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13화
<(속보) 그리드 실종!>
<템빨왕 그리드, 헥세타이아 신전 완공식 연설 도중 벼락을 맞고 사라져…….>
<연기처럼 사라진 그리드……. 수백 대의 카메라 중 어느 한 대도 그의 모습을 쫓지 못했다.>
<(칼럼)새로운 신을 섬기는 인류에게 대악마가 내린 경고가 아닐까? 그리드는 필시 큰 페널티를 얻었을 것>
지존 그리드가 벼락을 맞고 사라지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세계 전역에 송출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를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리드 님은 무사하십니다. 단지 로그아웃하셨을 뿐이에요.”
중요한 대외 행사 중에 로그아웃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템빨국 측의 해명이 더 큰 소란을 부추겼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대악마의 저주를 받고 지옥에 끌려갔다는 둥 버그를 쓰다가 걸려서 계정이 정지당했다는 둥 별의별 추측을 쏟아 내기 시작했고, 이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때마침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의 불안한 증언까지 더해졌다.
“그리드가 애먼 신을 섬긴 탓에 여신의 분노를 산 거라고 고위 사제들이 수군거리더라고요.”
그리드가 사라지고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과연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드가 위기에 처했음을 점치고 있었다. 헥세타이아 신전의 건설이 그에게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했다.
<이번 사태는 지존 몰락의 신호>
급기야 이와 같은 추측성 기사들이 각국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였다.
***
‘이거…….’
퀘스트 실패 시 얻게 되는 페널티를 확인한 그리드가 당황했다. <지존도>가 마치 이번 승부를 대비해서 마련된 안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존도 획득 후 신과의 승부.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마치 하나의 에피소드인 양 자연스럽게 연계됐다.
패배해도 걱정할 것 없다. 그림이 그려진 시점으로 능력치와 스킬을 회귀시켜 주는 지존도를 사용하면 그만이니까. 누군가가 마치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삐까소는 플레이어야. 그 애가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일을 미리 알고 지존도를 그렸다는 건 말이 안 돼. 아니……. 가만?’
Satisfy의 자유도는 무궁무진하다. 플레이어들의 행동과 선택에 따라서 역사가, 세계가 움직였다. 일개 플레이어가 그린 그림 한 장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존도가 이번 에피소드를 발생시킨 원인 중의 하나 아닐까?’
헥세타이아가 내게 결투를 신청하는 지경에 이른 이유 중에는 내가 지존도의 주인공이 된 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포함된 것 아닐까?
결국 지금이 지존도를 사용할 타이밍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헥세타이아에게 지더라도 큰 페널티 없이 넘어갈 수 있어.’
그럼 져도 된다?
‘아니, 이긴다.’
퀘스트 보상은 말하고 있었다. 이번 승부에서 반드시 이기라고.
이는 그리드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래, 그리드는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헥세타이아 신이 질투를 버리게 만들고, <최초의 성검>의 저주가 풀리길 원했다. 여신의 축복을 2번 얻고 파그마의 검무와 대장장이 기술을 한꺼번에 강화시키는 것이 그리드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후우… 후우… 후우……!”
지금 내가 대면하고 있는 상대는 비록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신이다. 거성에 기거한다는 대악마들과 달리 초라한 오두막에 살고 있지만 그들보다 한 차원 위에 군림하는 존재다. 젖꼭지에 맺힌 불꽃과 열기가 그 증거였다.
그래, 헥세타이아는 여태껏 싸워 왔던 그 누구보다도 두려워해야 할 상대인 것이다.
상기하며 심호흡하는 그리드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하의 템빨왕이라고 해도 신을 상대로 끝까지 침착하기는 어려웠다.
헥세타이아가 말했다.
“너희들 괘씸한 인류는 이미 진즉에 잊은 일이겠지만, 여신의 뜻을 받든 나는 백만 도구를 창조하여 이를 지상에 전파하였다. 너희들이 평범하게 사용하는 식기와 농기 등의 일상품과 장신구 등의 사치품, 그리고 각종 병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탄생할 수 있었던 거지.”
“…….”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단순히 생색내려는 건 아닐 터다.
그리드는 헥세타이아가 승부의 규칙을 설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고, 이를 놓치지 않고자 철저히 집중했다.
“그래. 인류는 이미 내가 창조한 각종 도구들과 병기들을 곧이곧대로 따라 만들어 왔을 뿐이다. 한데 이를 마치 자신의 실력인 양 착각하고 뽐내는 놈들이 수두룩하지. 한낱 아류 주제에 ‘신을 넘보는 실력자’라고 추켜세워지는 놈들이 나타날 정도로……. 바로 네놈처럼 말이다.”
꽈드득!
이를 가는 헥세타이아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나는 나를 모방할 뿐인 네놈들이 추켜세워지는 꼴을 볼 때마다 배알이 꼴린다……! 멍청한 것들이 진정한 은인을 모른 채 저들끼리 득의양양하는 꼴을 보기 역겹다……! 하여……! 하여!!”
인류를 멸절시키고자 시도했다. 당대에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당대의 ‘신을 넘보는’ 대장장이는 다소 특이한 면이 있었다. 나의 공로를 만천하에 알리고, 나를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기뻤다.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감동을 느꼈다. 영겁을 존재한 끝에 최초로 느낀 감정이다.
헥세타이아는 그리드에게 깊은 감사를 품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자꾸만 의심이 생겼다. 수만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달리 대해 주는 인간이 나타났으니 의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의심을 풀고 싶다.’
헥세타이아의 진심이다.
