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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65화 (760/1,794)

템빨 42권 - 22화

과도하게 지친 것이 문제였다.

피로에 찌든 신체가 반사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눈가까지 차오른 한 방울의 눈물을 부정한 아그너스가 얼굴을 구겼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눈동자가 흔들림을 멈추고 날카롭게 번뜩이자 위협적이다.

“무슨 짓이지?”

아그너스는 자신을 부축하는 소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유페미나.

템빨국 개국공신 중 하나이며 발할라 건국에도 일조했던 템빨단 비장의 패.

그리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하나라는 소문이 자자한 그녀를 아그너스라고 모를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무무드를 노리고 있지 않던가?

한데 나를 돕는다고?

“영차.”

복제술사 유페미나의 근력 스탯은 마법사와 비견될 정도로 낮다.

그녀가 여태껏 복제해왔던 스킬 중에 ‘무기’를 도구로 삼는 물리 공격 스킬이 드물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성인 남성을 부축하는 일이 여간 힘들었다.

“끄응.”

털썩, 아그너스를 한쪽 벽에 기대어 앉히고 곁에 나란히 앉은 유페미나가 손수건을 꺼냈다.

“뭘 그렇게 노려봐요? 왜요? 당신도 땀 닦고 싶어요?”

“저리 치워.”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던 아그너스가 으르렁 거렸다. 광견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닌 듯하다. 유페미나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그가 재차 물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당신 바보에요? 뭘 자꾸 물어봐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당신을 도와주겠다고요.”

“....하?”

아그너스는 어이가 없었다.

유페미나와 대면하자 떠오른 히든 퀘스트 <해방을 바라는 무무드>의 실패 조건은 자신이 유페미나에게 살해당하는 것.

말인 즉, 유페미나 입장에서는 아그너스를 죽이는 것이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라는 뜻이다.

한데 그녀는 아그너스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마다하고 아그너스를 돕고 있었다.

왜?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뭐.... 쉽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치명상을 입혀봤자 리치화 해버리면 스태미나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거세게 저항했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네게는 그 짧은 저항을 무력화시킬 힘이 있지.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무슨 꿍꿍이냐?”

아그너스의 유일한 아군은 죽은 옛 연인뿐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겪어온 타인은 모조리 적이었다. 하물며 그리드의 최측근인 유페미나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눈을 게슴츠레하게 만든 유페미나가 혀를 내둘렀다.

“친구 없는 티내요? 사람의 선의를 왜 자꾸 의심해요? 그냥 옳다구나 받아들이면 되지.”

“네가 나였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럼요. 미녀에게 큰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순수하게 기뻐하면서 고개를 조아렸겠죠. 설마 미녀의 호의를 의심했겠어요? 저 같은 미녀는 대게 마음씨도 고운데?”

“꼬맹이가....”

“다 큰 아가씨한테 꼬맹이라뇨?”

유페미나는 20대 초반의 성인 여성이다. 하지만 150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키와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어린 외모가 콤플렉스였다. 꼬마라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 컸다고....?”

아그너스는 다짜고짜 흥분하는 유페미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애였다.

유페미나의 동그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다, 다 큰 건 아니고요! 아직 다 안 컸지만 어찌됐든 아가씨라고요! 꼬맹이 아니에요!!”

“.....”

어쩌다가 그리드의 측근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게 된 걸까.

상황 참 우습다.

쯧, 혀를 찬 아그너스가 회복 된 스태미나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꺼져. 나도 한 번은 살려줄 테니까.”

감사의 인사는커녕 도리어 선심 베푸는 입장인 것처럼 말하는 아그너스에게.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잘못 들었나요?”

유페미나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던졌다.

“말했죠? 당신이 돌을 세공하는 것을 돕겠다고. 생명의 돌 말이에요.”

“뭐....?”

“대가는 무무드를 해방....!?”

콰아아아아아앙!!

유페미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있던 자리가 폭발에 휩쓸린 까닭이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서있던 10채의 주택이 모조리 초토화됐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었다.

