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98화 (693/1,794)

템빨 40권 - 4화

[바람의 하급 정령이 당신의 화살을 더 빠르게 만들어주겠노라고 속삭입니다.]

[바람의 하급 정령이 당신의 창끝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겠노라고 속삭입니다.]

[바람의 하급 정령이 당신의 입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겠노라고 속삭입니다.]

“왜 나만 주둥이냐!!”

“...??”

지슈카와 폰, 그리고 후로이는 바람의 하급 정령과.

[땅의 하급 정령이 당신의 육체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합니다.]

레가스는 땅의 하급 정령과 계약을 성공했다.

상급 정령과 계약하는 그리드를 보고 ‘혹시 나도?’하는 기대감을 품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결과였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리드가 아니었다면 정령과 계약할 기회조차 없었을 터.

하급 정령과 계약한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좋아.’

바람의 하급 정령 덕분에 공격 속도와 공격 명중률이 소폭 상승한 지슈카와 폰, 마찬가지로 바람의 하급 정령 덕분에 말하는 속도-웅변가의 스킬 시전 속도-가 빨라진 후로이, 땅의 하급 정령 덕분에 상태이상 저항력과 방어력이 소폭 상승한 레가스는 충분히 만족했다.

특히 근접 직업군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방어력 탓에 여러 번 발목이 붙잡혔던 레가스의 기쁨이 컸다.

한편 페이커와 크리스는 대박 행운을 거머쥐었다.

[당신이 자신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눈치 챈 바람의 하급 정령이 좌절하며 물러납니다.]

[바람의 중급 정령이 당신과 함께하면 즐거울 것 같다며 속삭입니다.]

[당신으로부터 폭군의 자질을 느낀 모든 하급 정령들이 도망칩니다.]

[땅의 중급 정령이 당신의 거친 성정을 다스려주겠노라고 약속합니다.]

“이거 설마.”

중급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한 페이커와 크리스를 목도한 일행들이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상위 정령과 계약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높은 등급의 클래스’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었다.

칸의 사후 <그림자 왕에게 배우는 자>라는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한 페이커와 진즉부터 <폭군>이라는 상위 세컨드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던 크리스 두 사람이 중급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으니 근거는 충분했다.

“가능성이 높아. 그리드가 상급 정령과 계약한 것만 봐도 그렇잖아?”

“흠.... 유라의 계약 결과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군.”

데빌 슬레이어 유라 또한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상급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드는 물론이고 템빨단원 모두가 기대했다.

***

쿠오오오오오오.....

독의 강 주변에 짙은 연무가 가득하다. 숨만 쉬어도 상태이상 ‘중독’을 유발하는 끔찍한 독 안개였다.

쿠르르르릉....!

곳곳에 솟은 화산들이 쉴 틈 없이 활동하니 대지가 출렁였다. 균형 감각이 상실됐다. 들끓는 용암은 열기만으로 피부를 녹여 산 자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32번째 지옥의 풍경이다.

벨리알이라는 통치자를 잃은 이곳은 혼돈만이 가득했다. 마물들은 더 이상 통제되지 않았고,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 지 오래였다. 굶주린 마물들만이 정처 없이 배회했다.

그곳에.

타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마수의 죽음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타앙! 타탕!!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마수들이 잿빛으로 산화한다. 연무를 꿰뚫고 치솟는 잿빛 기둥의 숫자는 급기야 수십 단위가 되었다.

끼잉...! 끼깅!

속절없이 당하는 동족을 목격한 마수들이 기세를 잃었다. 마치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하지만 무심한 표정의 미인은 놈들을 놓치지 않았다. 아공간을 소환하더니 공간 그 자체를 도약, 마수들의 퇴로를 선점하며 등장한 후 놈들의 주둥이에 칼을 쑤셔 넣었다.

얼굴에 튀는 피가 유난히 더 붉게 보이도록 만드는 흰 피부의 미인, 데빌 슬레이어 유라다.

“후우.... 후우....”

인계와의 소통이 차단 된 지옥.

메마른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이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은 보통 정신력으로 불가능했다.

