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4화
Satisfy 시간으로 3년여 전, 유페미나가 <무무드의 영혼 해방>이라는 히든 전직 퀘스트를 얻었던 시점부터 이미 유페미나와 아그너스의 대결은 정해져 있었다.
아그너스의 강함을 인정하고 스펙 강화에 열중해 왔던 유페미나는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아그너스 사냥 계획을 세웠고,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하여 아그너스의 정보를 수집, 그의 강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스킬을 대륙 곳곳에서 복제해 왔다.
“연(聯).”
“쉴드 레인!”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파앗-! 파팡-! 파파파파파파팡!!
쩌정! 쩌저저저정!!
허공에 수놓이는 수십 줄기의 검광을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력의 방패로 막아 낸 유페미나. 맡은 바 역할을 다한 후 부서지고 흩어져 사라지는 방패의 파편들 너머로 그리드의 분신과 눈빛을 교환한다.
분신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 중이었다. 자신의 공격 스킬이 벌써 수차례나 무력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유일까?
‘아니, 단지 감정이 없는 거겠지.’
예기치 못한 전투를 진행 중인 지금, 유페미나는 그리드의 귓속말을 실시간으로 받고 있었다. 그리드는 분신의 탄생 배경과 특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유페미나는 그리드의 설명과 분신의 행색을 토대로 분신의 수준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자는 그리드 님보다 몇 배 이상 더 약해.’
지난 세월 동안 그리드가 성장해 왔듯이 분신 또한 성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래, 그리드가 예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와 분신의 능력치는 비슷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신이 무장하고 있는 장비들이었다. 녹슨 칼과 낡은 방어구들 모두 수년 전의 그리드가 사용했던 장비들이다. 현재 시점의 그리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템빨이었고, 이는 유페미나에게 큰 위협을 주지 못했다.
“삼겹갑 이전의 아이템들……. 옛날 템빨로는 날 이길 수 없죠.”
퇴물이라는 말이 있다.
대체 언제적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라는 말인가? 하물며 관리도 제대로 안 돼서 빛을 잃은 분신의 갑옷을 유페미나는 자신이 쉽게 파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파앗- 스파앗-! 스파아앗-!!
이번에는 유페미나가 먼저 공세에 나섰다. 언데드를 대량으로 소환하는 아그너스와 대적하고자 광범위 스킬을 다수 복제해 온 그녀의 공격은 화려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쾅-! 쿠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생성되고 떨어지는 수십 개의 낙석이 분신을 덮친다.
낙석 하나의 지름이 1미터를 가뿐히 넘겼으니, 하나의 낙석이 지상에 떨어질 때마다 대지가 흔들렸고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휘청거렸다.
“히, 히익! 피해!!”
“우와아아악?!”
‘이 틈에.’
대규모 마법의 여파로 발생한 혼란 속에서 유페미나는 낙석에 갇힌 분신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고자 시도했다. 어째선지 발할라에 머물고 있는 얼음술사 랭킹 1위 봉드레에게 복제해 온 <절대영도>를 전개하였다.
콰작-! 콰자자자자자작!!
낙석의 틈새를 기어서 빠져나오고 있던 분신의 전신이 빠르게 얼어붙는다. 마치 북극에 세워진 동상 같아 보였다.
‘마무리!’
콰르르르르르르릉!!
이번에는 벼락이 내리쳤다. 무신의 추종자 ‘칼’의 궁극기가 얼음이 된 분신을 강타했다.
유페미나는 그리드와 비슷한 능력치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분신이 이로써 모든 생명력을 소실할 거라고 판단했다. 이제 불사만 주의하면 무난히 승리하리라 보았다. 찰나의 착각이었다.
[대상에게 29,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어?’
데미지가 예상보다 안 들어간다? 족히 2배, 아니 3배 이상 데미지를 줬어야 정상인데?
앞서 떨어진 낙석들과 절대영도의 데미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쩌적-! 쩌저적!!
벼락에 얻어맞고 얼음의 속박에서 벗어난 분신이 낙석에서 빠져나오자 낙석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분신의 생명력 게이지가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유페미나는 분신의 생명력 게이지가 아직 10분의 9 이상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페미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는 퇴물인 줄 알았던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가 현재 시점에서도 충분히 사기적인 아이템이라는 점과 분신이 네임드 보스 판정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는 마법 데미지를 터무니없이 경감시켜 주었고, 분신의 생명력 단위는 최소 1,000만이었다.
