러운 로브에 달려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 한눈에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그리드에게 다가왔다.

높은 통찰력 스탯 덕분에 그의 기척을 미리부터 느끼고 있던 그리드가 경계했다.

“나를 알아? 누구지?”

상대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이름의 색상은 NPC를 뜻하고 있었다.

“저는 영원의 탑 소속의 마법사, 레이지라고 합니다. 탑의 주인 골드히트 님께서 전하의 방문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부디 전하께서 초대에 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원의 탑?’

그리드는 브라함에게 전수받은 매직 미사일과 마력 탐지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지력을 높일 경우 파이어볼 등의 상위 마법을 습득할 수 있는 잠재력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다. 마법사의 지식이 전무한 그에게는 영원의 탑이라는 장소가 생소했다.

영원의 탑이 뭔데? 라고, 반사적으로 반문하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낯선 이에게 지식의 부재를 노출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라우엘이었다.

-라우엘.

-네, 전하.

귓속말을 보내는 즉시 답변이 날아왔다. 제국에 홀로 잠입한 그리드를 어지간히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영원의 탑이 뭐야?

-사하란 제국 소속의 마탑입니다. 태양의 탑과 수위를 다투는 마탑으로, 제국 황제도 영원의 탑을 의지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마탑의 주인 골드히트는 대륙 10대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인물이고요.

‘엄청난 곳이네?’

깜짝 놀란 그리드가 의문을 표출했다.

-근데 왜 그곳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 걸까?

-네? 혹시 제국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발각당하셨어요? 지금 위험하신 상황입니까?

-아니야. 조용하게 일 처리 하고 타이탄에서 나오니까, 마법사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 정체를 알고 초대하더라고. 뭐야? 얘들 말만 초대한다는 거고, 사실은 나 체포하러 온 거야?

-초대… 아니, 아닐 겁니다.

라우엘의 목소리가 한껏 격앙됐다.

-영원의 탑 마법사들이 제국의 병력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시 상황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통상적인 상태의 영원의 탑은 속세로부터 벗어나 활동하는 기관이므로 제국의 정치 상황에 굳이 연관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순수한 초대가 맞다?

-네. 초대에 응하도록 하세요. 영원의 탑은 히든 퀘스트를 주는 장소로 유명합니다. 영원의 탑에 초대받고 싶어서 줄 선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에요.

‘이런.’

라우엘이 흥분하는 이유가 있었다.

덩달아 들뜬 그리드가 레이지의 초대에 곧장 응하려다가 멈췄다. 생각해 보니 괘씸한 부분이 있어서였다.

-근데 말이야. 골드히트라는 마법사, 내가 왕이라는 걸 알고도 직접 와서 초대하지 않고 부하를 보냈는데? 본인이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 아니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정황상 골드히트라는 인물은 템빨국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이를 간과할 수 없었고 말이다.

라우엘이 설명했다.

-예절을 논할 상대가 아닙니다. 영원의 탑과 태양의 탑의 주인들은 마법사들의 왕이죠. 심지어 골드히트는 올해 나이가 120세도 넘었을 겁니다. 한 세기 이상을 최강의 마법사로 군림해 왔죠. 황제 쥬앙데르크조차도 그를 만나고 싶을 때면 직접 영원의 탑을 찾는다고 할 정도니 전하께서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국 황제가 직접 움직이게 만들 정도의 거물이라고?’

그리드의 기대감이 점차 고조되어 갔다.

안 그래도 히든 퀘스트 주기로 유명하다는 마탑의 거물이 자신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이유가 어디 평범하겠는가?

‘엄청난 히든 퀘스트라도 얻게 되는 건가?’

결국.

“알았다.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그리드가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 레이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영원의 탑 80층.

황도 타이탄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이 솟은 그 탑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단 하나다.

골드히트.

10대 마법사 중에서도 독보적인 강함을 뽐내는 마법왕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그가 권력을 탐하는 인물이었다면 지금쯤 마법제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사하란 제국과 비견되는 거대한 마법 국가를 건설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골드히트는 엄청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진즉부터 속세를 떠난 탓에 Satisfy의 현재 세계관에는 큰 영향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고레벨 마법사가 아닌 이상, 보통의 플레이어는 골드히트라는 이름 자체를 접할 일이 없다.

“나의 스승 릴리스는 브라함의 강화 마법을 온전히 전수받지 못했다.”

브라함의 네 번째 제자였던 그녀는 천재였다. 대륙 어디를 뒤져 봐도 그녀보다 뛰어난 재능의 마법사는 없을 거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이야기였다.

브라함의 재능 앞에서 그녀의 재능은 한낱 티끌이었고, 그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했다.

골드히트는 자신이 하필 그녀의 제자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녀 탓에 강화 마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건만, 정작 중요한 마법의 이론은 전수받지 못하였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아주 조금.