그리드를 상대했을 때를 제외하면 평정심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명경지수 유라조차도 지옥에서의 삶은 고달팠다.

육신과 마음이 지친지 오래다. 이제는 귓전에 끊임없이 울리는 이 비명소리가 실제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어 머리 또한 혼란했다.

하지만.

저벅저벅.

유라는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벌써 몇 달째 이동해도 변치 않는 풍경을 시야에 담은 채 쉬지 않고 걸었다. 마수들을 찾아 총구를 겨눴다.

타앙-!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자격.

하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존으로 등극한 그리드와 동등한 눈높이에 설 수 있는 자격이었다.

그녀는 다시 당당해지고 싶었다.

레벨과 지위를 버리고 선택한 <데빌 슬레이어>라는 직업이 <검성>과 <파그마의 후예>와 비교해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다시 예전처럼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리드를 마주함에 있어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기를 바랐다.

그녀가 야탄교를 버리고 템빨국에 귀화한 이유, 그리드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지 짐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기에.

“....?”

이를 악 문 채 전진하던 유라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난 2개월 동안 아무리 전진해도 변함이 없던 지옥의 풍경이 처음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짙은 연무 너머로 검은 성이 보였다.

‘벨리알이 기거하던 성?’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유라의 죽어가던 눈동자에 빛이 깃들었다.

그녀는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

주인 잃은 성에 남은 ‘무엇인가’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도움을 줄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것이 흉포한 괴물일지라도, 찬란한 보물일더라도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과욕이 아니다.

<대악마의 성>이 지닌 상징성을 고려해봤을 때 유라의 기대감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끼이이이이익--

먼지가 수북이 쌓인 거대한 성문이 유라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활짝 젖힌다.

“.....”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외성의 풍경을 관찰하는 유라의 아미가 좁혀졌다.

굶주린 마물들이 저들끼리 잡아먹기라도 반복한 것일까?

외성에는 마물들의 썩은 시체와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사위를 경계하는 유라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내성문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는 ‘무엇인가’의 기척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찌릿....! 찌릿!!

[데빌 슬레이어의 육감이 강력한 마기를 느낍니다.]

[<결사 태세>에 돌입합니다. 극도로 집중하여 마법공학총의 총탄 생성 속도가 10퍼센트 상승하고 물리 방어력이 15퍼센트 상승합니다. 마법 저항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인계에 강림했던 32위 대악마 벨리알과 대면했을 때도 발동하지 않았던 패시브 스킬이 유라에게 알려준다.

저 문 너머에 준비 된 선물,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유라가 마음을 다스렸다.

‘나도 이제 300레벨이 넘었어.’

심지어 이곳은 지옥이다. 데빌 슬레이어의 직업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소다.

지금의 유라는 벨리알 레이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며, 두려움을 극복한 유라가 작고 고운 손으로 성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이이이익....

녹슨 쇠의 기분 나쁜 마찰음이. 아니, 어두운 대전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왕좌 위 ‘사내’가 유라의 피부 위로 소름을 돋게 만든다.

“어째서 이곳에 당신이....?”

왕좌에 걸터앉은 사내에게 질문하는 유라의 음성이 격하게 떨린다.

그녀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동요하는 경우, 그리드를 대면할 때밖에 없다.

왜?

그리드는 언제나 그녀의 예상을 초월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파그마의 검무.”

왕좌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

한 걸음, 두 걸음 전진하며 춤사위를 펼친다.

정신없이 나부끼는 산발 사이로 맹금류의 것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동자가 엿보였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수십 마리의 용?

흉포한 기세로 밀려오는 검기의 파도가 유라를 덮친다.

“.....!!”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오랜 세월 동안 32위 대악마의 위세를 상징했던 거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

템빨단은 지난 수 년 동안 그리드의 명성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그리드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라우엘의 철저한 검증 하에 인재를 선별하여 템빨단에 소속시켰다.

이제 템빨단원의 숫자는 무려 620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제작 계열 직업군이라는 점이 언밸런스 했지만, 국가를 세우고 ‘군사력’을 보유한 템빨단 입장에서는 전투 직업군보다 제작 직업군을 더 귀하게 쳐주는 것이 당연했다.

