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0권 - 2화
키엑! 케에에에엑!!
광견병에 걸린 들개 무리를 보는 듯하다.
흉흉한 안광을 번뜩이며,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오는 캇펜 스컹크 무리는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위협적인 괴물이었다.
산기슭을 달려 쫓아오는 놈들을 마주보고 선 템빨국 기사 로이먼이 소리쳤다.
“궁병대! 그대로 달려서 고지를 선점해라!! 창병대와 방패병대는 나와 함께 이곳에서 시간을 번다!!”
“우와아아아아!!”
매해 봄마다 라인하르트 외곽 곳곳에서 출몰하는 캇펜 스컹크의 레벨은 무려 277이다. 지독한 악취와 날쌘 몸놀림을 무기로 삼는 놈들의 강함은 전 에트날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지옥을 선사했었다. 예외 없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까닭에 봄마다 묘비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그 탓에 ‘에트날의 봄에는 석재가 없다.’는 유명한 말이 탄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라인하르트는 템빨국령이다.
템빨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캇펜 스컹크에게 담대하게 맞섰다.
“하아압!!”
서걱! 츠카카칵!!
피아로 밑에서 농사일을 배우며 단련시킨 육체능력!
바위나 나무 등의 지물을 밟고 도약해 덤벼오는 스컹크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놈들을 베어 넘긴 로이먼이 이어서 방패를 땅에 박았다.
푸욱!
땅속 깊숙이 박히는, 끝이 날카로운 삼각방패.
키엑! 키에에엑!!
스컹크들이 코앞까지 도달해오는 순간, 마치 괭이가 땅을 파내듯이 뽑혀 나오면서 지면을 붕괴시킨다.
쿠르르르르르릉!!
“....!!”
짐승은 자연재해에 민감하다고 했던가.
가파른 산세를 날 듯이 뛰어오르던 스컹크들이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섰다.
갑자기 발생한 산사태에 우왕좌왕하더니 급기야 물러서기 시작하는 놈들에게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로이먼과 병사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고지를 점령한 궁병부대의 단비 같은 지원이었다.
“좋아!”
야파 화살에 관통당하고 하나둘씩 잿빛으로 산화하는 스컹크들을 지켜보는 로이먼의 안색이 밝아진다.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부대원들의 몸에는 몇 번이나 빛의 기둥이 떨어지고 있었다.
레벨 업의 상징이다.
***
“수애 부대로부터 신호! 뷰렌 계곡의 스컹크 무리가 박멸되었습니다!”
“블란드 부대로부터 신호! 포티나 들판의 스컹크 무리가 박멸되었습니다!”
“로이먼 부대에서도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좋습니다. 이로써 남쪽 구획도 정리됐군요.”
외곽 막사.
지도를 펼쳐 놓고 군대를 지휘 중인 라우엘은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템빨국 건국 후 처음으로 겪었던 봄, 지금 떠올려도 치가 떨릴 정도로 고역이었다.
왕도 라인하르트 외곽 곳곳에서 출몰한 스컹크 무리로 인해서 수많은 마을이 파괴당했고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난민이 되었다.
당시의 템빨국 전력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번식하는 스컹크 무리를 박멸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폰, 레가스 등의 템빨단원들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템빨국은 강해져왔다.
그리드가 동대륙에서 데려온 인재들과 피아로가 육성한 인재들, 그리고 아스모펠이 교련한 군대가 모조리 그리드의 템빨을 등에 업었으니 올해 템빨국의 군사력은 역대 최고로 강력했다. 그 무서운 스컹크 무리를 단 이틀 만에 모조리 격퇴시켰을 정도이니 라우엘이 체감하기로 수백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영혼을 불태운 보람이 있군.’
지난날의 노력과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라우엘이었다.
탈모까지 얻어가면서 나라 발전에 기여해온 그의 입장에서 템빨국은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만족할 수는 없다.
아직 템빨국은 최고가 아니었으니까.
사하란 제국은 물론이고 비교적 최근에 생긴 발할라 왕국조차도 템빨국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더군다나 한 술 더 떠서.
‘아그너스...’
바로 몇 분 전에 떠오른 월드 메시지가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알려왔다.
최대의 난적이 최강으로 거듭난 지금, 라우엘은 초조함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템빨국을 더욱 더 강성하게 육성해야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일이 여러모로 꼬였어.’
