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0권 - 11화
“큭....! 크아아아아아!! 그리드으으으!!”
캡슐에서 눈을 떴을 때까지만 해도 꿈인가 싶었다. 정확히는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2번 연속으로 사망한 베라딘은 Satisfy로부터 강제 로그아웃 당했고, 덩달아 환국의 주민이 될 수 있는 기회 또한 영구히 놓치고 말았다.
쾅! 쾅! 쾅!!
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캡슐을 내리치는 베라딘의 뇌리에서 의문이 떠나질 않는다.
‘어떻게 그만한 힘이 남아있던 거지?’
페난의 병력은 3천에 달했다. 다수의 하이랭커가 포진해있을뿐더러 상왕 키르의 재력을 등에 업은 병사 전원이 상당한 템빨을 자랑했다. 거기에 임모탈의 네크로맨서들까지 포함됐다.
그리드가 그 대량의 정예 군단을 돌파하고 자신에게 도달하기까지 대부분의 스킬과 스태미나를 소모했으리라고 베라딘은 예측하고 있었다.
아니, 예측이라는 표현은 너무 겸손하다.
베라딘은 확신했다.
그리드가 자신을 쫓아오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거라고. 설령 자신을 쫓아오더라도 칼 한 번 휘두를 체력 하나 남아있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왜?
스태미나라는 자원의 특수한 성질 때문이다.
스태미나는 생명력이나 마나 등의 평범한 자원과 다르다. 물약 복용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무조건 휴식을 취해야지만 회복됐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 그리드의 체력 스탯이 3천을 넘었다고 가정해도 지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놈은 멀쩡했었다.’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
‘전선에 남아있던 임모탈이 그리드에게 항복했다?’
그래서 그리드의 체력 안배가 용이해졌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베라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대목에서 자신의 계산이 어긋난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상왕 키르 탓이다.
체면 때문에 그리드에게 입은 피해규모를 ‘축소’해서 말했던 키르.
그리드에게 본인의 유니콘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베라딘에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결국, 베라딘은 잘못 된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리드의 체력 스탯이 4천을 넘은 건가?”
그렇다면 높은 스태미나와 방어력도 이해된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대부분의 스탯 포인트를 체력에 찍고도 공격력이 극도로 높을 수 있는 비결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지력은 무슨 수로 확보한 거지? 그 민첩함은 또 뭐고?
“...결국 다 템빨이라고?”
콰앙!!
애꿎은 캡슐을 내려치는 베라딘의 주먹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근육 없이 마른 몸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적었다. 값비싼 캡슐은 미동도 않고 멀쩡했다.
베라딘은 뼈저린 무력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로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Satisfy에서도 늘 승승장구해왔던 그의 입장에서 그리드에게 연달아 겪은 패배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제길! 빌어먹을!!”
양반이 되고 싶었다.
자신을 제외한 20억 플레이어들에게 타고난 격의 차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저 아그너스마저 발밑에 두고 독보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드....!!”
바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그리드에 대한 원한이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
전의는 타오르지 않았다.
임모탈마저 잃게 된 자신이 그리드에게 무슨 수로 항거하겠는가?
베라딘은 한참을 머뭇거릴 뿐이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사자의 정체가 사실은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엿볼 수 있었다면....
의욕을 잃고 좌절하는 베라딘에게 남은 것은 온갖 후회뿐이었다.
괴물의 아가리에 발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오래토록 반짝였을 별이 진다.
***
상인 랭킹 3위 뮤토.
그리드에게 협력하여 제국 황실에 샹들리에를 팔아넘겼던 그는 유래 없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템빨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호 아래 확보한 상권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눈앞의 이윤에 욕심내기보다는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가격 정책을 펼친 것이 신의 한수였다.
이제 템빨국에 완전히 자리 잡은 뮤토 상단의 점포를 방문하기 위해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이 템빨국을 찾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농업에 비해서 한참 뒤떨어졌던 템빨국의 상업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고, 뮤토 본인 또한 랭킹 2위를 노려볼만한 경쟁력을 갖춰나갔다.
뮤토가 예상하기로 앞으로 4달 후면 상인 랭킹 2위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상인은 랭킹이 높아질수록 보유할 수 있는 점포의 숫자와 종류가 많아졌기 때문에 랭킹의 가치는 무척 높았다. 랭킹 2위와 3위의 격차가 컸다.
뮤토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이 행복했다.
과거, 그리드와 동대륙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던 그날, 음식을 빙자한 독극물을 내어주었던 어떤 미친 요리사의 음식을 군말 않고 먹었던 스스로가 대견했다.
제국 황실과 척을 지면서까지 그리드의 부탁을 들어준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뮤토는 그리드라는 인물을 선택한 자기 자신의 혜안이 자랑스러웠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 무척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자가 왜 여기에....?”
뮤토는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상인 랭킹 1위 키르.
상왕이라고 칭송 받는 상인계의 거두가 템빨국에 방문한 까닭이다.
뮤토는 라우엘과 나란히 나타난 키르를 보고 아차 싶었다.
‘또 당하는 건가....!’
여태까지 뮤토는 키르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 왔다.
사업을 확장함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키르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뮤토에게 있어서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뮤토는 키르가 이번에도 뒤에서 정치공작을 펼쳤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템빨국에서 기껏 쌓아올린 입지가 빼앗기기 직전임을 깨달았다.
‘그리드 님께 도시를 침공 당해놓고도 이런 상황을 만들다니....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바꿔버린 건가?’
적개심이 깃든 눈빛으로 키르를 쏘아보는 뮤토에게 키르가 비웃음을 날렸다.
“악당 보듯이 하지마라. 내 입장에서는 너야말로 지독한 악당이니까. 자, 받아.”
“....?”
뮤토가 당황했다.