‘피통 많은 그리드 님?’
사기잖아?
‘이거 못 이겨요.’
드물게 동요하는 유페미나에게,
쐐액-!
쇄도해 온 분신이 검을 날렸다.
평타, 평타, 평타였다.
채챙-! 챙! 채채챙!!
“……!?”
마력 방패를 소환해서 방어해 나가던 유페미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분신의 평타 모션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음을 캐치한 까닭이다.
발을 놀리고 있었다.
‘검무……!’
“극살(極殺).”
방어력을 무시하는 살상 스킬. 그리드가 자랑하는 최강의 융합 스킬 중 하나다.
막아 봤자 자살행위였다.
“윽……!”
분신보다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회피가 불가능했던 유페미나는 끝까지 아껴 둬야만 했던 비장의 패를 꺼내고 말았다. 텔레포트였다.
극살을 피하고자 그녀는 마력에 몸을 맡겼고, 극살은 허공만을 베었다.
파앗!
빛에 삼켜지며 사라졌던 유페미나의 작은 몸이 분신의 등 뒤에서 나타난다.
“흑풍참!”
“……!”
서걱!
유페미나의 손끝에서 발현된 바람술사 랭킹 1위 제드노스의 궁극기가 분신의 등을 크게 베었다.
선혈이 낭자했고, 진즉부터 유페미나에게 어그로가 끌려 있던 분신의 시선은 이제 그녀로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게 됐다. 머레이의 마법사들이 당장 소란을 멈추라고 위협하며 날리는 마법들 따위 고스란히 맞아 주며 오로지 유페미나만을 노려보았다.
“꿀꺽!”
유페미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본인이 최강자 중 하나라는 자각을 가지고 늘 어떤 강적 앞에서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던 그녀가 긴장하는 모습은 무척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간악한 괴물 녀석! 당장 전하의 가면을 벗지 못할까!!”
마침 구원자가 등장했다. 4개의 갓 핸드에게 견제당하고 있던 아스모펠이었다.
갓 핸드 4개를 동시에 경직시키는 데 성공하자마자 도약한 아스모펠이 벌써 몇 개의 주택을 무너뜨리며 지붕 위를 넘나들고 있던 분신에게 도달, 불꽃이 맺힌 검을 휘둘렀다.
츠카칵-!
“아스모펠 경……!”
유페미나의 귀여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피아로, 메르세데스 다음으로 템빨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콰작! 쿵!!
전대 적기사단 싱클레드와 사투를 벌인 후 자해까지 하여 온전한 상태가 아닌 아스모펠은 분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전히 분신보다 빠르기는 했지만 갓 핸드의 방해로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는 바람에 금방 제압당했다.
“크읍……!”
“안 돼……!”
분신이 아스모펠의 목덜미를 움켜쥐자 유페미나가 이를 악물었다.
아스모펠은 NPC. 플레이어와 달리 목숨이 하나뿐이다. 그의 죽음은 템빨국 전체에 큰 타격이 될 것이었고,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길 것이었다.
칸의 죽음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었는지 떠올린 유페미나는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분신의 어그로가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도록 유도했다.
콰쾅!! 콰콰콰쾅!!
마법 폭격이 시작됐다.
유페미나는 분신이 아스모펠을 해치지 못하도록 끊임없는 공세에 나섰고, 아스모펠을 손에서 놓친 분신의 시선은 재차 유페미나에게 향하게 되었다.
“질문.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보는가?”
“……!!”
성스러운 빛의 갑옷을 앞세워 마법의 폭격을 꿰뚫고 등장한 분신의 검이 유페미나의 목을 겨누고 꽂혀 온다.
“아……!”
패색을 엿본 아스모펠이 탄식했고,
“당연하죠!”
분신의 질문에 대답한 유페미나는 온갖 복제 스킬의 발동을 멈췄다.
그녀는 아직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던 자신 고유의 힘을 개방했다.
“흐르는 강.”
첨벙-! 첨버엉-!
칼날이 물에 잠긴다.