유페미나의 작은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비명은 폭음에 묻혔다.

“....그러게 꺼지라니까.”

머레이 왕국 수도 쥬덴.

세공사 장인 케서린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 된 아그너스는 쥬덴의 경비병들을 이미 여러 명 해치운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쥬덴에서 탈출해야했다.

하지만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순순히 포박을 받아라!!”

우르르, 마법으로 유페미나를 습격한 마법사들과 그들의 전위가 되는 기사들이 몰려와 아그너스를 둘러쌌다. 그들의 뒤로는 족히 백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의 평균 레벨이 높을뿐더러 병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

플레이어 혼자서 감당할 전력이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평범한 플레이어를 기준 삼았을 때의 이야기다.

“킥킥.... 내 앞에서 숫자는 무용지물이라고.”

콰득! 콰드득!!

아그너스가 밟고 선 지면의 블록들이 들썩인다 싶더니 후두둑, 무너지며 해골 병사들이 솟구쳐 나왔다.

“어...? 어억?”

“막아...!!”

갑자기 땅이 흔들리자 기우뚱했던 병사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칼을 휘두르는 해골 병사들을 목격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준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위협받았을 터였다.

“사악한 네크로맨서 놈....!”

기사 중 하나가 소리친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왕도를 침입해 민간인과 경비병들을 살해한 아그너스가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짙은 원한이 사무쳤다.

하지만.

채챙! 채애앵-!!

키야악! 키캬캭!!

쓰러지는 병사들의 시체까지 언데드로 만들기 시작한 아그너스에게 젊은 기사의 검은 도달하지 못했다.

해골 병사들을 장벽 삼아 몸을 지키는 아그너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실상은 노쇠한 요새였다.

퍼펑-! 펑!!

“킥....! 키킥!!”

연속적으로 진행 된 추격전 탓에 아그너스는 자원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스태미나뿐만이 아니라 마나까지 부족해서 다양한 마법을 응용하지 못했고, 또 정작 중요한 마법들은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었다.

마법사들이 계속 쏘는 마법에 해골 장벽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해골 병사들의 진격이 기세를 잃자 운신이 편해진 머레이 왕국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그너스에게 창과 칼을 찔렀다.

푹-! 푸푹!!

“....킥!!”

짜릿한 고통과 공포가 전두엽을 자극한다. 현실의 아픈 기억이 일시적으로 사라졌고 이는 쾌감으로 이어졌다.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일수록 아그너스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짙어졌다.

생명의 돌을 얻고 옛 연인과의 재회가 가까워지자 초조해지고 나약해졌던 광견이 본성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콰작-!! 콰자작!!

쿠콰콰쾅!!

“커억!!”

“이, 이 괴물....! 끄아악!!”

“캬하하....! 핫!?”

리치화를 믿고. 아니, 정확히는 앞뒤 계산 없이 광소를 터뜨리며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병사들을 학살하던 아그너스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검에 어깨를 꿰뚫린 까닭이다. 길고 날카로운 검이 아그너스의 어깨와 흉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27,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태이상 ‘내상’에 걸립니다.]

[물리적인 상처입니다. 상태이상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모든 자원 회복 속도가 30퍼센트 하락하고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하락하는 상태이상 ‘출혈(大)’이 동반 됩니다.]

“크윽....?”

광기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강력한 일격이다.

끔찍한 고통에 놀란 아그너스는 반사적으로 그리드를 떠올렸다.

템빨왕 그리드가 이 먼 나라까지 자신을 쫓아와 불의의 습격을 꽂아 넣은 것은 아닐까, 착각이 생길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그너스를 기습한 인물은 그리드가 아니었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하며 아그너스에게 꽂았던 검을 회수하는 사내, 중년의 나이였고 빛바랜 적색의 갑주를 무장하고 있었다.

“머레이의 왕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군.”

“오오....!!”

“싱클레드 경....!”

겁에 질려있던 머레이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환호한다. 치열했던 전장이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아그너스는 광대 신세였다.