“대장장이들은 전부 다 불의 정령과 계약했다고?”

“네. 판미르 님도요.”

“이런 쉬불.... 근데 왜 나만 빛의 정령이냐? 파그마의 후예는 대장장이도 아니라 이거야?”

화공에 대한 그리드의 집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래도 파그마의 그림자를 쫓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라우엘은 연신 투덜거리는 그리드를 달래느라 고역을 치렀다.

“빛의 정령이 최고위 정령이라면서요? 왕족만 거느리는 정령이라던데? 불의 정령보다 당연히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진정하고 만족하시죠.”

“그건 아는데 대상이 암흑 속성이 아닐 경우에는 영 별로잖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불의 정령도 물의 힘을 지닌 대상에게는 카운터를 맞았을 거 아닙니까?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어디 흔한가요?”

“아니, 생각해봐. 만약 내가 불의 정령을 다뤘으면 얼마나 편리했겠어? 아이템 만들 때 불 지피기도 편하고, 여행하다가 밥 짓기도 편했을 거 아니야?”

“....어차피 육포만 먹을 거면서.”

이쯤 되면 단순한 투정으로밖에 안 들린다.

그리드를 달래는 일을 포기한 라우엘이 막사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백 명의 템빨단원들이 세계수 앞에 줄을 서있었다.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하고 환호하며 그리드 만세를 외치는 그들 모두 행복이 충만해보였다.

“뭐, 어찌됐든 대단하십니다. 전하의 활약에는 언제나 감탄밖에 안 나와요.”

“새삼스럽게 뭘. 그보다 너도 정령하고 계약했어?”

“당연하죠. 영혼의 이끌림에 의거하여 숲에 도착하자마자 정령과 교신했습니다.”

큭큭큭,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웃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흑정령이랑 계약했냐?”

“맞습니다. 제 이 팔에 봉인 된 흑염룡이 불의 정령과 흑정령 사이에서 잠시 고뇌하였지만 결국에는 흑정령을 선택하더군요.”

“미친....”

이쯤 되면 게임 시스템이 소름 돋을 정도다. 대상 인물의 성향을 너무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듯하다.

닭살을 털어내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마지막 확인을 요구했다.

“8명씩 조를 짜서 사냥하다가 베어 울프 외의 고대종이 출몰할 경우 전원이 모여서 레이드할 것.... 이 명령에 잘못 된 부분이 없는 건 확실합니까?”

“응.”

“현재 템빨단 전체 전력이면 벨리알 레이드도 시도해볼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응.”

“....고대종이 그렇게 강합니까?”

“강해. 그래서 메르세데스와 쥬드도 두고 가겠다는 거야. 길드원들이 숲에서 사냥하고 성장하는 동안 그 둘도 함께 성장하면서 길드원들의 안전을 책임져줄 거다.”

“정말로.... 진심으로 혼자서 되겠습니까?”

그리드는 상왕 키르의 도시를 혼자서 침략하고 박살내겠노라고 천명했다.

라우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키르의 전속 기사들을 처리했다고 해도 도시에 남은 병력의 숫자가 족히 수천이다. 심지어 플레이어도 수백 명일 것이다. 키르의 재력을 기반으로 템빨을 둘둘 갖춘 하이랭커들도 수십 단위일 것이고.

그들을 오로지 단신으로 격파하는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리드의 전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라우엘이었지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랭커들의 성장세가 무서웠고 점차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좀 많이 강해졌거든.”

아그너스가 전설로 승급한 시점에서 키르의 구제 확률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라우엘이 먼저 나서서 키르를 재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박살내야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키르의 성정을 고려해 봤을 때 당연한 흐름이었다.

“서둘러야겠네. 키르 그 놈, 이미 벌써 아그너스와 접촉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하란 제국과 임모탈, 그리고 야탄교와 대악마....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쟁들이 예정 된 상황에서 화근의 대상을 방치할 생각은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리드가 세계수의 숲을 떠나 상왕 키르의 도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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