키르가 상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장부’를 넘겨왔기 때문이다.
‘무슨 장난이지?’
의아해서 멀뚱멀뚱 있는 뮤토에게 라우엘이 빙그레 미소지어주었다.
“받으세요. 무려 상왕의 거래처와 사업 현황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장부입니다.”
“그....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질문하는 뮤토에게 들려오는 것은 라우엘의 대답이 아니라 키르의 조소였다.
“음흉한 새끼가 끝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발뺌하기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 네놈에게 넘겨주는 이번 계획을 당사자인 네놈이 모르고 있었다고? 그게 말이 돼?”
“무슨....”
상왕 키르의 모든 것을 빼앗아 내게 넘겨준다?
뮤토의 인지가 따라가지 못한다.
멀뚱멀뚱 서있는 그의 어깨를 라우엘이 두드려주었다.
“키르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키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번에는 당신이 빼앗을 차례입니다.”
“......”
“새로운 상왕이 되세요. 그리드 전하의 뜻입니다.”
두근! 두근! 두근!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뮤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온갖 감정이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그리드 님께서는 저를... 저를 어찌 믿고....”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템빨단에는 상인이 없었고, 그리드가 개인적으로 인연을 쌓은 상인은 뮤토가 유일했다.
또한 뮤토는 단기간 동안 보여준 사업 수완이 훌륭했다. 자신이 왜 상인 랭킹 3위인지 충분히 증명해보였다.
하지만 라우엘은 입을 다물었다.
구구절절이 떠드는 것보다는 뮤토가 알아서 받아들이게끔 놔두는 편이 도리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뮤토의 반응을 보아하니 새로운 그리드 빠돌이가 탄생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라우엘은 흐뭇해하는 한편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했다.
“뮤토 님, 앞으로 템빨국의 상권과 키르의 상권을 동시에 장악하게 될 당신은 천문학적인 재력을 쌓아올리게 되겠죠. 인정하지요?”
“그야 당연합니다.”
“수익의 7할을 그리드 님께 바치세요.”
7할.
충분히 합리적인 요구였다.
특정 국가나 세력이 상단에게 독점적인 상권을 내어줄 경우 요구하는 수익 분배율이 4할에서 6할이었다.
하물며 그리드는 키르에게 템빨국의 상권뿐만 아니라 키르의 상권까지 확보해줬다.
7할은커녕 8할의 수익분배를 요구해도 뮤토의 입장에서는 반발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키르는 뮤토가 거부할 거라고 보았다.
‘7할은 무슨.’
키르는 알고 있다.
자신의 상권을 고스란히 인계받고 관리할 수 있는 상인은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 단 두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랭킹 3위 뮤토와 2위 세실리아였다.
그리드 입장에서도 뮤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뮤토가 고작 3할의 수익으로 만족할까? 4대 6으로 하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역시나.
“7할이요...? 그건 싫습니다.”
뮤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것 봐라.’
우쭐해진 키르의 콧대가 높아진다. 그는 그리드와 뮤토 사이에 앙금이 생기길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얼싸안고 잘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라우엘이 한숨 쉬었다.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뮤토의 거절은 라우엘 또한 예상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율하도록 하죠.”
6할 정도로 합의하는 것이 현실적일 터.
라우엘이 생각하는 그때.
“9할을 드리겠습니다.”
“네?”
“뭐?”
뮤토가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고, 이에 라우엘과 키르 모두 당황했다.
뮤토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그리드 님께서 주신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갚아나가겠습니다. 대신 그리드 님께서도 마지막 그 순간까지 우리 뮤토 상단을 비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뮤토는 확신한다.
그리드는 소국의 왕으로 끝낼 인물이 아니다.
‘그리드 님의 무력과 대장기술, 그리고 거침없는 추진력과 그 밑에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인재들을 고려해봤을 때....’
훗날 그리드는 사하란 제국과 호각을 이루는 대국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시점이 어쩌면 10년도 더 후에 찾아올지는 모를 일이나,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다고 뮤토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
투자다.
뮤토는 더 큰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엿본 키르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번 사태를 보고도 모르겠나? 그리드는 극단적인 인물이다. 위험해. 늘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될테고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지고 말 거야. 그와 평생을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고? 뮤토,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네놈이 3인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조롱하는 키르에게.
“3인자? 이제는 내가 1인자 아닌가?”
“.....”
“이런 내게 어리석다고? 모든 것을 잃은 네가 할 말인가?”
뮤토는 반문했고, 키르는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상인 랭킹>
1위-뮤토(소속:템빨단)
새롭게 갱신 된 랭킹이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
랭킹 어디에서도 키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제 상왕이라는 이명은 뮤토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소속 된 템빨단의 인지도와 입지 또한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템빨국의 세력이 확장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
“이제 슬슬 우리도 나서볼까.”
발할라.
플레이어가 세운 그 두 번째 왕국에서 대규모 출정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군신 아레스를 필두로 하나 같이 유명한 장군들이 수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출병했다.
목적지는 울티나 왕국.
발할라의 첫 침략대상으로 선택 된 소국이다.
‘나 또한 반드시 무훈을....!’
한때 <무패왕의 후예>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플레이어 오아시스가 아레스의 바로 곁에 있었다.
같은 시각 울티나 왕국의 깊은 산골에서는....
“스승님의 옛 친구라고요?”
한 명의 플레이어가 아스모펠이라는 네임드 NPC와 대면하고 있었다.
불쑥 찾아온 손님을 경계하는 플레이어의 이름, 하스터였다.
긴 여행에 지친 아스모펠이 어두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같은 기사단에 속했던.... 배신자라고 전해주면 알 것일세.”
“아, 바로 당신이.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기적의 5인방 중 하나.
크라우젤조차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던 은둔고수 하스터의 멈춰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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