정말 티끌만큼이라도 강화 마법의 이론을 엿볼 수 있다면, 자신의 재능으로 이치를 깨우치고 전설에 등극할 수도 있었으리라.

이처럼 현실을 원망하며 말년을 보내온 골드히트에게 있어서 그리드의 출현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가 브라함의 영혼과 동화되어 강화 마법을 습득했다는 정황을 포착하였을 당시 골드히트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기회가 왔다.”

투명한 수정구에 담기는 그리드의 모습이 골드히트를 미소 짓게 만든다.

“마력 탐지.”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마스터 레벨의 마력 탐지가 영원의 탑 전부를 감싼다.

동시에, 골드히트의 온 신경이 그리드의 마나를 느끼는 것에 집중되었다.

“자, 어서 보여 주시게. 브라함의 강화 마법을. 요호호호…….”

***

‘우레석?’

레이지의 안내를 받아 영원의 탑에 도착한 그리드의 시선을 끄는 것은 탑 꼭대기에 있는 초대형 돌이었다.

거대한 벼락을 담고 있는 투명한 돌.

마치 우레석의 확대판 같은 그것이 탑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네. 애초에 저렇게 큰 우레석은 어디서 난 거야?’

의문을 품고 있노라니 레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층 이상부터 20층까지는 혼자 올라가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탑의 손님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시험의 장이온데, 이는 탑의 역사와 함께한 절차이므로 전하께서 혹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껏 손님으로 초대해 놓고 테스트를 한다고?

그리드는 다소 불쾌했지만 탑의 정통이라 하니 뭐라고 따지기도 어려웠다.

사실은 눈치채기도 했다.

‘그 테스트라는 것이 퀘스트겠군.’

기대감이 더욱더 상승한다.

레이지의 안내를 따라서 탑의 10층까지 오른 그리드가 몸을 풀었다.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 레이지가 물러났다.

“무운을 빕니다.”

동시에.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영원의 탑>

★히든 퀘스트★

영원의 탑은 최대의 역사를 간직한 마탑입니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정수가 오른 이곳을 한 층 오를 때마다 당신의 머리가 맑아질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관문을 돌파하여 탑을 오를 것. 현재 공략 가능한 층수는 20층까지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탑을 1층 오를 때마다 지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퀘스트 실패 시:10층으로 되돌아갑니다.

“대박!!”

그리드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탑을 하나 오를 때마다 스탯을 무려 2개씩이나 영구적으로 올려 준다는 것이다.

보상이 상상초월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지력이야.’

만약 그리드가 평범한 대장장이였다면 하등 쓸모없는 보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였고, 브라함의 제자(?)였다.

마나 소모율이 극심한 스킬을 대거 보유했을뿐더러 브라함의 강화 마법을 습득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그에겐 지력 스탯이 소중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근력과 체력인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레벨 업 시 획득하는 스탯 포인트를 지력에 투자하기에는 다소 난감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지력 스탯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20층까지 오르면 지력 20개가 오른다는 거지?’

흥분한 그리드가 굳게 닫혀 있는 10층의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원형의 투기장이었다.

겉에서 본 것과 달리 엄청 넓었다. 템빨국의 병사 수백 명이 한꺼번에 훈련하는 연병장보다 더 거대했다.

[<영원의 탑의 가디언>이 출현합니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

가디언의 정체는 고렘이었다.

탑 전체를 흔들리게 만드는 듯한 기성을 토하면서 등장한 놈이 곧바로 그리드를 덮쳤다.

덩치는 무척 컸지만 고렘이라는 특성상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그리드는 큰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

고렘의 공격을 회피한 후, 땡기미를 눌러 열망의 무아검을 장착, 반격을 날렸다.

쩌어어어엉-!!

강력한 일격!

회색 고렘의 두꺼운 허리를 열망의 무아검이 강타한다.

한데.

[대상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물리 저항?”

고렘은 멀쩡했다.

어디서 모기가 날아왔냐는 듯한 반응으로, 그리드가 연속적으로 날리는 공격을 무시하고 팔을 휘둘렀다.

쿵! 쾅!!

골렘의 팔이 그리드 대신 땅을 때렸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게 위협이었다.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 공격이었기 때문에 그리드의 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수정구를 통해서 그의 위기를 지켜보는 골드히트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이 탑의 가디언들은 마법으로밖에 처리할 수 없어. 결국 마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게요.’

자, 어서.

달콤한 보상을 노리고 강화 마법을 사용, 내게 그 이치를 엿볼 수 있는 영광을 주기를.

골드히트의 마음이 점차 더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펑-!

콰르르르르륵!!

수정구 속에서 불꽃이 연달아 폭발하더니 가디언을 집어삼켰다.

열망의 무아검에 귀속된 <화염 방출(大)>의 위력이었다. 대상에게 5천의 화염 속성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 말이다.

“……????”

골드히트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