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18화
생리적으로 싫은 사람이 있다.
아그너스에겐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드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리드에게도 자신과 닮은 과거가 있다지 않던가?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직접 사람을 죽이는 등의 하드코어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테지만.
‘네놈 또한 충분한 고통을 받았을 터다....!!’
아그너스는 알고 있다.
개인이 받는 고통에 경중을 따지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짓밟은 것으로 모자라서 종국에는 내 연인마저 유린했던 놈들.
매일 아침마다 내 손바닥을 재떨이로 사용하고, 이를 웃으면서 즐긴 주제에, 정작 본인들은 교과서 페이지 넘기다가 베인 손가락 통증만으로도 울상 짓지 않았던가?
그래, 고통은 상대적이며 이기적인 법이다.
그리드가 겪었던 고통이 내가 겪었던 고통보다 못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너 또한 타인에게 유린당하는 삶을 살지 않았는가!
한데 왜!!
‘어째서 그토록 즐거워 보이는 거지...!?’
그리드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동료, 친구, 연인, 가족.
그들과 함께 선 그리드는 항상 웃고 있었다.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가 무력했던 시절에는 그들 또한 방관자에 불과했음을, 너는 잊었는가?
우리는 포용하기보다 짓밟아야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혼자여야만 한다.
콰자작!!
[8,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10퍼센트 미만입니다. <죽음의 룬>에 귀속 된 <실베나스의 힘>이 발동합니다. 어둠과 동화되는 암마족의 특성이 발현되어 당신의 모습과 기척을 숨깁니다.]
[당신의 계약자 바알이 즐거워합니다.]
-사사로운 신념으로 악을 집어삼키는 악이라. 전대와 영 반대이면서도 닮았구나. 역시, 널 선택하기를 잘했다. 재미있거든.
[제1위 대악마 바알과의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그리드에게 몸이 베이는 아그너스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지만 아그너스는 확인하지 못했다. 증오에 찬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리드를 쫓고 있었다.
“정작 소중한 이들은 지키지도 못하는 무능한 놈이....!!”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 속 어둠을 지우지 못했을 네놈 따위가, 어째서 혼자가 아닌 함께를 택했는가!
기껏 얻은 소중한 존재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왜 하찮은 놈들 모두를 포용하려하는가!
나는.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너를 혐오한다.
퍼어어어엉!!
아그너스의 모습이 그리드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때마침 열망의 무아검이 검은 불꽃 폭발을 일으켰다.
일대에 피해를 입히는 스플래쉬 데미지 탓에 아그너스는 기껏 몸을 숨긴 의미도 없이 또 새로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 리치화 상태입니다. 지속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한 내성이 생깁니다.]
[살아남았습니다!]
콰직! 꽈지직!!
잿빛 새벽.
기울어진 기둥의 그림자와 동화되어 모습을 숨기고 있는 아그너스의 갈비뼈에 균열이 발생했다. 기우뚱, 육체가 위태롭게 균형을 잃는다.
생사의 기로.
선택 한 번에 목이 날아갈 수도, 목을 날릴 수도 있는 급박한 전투 상황.
평소의 아그너스였다면 웃으며 즐기고도 남았다.
지독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짜릿한 순간에 경의마저 표했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꽈드득! 이를 가는 아그너스의 표정에서 엿볼 수 있는 감정은 혼란과 고통뿐이다.
타인에 불과한 이들을. 심지어 증오하는 그리드의 가족들을 보호한 행위에 대한 혼란은 없다.
그들을 지킨 이유는 그들에게 죽은 옛 연인을 투영해서일 뿐이고, 후회는 없다.
지금 아그너스가 느끼는 혼란과 고통의 근원은 그리드라는 인물에게 있었다.
왜 나와 같지 않고 다른가?
내가 잘못됐다고?
아니! 아니다!
“네가 잘못됐다!!”
푸욱-!!
어둠을 꿰뚫고 등장한 아그너스의 검이 그리드의 옆구리를 찌른다.
강력한 저주가 그리드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저항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암흑 저항력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쿨럭...!”
피를 토하는 그리드의 시야에는 몇 분 전에 떠올랐던 알림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다.
