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49화 (644/1,794)

템빨 38권 - 13화

“꼬마야.”

층계참에 올라와 마주 본 소녀는 정말로 작았다. 키가 그리드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드는 소녀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이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골드히트?

이 꼬맹이가 마법왕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이름이 뭐니? 왜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부모님은 어디에 가셨어?”

활짝.

소녀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는다.

하지만 동시에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천진함과 거리가 멀었다. 노파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요호호……. 내가 바로 골드히트요. 누군가는 마법왕이라고도 부르더군.”

“…실화냐.”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그리드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무려 120세가 넘는 노인네의 생김새가 이 모양이라니? 늙지 않는 종족으로 유명한 엘프조차도 이렇게까지 동안(?)은 아닐 터였다.

“마법의 힘입니까?”

이내 정신을 수습한 그리드가 질문을 던지자, 적색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귀엽게 딴 골드히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마법이란 기적을 창조하는 학문인바, 나는 궁극의 기적을 손에 넣고자 부단히도 애써 왔고, 그 결과 지금의 모습을 얻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지. 요호호호.”

영원의 탑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그리드는 골드히트가 바라는 ‘궁극의 기적’이 무엇인지 즉각 깨달았다.

‘영생…….’

섭리에 반하는 목표다.

그리드가 장담컨대, 골드히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온갖 이유로 손가락질당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를 비난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드 본인 또한 칸이 영원하기를 바랐었고, 지금도 여전히 아이린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입장이 아니던가? 골드히트의 바람을 십분 이해했다.

“대단하군요. 젊음을 되찾을 정도의 마법이라니…….”

괜히 마법왕이라고 칭송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드가 감탄을 금치 못하자 골드히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내가 젊음을 되찾았다고 해석하는 것이오? 요호호……. 예상과 달리 순수하신 분이군.”

“……?”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젊음을 되찾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 모습은 뭐지?

묘한 위화감을 느낀 그리드의 마음 한쪽에 불안이 자리 잡았다. 골드히트에게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골드히트는 그에게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번에 나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오. 당대 최고의 영웅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외다.”

정말이지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다. 이제 보니 뒷짐까지 지고 있었다. 기껏 어려져 놓고도 노인의 습성을 버리지는 못한 듯하다.

“저를 초대한 이유가 뭡니까?”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실 골드히트의 등장이 영 내키지 않는 그리드였다. 진행 중이던 히든 퀘스트가 골드히트의 등장과 함께 종료된 까닭이다.

‘이대로 계속 퀘스트를 진행했다면 지력 2천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퀘스트의 진행도에 따라서 지력 보상이 커진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템빨을 제외한 순수 지력이 2,500을 돌파하는 시점부터 파이어볼(강화)을 습득할 수 있는 그리드의 입장에선 무척 아쉬웠다.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골드히트가 충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나를 제자로 받아 주실 수 없겠소?”

“……??”

천하의 마법왕을 제자로 두라고?

귀를 의심한 그리드가 반문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께서 대장일을 배우고 싶다?”

“아니, 그럴 리가요.”

역시나 잘못 들은 거구만.

‘이젠 하다하다 헛것이 다 들리네.’

칸의 죽음 이후 너무 무리해서 달려왔다. 지친 상태다.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그리드에게 골드히트가 말을 덧붙였다.

“대장일이 아니라 마법을 배우고 싶소이다.”

“뭐?”

그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고작 그딴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나를 초대한 겁니까?”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대장장이에게 마법의 가르침을 원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초등학생도 안 할, 두서없는 농담이다.

‘뇌까지 어려졌나?’

쯧, 그리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템빨국의 국왕인 자신을 하찮은 장난의 대상으로 여기는 골드히트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템빨국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하는 그리드에게 골드히트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쾌해하지 마시오. 나는 진심이오. 전하께 브라함의 강화 마법을 전수받고 싶소.”

“……?!”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골드히트의 입에서 설마 브라함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어떻게?’

이자는 내가 브라함의 마법을 습득하고 있단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드가 아차 싶었다.

‘내가 뇌신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건가?’

상대는 마법왕.

시스템은 그를 ‘시대의 강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전설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전설이 될 수도 있을 그릇이었다.

그만한 인물이라면 그리드가 뇌신에게 사용한 마법의 근원을 엿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물론 맨입으로 부탁하는 게 아니요. 전하께서 내게 마법을 가르쳐 주는 대가로 얻는 것이 있을 게요.”

속삭이는 골드히트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혈색이 도는 피부와 주근깨, 붉은 머리카락과 동그란 눈.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겉모습만큼은 말이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 줄 거죠?”

“나는 황제가 3번이나 바뀌는 동안 제국의 비호를 받아 왔소. 그만큼 내가 제국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라는 뜻이며, 나는 내 능력과 더불어 제국의 후광 덕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부와 권력을 축적했지.”

“…….”

“전능하다는 말이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내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드리리다. 요호호호.”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일 터다.

장담하는 골드히트에게.

“우레석.”

그리드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탑의 지붕에 얹어 놓은 누리끼리한 돌덩이 말입니다. 그걸 제게 주시죠.”

“…그건 좀 너무한 부탁 같은데.”

여유 있는 태도로 일관하던 골드히트가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전설의 대장장이가 아니야. 우레석에 대해서 알고 있었군.”

“모를 리가.”

“그럼 불가능한 부탁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을 텐데? 우레석의 가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오. 대악마가 강림하지 않는 이상 결단코 얻을 수 없는…….”

이 대목에서.

“알고 있었군.”

그리드가 골드히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우레석이 대악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광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처분하지 않고 저렇게 방치해 놓았던 겁니까? 대악마가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닐지 모르는 판국에?”