‘누구지?’

상처 입은 광견이 불청객을 경계하는 그때.

“역시 여기에 계셨네요.”

“드디어 찾았군.”

두 명의 병사가 무대의 중심에 올랐다.

둘 모두 말단 병사의 행색이었다.

“그대들은....?”

적색 갑주의 기사 싱클레드가 경계하자.

“일개 병사.... 아니, 그대를 배신하고 그대를 불행에 빠뜨렸던 변절자다.”

병사 중 하나가 깊게 눌러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던지며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귀족처럼 기품 있게 생긴 병사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금색의 이름, 아스모펠이었다.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무표정하던 싱클레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네놈....! 아스모페에엘!!!”

“....???”

완전한 조역으로 전락한 아그너스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이게 뭐람.’

마법 폭발에 휩쓸렸던 시점부터 적진에 있는 아스모펠을 포착하고 몸을 숨기고 있던 유페미나는 혀를 내둘렀다.

또한.

“꼴을 보아하니 아직 칠악성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군.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건 크라우젤과 그리드이려나.”

아스모펠과 나란히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병사는 아그너스에게 다가와 이죽거렸다.

투구를 벗는 그의 이름, 하스터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황당한 전개가 여러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그리드가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혼돈의 도가니!’를 외치며 오늘 저녁 메뉴를 닭볶음탕으로 정했을 것이었다.

***

『....뇌 학습의 위력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Satisfy에서 습득한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의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게 되겠죠. 이는 딱히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수십 년 동안 연마해왔던 각계의 전문가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의욕을 상실할 것이며,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청소년들은 단기간 내에 발전한 본인의 어떤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회에 혼란을 야기....』

“배고파.”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TV를 튼 영우가 고개를 떨궜다. 강한 공복감에 휩싸인 그는 뉴스가 알려주는 온갖 소식을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미 한공우주국 나사에서 무게가 560억kg에 달하는 소행성을 포착하였습니다. 직경이 300m에 달하는 이 거대 암석은 현재 8만kph 속도로 태양을 돌고 있으며, 지구와 충돌할 경우 원자 폭탄의 몇 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힐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소행성 충돌까지 앞으로 5년이랍니다, 5년. 이건 말이 안 돼요. 나사의 기술력이라면 저만한 소행성의 접근을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파악했어야합니다. 나사가 정녕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저 소행성은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고 나타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

『....하지만 나사는 이번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을 4,500분의 1로 추정하고 있으며, 충분한 대비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흥분한 전문가들과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얽힌다.

“TV 꺼.”

귀에 박히지 않는 이야기가 거슬렸던 영우가 TV를 종료시킨 후 부엌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비추는 부엌은 최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도 흡족해하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구조와 규모, 그리고 도구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 선 영우는.

쏴아아-

냄비에 물을 받은 후,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후우....”

최고급 인덕션의 위력!

냄비를 올려놓자마자 팔팔 끓기 시작하는 물을 바라보는 영우의 한숨이 깊다.

“분신이라....”

유페미나가 귓속말을 받지 않아 잠시 휴식도 취할 겸 로그아웃한 상황.

영우는 새삼 긴장되었다.

결국 또 운에 의지해야할 만큼 강할 수도 있는 적을 상대로 동료들을 대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싶었다.

괜히 자신 한 사람 때문에 유라와 유페미나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녀들이 입을 페널티를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후루룩. 쩝쩝. 역시.... 혼자 가는 게 좋겠어.”

공복을 달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유페미나와 귓말이 되지 않은 것은 신의 계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라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생각을 정리한 영우가 꺼억, 시원하게 트림하고 가볍게 몸을 푼 후 다시 캡슐에 누웠다.

“그래, 결국 내 일이야.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혼자서 해결하자.”

눈이 감기고, 다시 떠졌을 때.

[Satisfy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우는 템빨왕 그리드가 되었고.

[지옥에서 당신의 위치를 포착했던 존재가 지상에 강림하였습니다.]

시스템은 그리드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

오싹.

그리드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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