[빛의 여신 레베카가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여신의 축복으로 거대한 힘을 얻었던 당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무신 제라툴이 당신의 선택에 흡족함을 느끼는 중입니다.]
[무신 제라툴은 당신을 향한 여신의 애정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리드 또한 알림창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아그너스는 늘 누군가를 해치고 있었다.
그리드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타인을 쉽게 짓밟고, 이를 통해서 희열을 느끼는 쓰레기다.
“미친 새끼가...!!”
이제는 내 소중한 가족마저도 자신의 희열을 위한 제물로 삼다니?
고오오오....!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끓어오른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느낀다.
아그너스를 향한 그리드의 살의는 진짜였고, 그리드가 몸에 두르고 있는 투기는 더욱 더 짙어진 상태였다.
“파(派)!!”
콰르르르륵!!
검기의 파도가 그리드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갑자기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아그너스를 포착하기 위한 광역기였다.
“...거기!”
그리드가 감지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기 파도의 특정 지점이 무엇인가에 가로막혔음을 확실히 느꼈다.
고오오오오-!
춤사위를 펼치는 그리드의 검 끝으로 살기가 집약된다.
파그마의 검무, 극살(極殺)의 전조였다.
융합 검무의 발현은 명백한 실수였다.
“큭....!”
털썩!
도중에 검무를 멈춘 그리드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다.
흥분한 그는 본인의 스태미나 상태를 간과하고 있었다.
[체력이 방전되기 직전입니다. 전투 관련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템빨....콘.....”
유니콘과의 교감을 통한 스태미나 회복이 절실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판단이었지만, 전투 도중에 유니콘과 교감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적은 바보가 아니다. 둔하지도 않다.
특히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은 더욱 더!
“키킥! 키햐하핫!!”
검기의 파도를 꿰뚫고 어둠을 벗으며 등장하는 녹발의 사내.
몸의 절반이 백골이 된 상태인 그의 기세가 맹렬하다. 산발이 된 녹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그리드는 위기를 느꼈다.
갓 핸드, 노에, 랜디, 템빨골, 빛의 정령 등을 모조리 아이린과 로드의 호위 역할로 붙여 놓은 지금, 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 본인밖에 없었다.
한데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드으!!”
아그너스가 쇄도해오는 모습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다.
웅성웅성!!
“...!!”
“...!!!”
주위가 시끄럽다.
연신 뭐라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오지만, 내용은 귀에 박히지 않는다.
‘어쩌지?’
이대로 죽으라고?
아니, 상대도 지쳤다.
딱 봐도 망신창이다.
아그너스가 리치화를 사용했다는 건 이미 그 또한 최후의 수단을 잃은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불사와 벤타오의 조롱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암흑의 룬>을 개방, 대상에게 입힌 피해량의 100퍼센트를 흡혈하는 <크레이의 힘>을 전개했다.
급한대로 평타라도 휘둘러서 대응하고, 조금이라도 목숨을 길게 유지하면서 아그너스에게 대항할 각오였다.
아직 그에게는 최초의 왕의 칭호 효과와 티라멧의 힘, 그리고 불사가 남아있었다.
버티고 싸우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애초에 반드시 버텨야하는 입장이다.
아이린과 로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코 쓰러져선 안 된다.
부웅-!
굳게 다짐하며 검을 휘두르는 그리드와.
콰차착!!
공격 스킬을 전개, 그리드의 평타를 씹어버리고 그리드의 몸을 가격하는 아그너스.
그대로 뒤엉킨 채 서로를 해치려하는 두 사람의 사이로.
쿠와아아아아앙!!
빛의 섬광이 지나갔다.
위력은 종전과 비교해서 터무니없이 약해져 있었지만, 야탄의 세 번째 종 알리번을 해치웠던 성검의 일격이 분명했다.
자칫하면 죽을 뻔한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시선이 동시에 데미안에게 향한다.
드디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그들에게 데미안이 말했다.
성검을 되찾고 야탄교의 침입을 막아낸 데미안 또한 한 단계 진화한 상태였다.