“우레석은 아스타로트의 상징이외다.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잃고 자격을 상실한 대악마 중 하나 말이요. 그깟 놈이 수작을 부려 봤자 큰 위협이나 되겠소?”

“…….”

“우레석에는 막대한 마력이 담겼소. 마법과 병기의 발달에 큰 도움을 줄 정도로 말이오. 약화된 대악마 따위를 경계한답시고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귀중한 보물인 그것을 내 어찌 처분할 수 있었겠소?”

“핫!”

그리드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약화된 대악마 ‘따위’라고?

아스타로트에게 제국이 벌써 십 수 년째 놀아났다는 사실, 세상에 알려질 경우 어떤 파장이 발생하게 될까?

일단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골드히트의 명성은 곤두박질칠 것이고, 제국에서의 입지도 약화될 것이다.

그리드가 확신하는 그때였다.

위잉-! 위이이이이이이잉!!

탑 전체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법사 레이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스승님! 황궁에서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알고 있다.”

골드히트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인벤토리와 흡사한 아공간이 생성되더니 그곳에서부터 백색의 로브가 툭 튀어나왔다.

로브를 걸친 골드히트가 그리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이야기는 잠시 후로 미루도록 하지요.”

그래, 가라.

네가 없는 틈에 나는 우레석을 박살 낼 테니까.

현재 황궁에서 발생한 소란이 규라탄과 연관됐다고 확신한 그리드가 이와 같은 생각을 품었다. 골드히트가 뻔히 읽을 수 있는 꿍꿍이속이었다.

하지만 골드히트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허튼수작일랑 관두시오.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우레석에 접근할 수 없으니까. 괜한 화만 입게 될 게요.”

대량의 마법 함정은 기본에다가 무려 다섯 기의 뇌신이 우레석을 지키는 중이다. 아스타로트 본인이 와도 우레석 근처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한 방비였다.

“다녀와서 봅시다. 내 귀한 손님께서 오래 기다릴 일 없게끔 금방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터이니.”

요호호호……. 기괴한 웃음소리를 남긴 골드히트가 작은 몸에 걸친 백색의 로브를 질질 끌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길 기다린 그리드가 곧장 위층으로 올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탑의 꼭대기였다.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안전을 위해서 초대형 우레석을 파괴하고, 겸사겸사 그 잔해를 챙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다음 층에 오른 그리드는 미로와 마주하게 되었다. 도무지 탈출할 방법을 엿볼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였다.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골드히트 님께서 전하를 잘 모시고 있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자, 내려가시죠. 정중히 모시겠나이다.”

“나는 올라가야겠는데?”

그리드는 친절한 마법사의 안내를 거부했고, 마법사의 입가에는 조소가 걸렸다.

“영원의 탑은 개나 소나 오를 수 있는 탑이 아닙니다.”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더니. 너, 개새끼구나?”

“…….”

템빨국의 왕을, 20억 유저들의 정점을 개, 소 등의 가축으로 지칭하다니?

그리드에게 분노를 참을 의리는 없었다.

열망의 무아검을 꺼내 무장한 그가 골드히트와의 대면 동안 차오른 투기를 자원으로 소모하며 읊조렸다.

“십만대군.”

“……?”

“학살검.”

“……!!”

펑-!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휘몰아치는 적색과 자색의 검기가 거대한 미로를 일직선으로 관통한다. 미로가 산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수십 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 왔던 영원의 탑 일각에 폭발이 발생했다. 높디높은 탑에 휑한 구멍이 생긴 것이다.

“무, 무슨……?”

마법으로 만든 함정을 무력으로 날려 버리다니?

더군다나 방금 십만대군 학살검이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리드의 정체를 눈치챈 마법사가 사색이 되었다.

“무, 무패왕의 후……. 컥!!”

이제 그리드는 허술하지 않다. 후환이 될 수도 있는 목격자를 망설임 없이 해치운 그가 다음 층으로 올랐다.

***

“읏……!”

메르세데스의 비명이 대전에 울려 퍼진다.

규라탄.

사실은 아스타로트인 그는 처음부터 황제가 아닌 메르세데스를 노리고 있었다.

황제에게 마수를 뻗치는 순간 베인이 나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만 건들지 않으면 베인이 나설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메르세데스 님!!”

소란을 듣고 달려왔던 기사들이 질색했다. 이내 분노하며 포효한 그들이 덤벼 오자 아스타로트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 여자가 살기를 바란다면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꽈악!

규라탄은 메르세데스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맨몸으로 마기를 머금은 검에 베인 그녀는 중독된 상태였다.

기사들이 주춤거렸고, 황제는 윤허했다.

“첫 번째 기사여, 무장을 허락한다.”

동시였다.

“메르세데스 님!!”

눈치 빠른 기사 두 명이 메르세데스에게 검을 던져 주었고,

서걱!!

2개의 섬광이 만월을 그리며 규라탄의 몸을 갈랐다.

“큭……!”

참으로 기민한 움직임이다.

메르세데스를 놓치고 만 규라탄이 치를 떨었다.

황제를 등지고 선 메르세데스는 자신의 피에 젖어 붉게 물든 드레스의 밑단을 찢어 내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하려는 의도였다.

이내 규라탄을 마주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12년 전, 조국에 헌신하였던 적기사들과 그의 가족들을 욕보이고 살해한 죄.”

“…….”

“폐하를, 제국 신민들을 기만한 죄.”

“…….”

대전이 술렁인다.

규라탄은 꿀 먹은 벙어리였고, 메르세데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둥 피아로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씌운 죄. 결단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선언하는 메르세데스의 눈빛에 두려움은 없다.

정의가 악을 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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