아그너스의 클래스 <바알의 계약자>가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할 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성장형 클래스는 전설에 도달하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레벨이 초기화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아그너스의 전설 승급 타이밍이 이 정도로 빠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그너스의 게임 플레이 방식 때문이다.
‘하이랭커 중에 아그너스만큼 많이 죽은 이는 없을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아그너스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드문 유형의 랭커 플레이어였다. Satisfy에서 죽음은 성장의 저하를 의미했기 때문에 라우엘은 아그너스의 승급 타이밍도 한참 후일 거라고 예측해왔다.
‘하지만 정 반대로 빨랐다....’
아그너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라우엘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잦은 아그너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했었는지, 그는 깨달은 것이다.
‘정보가 적거나 위험 수위가 높은 컨텐츠에 꾸준히 도전해왔다는 뜻....’
광기에 휩싸여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게임을 플레이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 아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추구해왔다는 건가?
이제야 앞뒤가 맞는다.
아그너스가 그렇게 자주 죽고도 수년 동안이나 랭킹 7위를 유지해왔던 이유.
‘그에게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이 있던 거야. 지름길에 도달하기까지 이 정도 수준의 손해는 감수해도 된다.... 하는 나름의 기준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아그너스는 미치지 않았다.
꿀꺽.
내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적이 아닐까?
깨닫고 몸을 떠는 라우엘이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그리드:라우엘. 루비와 섹시여고생에게 버스 태워줄 인원을 구해놔.
그리드의 귓속말이 날아왔다.
-그리드:그 둘을 아그너스의 대항마로 철저히 키워놓을 거야. 그리고 라우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레베카교에 헌금을 3배 이상 더 바치도록 해. 적자 봐도 상관없어. 부족한 돈은 내 사비로 메울게. 언데드 대군에 맞서려면 더 많은 성직자가 필요해질 테니까 미리 알랑방귀 뀌어놔야지.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카데미 교육을 수료한 NPC들 말이야. 이제 슬슬 써먹어도 되지 않을까?
-라우엘:네. 알겠습니다.
그리드의 명령과 의견에 군말 없이 대답하고 호응하는 라우엘의 마음속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아그너스가 예상 이상의 강적이었다고?
상관없다.
나의 주인 또한 예상한 것 이상으로 성장하고 계시니까!
***
하늘에 닿을 기세로 높이 솟은 나무.
둘레만 수백 미터가량 될 것 같은 그 거대한 세계수가 한 눈에 담기는 고지에 엘프들의 마을이 있었다.
나뭇가지를 촘촘히 엮어 만든 집들은 허술하다기보다 나름의 운치를 자랑했다.
“뭐라고?”
“그래도 괜찮겠어?”
지슈카, 페이커, 후로이, 폰, 레가스, 크리스.
그리드와 함께 엘프들의 마을을 방문한 템빨단 최정예 멤버들이 하나 같이 놀라며 당황했다.
앞으로 모든 국가 업무에서 손을 떼고 개인의 성장에만 집중하라는 그리드의 명령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당장 지슈카와 크리스를 봐봐. 그들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계속 바이란과 레이단의 영주를 맡아왔어. 그들이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으면 2개 도시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고.”
“맞습니다. 국가 전반적으로 혼란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군.”
영주가 되는 것은 모든 플레이어들의 로망일 것이다.
자신이 직접 영토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세금을 토대로 큰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는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영주 지슈카와 크리스의 업무량은 상당했다. Satisfy를 플레이하는 시간이 하루 14시간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중 최소 4분의 1에 가까운 시간은 영지 관리에만 쏟아 붓는 수준이었다.
굳이 영주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국가에 속한 가신들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고 그 역할을 수행할 의무가 있었다.
템빨단의 핵심 멤버인 지슈카, 크리스, 폰 등이 업무에서 손을 뗄 경우 템빨국 전체가 휘청이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그리드는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괜찮아. 지난 몇 년 동안 너희들이 개인 시간을 버려가면서 희생해준 덕분에 템빨국은 발전할 수 있었고, 이제는 그 발전을 증명할 때가 왔어.”
“무슨...?”
“너희들의 역할을 대신해줄 NPC들을 확보했다.”
“뭐?”