“이곳은 여신의 뜻을 섬기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싸움을 멈추세요. 이 이상의 살육은 교황의 자격으로 제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그리드가 던지는 의문이었다.
아그너스는 적.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바알의 계약자다.
레베카교 입장에서도 배척해야하는 대상이었다.
그를 처단할 기회를 이대로 물리라니?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데미안은 아이린과 로드, 그리고 리치 무무드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보시죠.”
“....?”
짜증과 의문이 섞인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데미안의 시선을 좇았다가 놀랐다.
무무드의 상징과도 같은 무지갯빛 마력으로 생성 된 실드가 아이린과 로드의 곁에 떠올라 있음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전투 여파로 발생한 온갖 후폭풍으로부터 아이린과 로드를 지켜준 인물, 다름 아닌 리치 무무드였다.
“무슨....”
당황하는 그리드의 뇌리에 아이린과 로드의 외침이 스쳐지나갔다.
착한 해골님이라고 했던가.
리치 무무드가 자신들을 지켜주었다고...
‘그게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왜?
그리드의 떨리는 시선을 목도한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드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오늘은 일단 싸움을 끝내시는 편이....”
레베카교는 바알의 계약자를 ‘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대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가 명예의 전당을 지키는 공로를 세웠다고는 하나,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이단이었다.
레베카교는 말년의 파그마를 영웅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 뿐더러 당대의 바알의 계약자는 반드시 처벌해야한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게 교황 데미안의 판단이었다.
“오늘만큼은 서로 물러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너스가 어떤 이유에서 야탄교를 배반하고 우리를 도운 건지, 데미안은 당연히 몰랐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다.
지금은 사태를 수습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대화의 기회야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당장 이유를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너, 무슨 꿍꿍이지? 왜 내 가족을 지켜준 거냐?”
“아앙? 무슨 헛소리야? 그런 적 없어.”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네 가족인 줄 몰랐으니까.”
“....?”
“그냥 여자가 꽤나 예쁘기에, 죽는 건 아깝다 싶어서 지켜줬을 뿐이야. 킥킥... 살려서 내가 업어갈까 했지.”
리치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간다.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그너스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노출 된 템빨왕 그리드와 1대1로 대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말이다.
“후.”
아무도 믿지 못할, 변변찮은 이유를 설명하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아그너스.
산발이 되었던 녹발이 깔끔하게 정돈되며 차가운 황금안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냥 말이야.”
“....?”
“그냥 싸우고, 죽이자. 응? 킥! 키킥! 키햐하하핫!!”
타앗-!
예의 광소를 터뜨린 아그너스가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명백히 교황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레베카교 신도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만무하다.
푸욱-!!
푹!! 푹푹!!
이사벨의 창이, 성기사들의 검이, 반백골 아그너스의 깡마른 몸을 찌르고, 또 찌른다.
아그너스는 그리드에게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완전히 구속되었다.
“당신 왜....!”
데미안의 탄식이 들려왔으나, 아그너스의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한다.
안타까워하며 눈물 짓는 아이린과 로드에게 잠시 돌아갔던 아그너스의 시선은 이미 다시 그리드에게 꽂히고 있었다.
“너 말이야.”
“.....”
“...조금 더 강해져라.”
쏴아아아아아아----
그 말이 끝이었다.
창과 칼에 찔린 채 구속당한 아그너스의 몸은 서서히 잿빛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무드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해골 기사님....”
저들은 언제쯤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아그너스와 무무드의 슬픔을 엿보았던 어린 왕자 로드의 안타까움이 커진다. 눈시울을 붉힌 아이는 울음을 참느라 노력해야만 했다.
이후.
교황 데미안은 장로들과 함께 수습에 나섰다. 각국의 왕족들과 황자에게 휴식을 권한 후, 자신들은 야탄교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 경위와 피해규모 파악 조사에 나섰다.
“분투는 잘 보았소. 과연 폐하께서도 인정한 영웅답더군. 템빨왕의 무위에 내 몇 번이고 감탄했소이다.”
“과찬이오.”
2황자 듀란달의 인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그리드는 아이린과 로드가 잠든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여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영웅이여,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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