헥세타이아는 그리드의 실력을 인정하고 싶었다. 이놈이 굳이 자신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굳건히 설 수 있는 인물이길 바랐다. 그리하면 놈의 선의가 진정한 것임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하여,
“네 실력을 증명해라……! 네놈이 단순한 아류가 아님을 증명해 보인다면 나는 너를 인정하고 신뢰하겠다……!!”
헥세타이아는 승부를 신청한 것이다. 자신의 아류에 불과한 인간 따위에게 뒤를 쫓기고 싶지 않다는 열망을 품었던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바람을 품은 채.
그리드는,
“좋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결투를 받아들였다.
“증명해 보이겠어.”
이제는 단순히 보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드는 자신이 힘겹게 쌓아 온 노력과 경험이 부정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기필코 전력으로 승부에 임해서 헥세타이아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좋은 자세다……! 자비를 내려 주마! 승부의 주제는 네가 정해라!”
검? 갑옷? 창? 아니, 나와의 승부 주제로 감히 무구를 선택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창조한 백만 도구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이 바로 무구였으니까!
그렇다. 헥세타이아는 그리드가 자신과의 정면 승부를 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그래 주길 바랐다. 그리드가 조금이라도 승산을 챙겨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데,
“검.”
“뭐……?”
그리드는 헥세타이아의 바람이나 예상과 달리 정면 승부를 택했다.
“누가 더 강력한 검을 만들 수 있는지 승부하자.”
“네놈 역시……!”
헥세타이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리드가 사실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였던 모습들은 전부 거짓에 불과했던 것이 분명했다.
치를 떠는 그에게,
“내 자신감의 근원은 당신을 무시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야.”
그리드는 설명했다.
“내가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노력을 믿는 거지.”
“핫……! 고작 10여 년 전부터 대장일을 배웠을 뿐인 티끌이 경험을 논하는가……!”
“10년도 내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어.”
일말의 과장조차 없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가 된 이후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 가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높이 오르기까지 더 악착같이 견디고, 노력했다.
“나를 상대하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야.”
가라앉은 눈으로 선언한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를 꺼냈다. 그리고 백린목을 꺼내 불을 붙이기 위해서 풀무질을 시작했다.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헥세타이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불 지피는 데만 한 세월이군. 자, 보아라. 이것이 신의 권능이다.”
가슴을 활짝 편 헥세타이아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신의 권능이라고?’
꿀꺽, 그리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신의 권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순간,
“하압!”
진중한 표정으로 기합을 내지른 헥세타이아가 검지와 엄지로 자신의 양쪽 젖꼭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왼쪽 젖꼭지에서는 청색의 불꽃이, 오른쪽 젖꼭지에서는 적색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분출되더니 그리드의 용광로로 날아가 백린목에 불을 붙였다.
활활활!!
그리드를 제외한 사람은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동대륙 최고의 목재가 쉽게 타오르자 그리드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용광로의 온도는 이미 그리드가 원하는 수준을 초과할 정도까지 상승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장장이 신의 권능…….’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다.
그런데…….
‘병X 같…….’
아니, 이러지 말자. 안 그래도 자존감 낮은 헥세타이아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생각을 접은 그리드가 꾸벅, 헥세타이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갓 핸드.”
4개의 황금 손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왜? 신을 상대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니다. 그리드가 대장일을 앞두고 갓 핸드를 불러 모은 이유는…….
화르르륵!!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와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이 합작하여 창조한 광물 <파브라늄>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드의 명령을 따라서 용광로 속에 뛰어든 갓 핸드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성장형 아이템으로 완성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리드와 함께하며 조금씩이나마 착실히 쌓아 올렸던 갓 핸드의 경험치가 모조리 소실되는 순간이었다.
‘무려 신과의 대결인데 손해는 감수해야지.’
쓰린 마음을 달래는 그리드.
사실 그에게는 믿는 구석도 있다. 현재의 실력으로 갓 핸드를 다시 제작할 경우 이미 수년 전에 제작한 기존의 갓 핸드를 초월하는 명작을 완성할 수도 있다는 믿음.
‘다시 부활시켜 줄게, 갓 핸드. 하지만 그 전에는 우선 망치와 검이야.’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가 제련과 담금질을 반복한 파브라늄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단련했다.
그가 제작하는 물건은 다름 아닌 망치다. 파그마의 기술과 브라함의 지식, 그리고 마법이 결합되어 탄생시킨 지상 최고의 광물로 대장장이 망치를 만든 후, 그 망치를 이용해서 검을 제작할 계획이었다.
“천천히 가도 되지? 이번 승부에 시간제한은 없으니까.”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헥세타이아에게 히죽 웃어 준 그리드가 빛의 정령을 소환, 빛의 검으로 변환시켜서 미스릴의 단련을 지시한다.
기술, 지식, 재료, 도구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막말로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최초’로 전력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파브라늄을 재료로 무구를 제작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콰앙-! 콰앙-!!
모루 위 파브라늄이 망치에 단련될 때마다 백광을 방출하였고, 이 빛은 일대의 황금빛 구름밭과 하늘을 잠시나마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강렬했다.
헥세타이아를 긴장시킬 정도로 화려한 광경이었다.
헥세타이아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리드가 자신의 신전을 건설한 이유, 단순한 아첨이 아니었음을.
‘진정으로… 진정으로 나를 존중하였던가……!’
독기로 충만했던 헥세타이아의 눈빛이 온화해진다. 디바인 스톤으로 제작한 망치를 꺼내 쥔 그가 존재한 이후 최초로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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