템빨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 라우엘은 쭉 개고생 중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업무를 도와줄 수 있는 NPC는 라빗 행정관이 유일했다.
행정 재능을 지닌 NPC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자 스틱세이가 아카데미에서 육성한 인재들을 라빗 행정관이 선별해줬어.”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무관을 육성했듯이 그들은 문관을 육성했다.
“이제 더 이상 인재난은 없다. 그동안 너희들이 수행해왔던 업무 대부분을 앞으로는 새로운 인재들이 대신해줄 거야. 모두 그동안 고생 많았어. 게임을 일하듯이 하는 신세에서 벗어난 걸 축하한다.”
그리드가 마주했던 아그너스는 무척이나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아직 전설이 되기도 전에 템빨국과 발할라를 2대1로 상대했던 그 괴물, 전설이 된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감도 안 잡힌다. 아마 앞으로 한도 끝도 없이 날뛸 가능성이 컸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흐름에 따르자. 앞서 말한 대로 앞으로는 너희들 모두 개인의 성장에 주력해줘. 슬슬 4차 전직들 해야지?”
수 년 전, 임철호 회장은 기자회견장에서 분명히 말했었다.
노말 클래스일지라도 전직을 거듭하게 되면 히든 클래스만큼 강력해질 것이라고.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인 그리드 입장에서는 다소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발표였지만, 그리드는 이제 깨닫고 있었다.
‘모두가 비교적 공평하게 강해진다는 건 내가 불리해진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야.’
왜?
‘지금의 내 곁에는 최고의 동료들이 있으니까.’
똑같은 힘이 주워지더라도 남보다 더 큰 실력을 발휘하는 인재들이 템빨국에 즐비한 상황이다.
그리드는 동료들을 믿었다. 그들의 힘에 의지하고 싶었다.
또한.
‘내가 워낙 세기도 하고.’
전직을 거듭한 노말 클래스가 레전드리 클래스급으로 강력해질 때쯤이면....
‘난 신화급으로 강해져있겠지.’
단순한 농담이 아니고 자만도 아니다.
여러 개의 신화급 아이템을 제작하는 한편 대악마들의 힘을 흡수해온 그리드는 진심으로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드가 귀여운 엘프 소녀 데루야루에게 부탁했다.
“내 동료들 말인데. 한동안 숲에 머물게 하면서 고대종들을 사냥시켜도 될까?”
데루야루를 제외한 12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서라. 고대종이 얼마나 강한 괴물인지 알면서도 그런 부탁을 하는 건가?”
“너의 동료들이 너만큼 강하다면 또 모를까, 너무 위험해. 사지로 몰아넣는 셈밖에 안 된다고.”
“맞아요. 고대종을 사냥해준다면야 우리 입장에서는 좋지만.... 당신의 동료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꼴밖에 안 돼요. 부탁을 거둬주세요.”
12테들이 완강히 거절했다. 그리드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절이었다.
소란 속에서 데루야루가 입을 열었다.
“그리드 님의 동료 분들이라면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모두 강하거든요. 제가 직접 봤어요.”
“.....”
인간은 원래 나약한 생물 아니었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나?
당황하며 입을 닫는 12테들에게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참고로 얘네 만큼 강한 애들이 수십 명은 더 있어. 걔네들 모두 숲으로 부를 테니까 모두 사냥하게 해줘. 고대종들의 씨를 말려줄게.”
“그.... 그래....”
허풍이라기에는 너무 허황되서 허풍 같지가 않다.
12테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였다.
-숲의 아이들이여. 그분은 빛의 여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입니다. 그분과 그의 동료들 모두에게 정령의 축복을 내려주도록 하세요.
허공에서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세계수의 나무였다.
그리고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은 역대급 사기 이벤트를 체험하게 되었다.
[태초의 나무 <세계수>가 거대한 축복을 내립니다!]
[플레이어 ‘그리드’와 그리드가 이끄는 세력의 모든 플레이어가 정령과의 계약이 가능해집니다. 단, 하급 정령에 한합니다. 속성 또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속성은 무작위로 부여됩니다.]
[기존의 세력원들에게만 적용되는 혜택입니다. 새로운 세력원에게는 이 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넋이 나가버리는 그리드의 귓가로 지슈카와 템빨단원들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사랑해 그리드.”
“나도....”
“저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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