유페미나가 전개한 <흐르는 강>은 ‘마력을 물과 얼음의 형태로 전환시킬 수 있으며, 이를 원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 무무드식 수마법의 강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마법이었다.
철퍽-!
유페미나의 주위를 둘러싸며 허공에 생긴 물줄기를 분신의 녹슨 검은 꿰뚫지 못했다. 칼날이 물에 잠길 때마다 발생하는 물리적인 상태 이상 ‘위력 약화’와 ‘속도 저하’가 분신의 검을 진정한 의미의 녹슨 검으로 퇴락시켰다.
“저게 말로만 듣던 정령… 이라는 건가?”
지상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중인 플레이어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영웅처럼 등장해서 자신들을 구해 준 금발의 소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물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드가 소녀를 공격할 때마다 물줄기는 사방팔방 유연하게 흐르며 그리드의 공격을 막아 냈기 때문이다. 저게 말로만 듣던 물의 정령이 아닐까, 오해할 따름이다.
콰앙!
“헉……! 저, 저 여자애는……!”
분신은 자신의 상단 공격이 물줄기에 가로막히자 발을 날려서 유페미나의 하단을 공격했고, 강력한 발차기에 발목을 얻어맞은 유페미나는 균형을 잃고 지붕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지상에 내려온 그녀,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가깝게 포착되며 머리 위 아이디를 노출한다.
“유페미나……!!”
안 그래도 수준 높은 전투에 감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경악성을 토했다. 유페미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페미나는 수년 전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당시부터 그리드를 보필했던 그리드의 최측근 아닌가. 그녀가 그리드를 적대하고 싸우는 작금의 상황,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녹화 모드를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유페미나가 소리쳤다.
“저자는 그리드 님이 아니에요! 가짜라고요!”
나의 은인이.
내가 선망하는 자가.
나의 몇 안 되는 동료이자 친구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간절한 바람이 담긴 유페미나의 외침이 대중을 일깨웠다.
“…NPC?”
그래, 대중들은 이제 알게 됐다. 유페미나의 뒤를 쫓아서 지상에 착지한 그리드의 이름, 네임드 NPC를 상징하는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템빨왕 그리드, 머레이 왕국 침략!>이라는 제목으로 각국 포털 사이트 메인에 떴던 속보가 실시간으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파급력이다.
현재 머레이 왕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투는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실시간으로 녹화, 중계 중이었고, 이를 시청 중인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은 즉각적으로 기사를 작성 중이었다. 유X브 라이브 영상 순위가 온통 유페미나와 그리드의 대결로 도배되는 상황이다.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겨지는 기분이에요.”
얼굴을 붉힌 유페미나는 무무드식 수 속성 마법에 이어서 <마법 방어 무시 30퍼센트> 효과를 자랑하는 무무드식 무 속성 마법을 선보였다.
‘나의 전력을 노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국가대항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유페미나가 전 세계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전력을 노출하는 순간이었다. 아그너스를 비롯한 잠재적 적들에게 뻔히 불리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리드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콰앙-! 콰아아앙!!
무지갯빛의 마력이 폭사하며 분신의 진격을 저지한다.
머레이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등지고 선 유페미나는 분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리드 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어요. 내가 허락하지 않아요.”
“…판단. 정비가 필요.”
쾅! 쾅! 쾅!
쉬지 않고 발생하는 마법의 폭발 속에서 소형 모루와 대장장이 망치를 꺼낸 분신이 갑자기 망치질을 시작했다. 녹슬고 이 빠진 검을 수리하는 것이다.
본래는 실패작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청색의 대검이 완연한 모습을 되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생명력을 10분의 3 가까이 잃게 된 분신이었지만 유페미나에게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콰르르륵!!
상어의 모양을 닮은 푸른 대검이 유페미나가 몸에 두르고 있는 물줄기를 헤집고 나아가 유페미나의 가슴을 베었다.
“…윽!”
아프다. 치명상이다.
신검을 얻은 그리드는 이미 진즉에 버린 실패작,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와 마찬가지로 퇴물이기는커녕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뽐내고 있다.
피를 토하며 마법의 캐스팅을 멈추는 유페미나의 가녀린 목덜미로,
“결과. 승리.”
실패작이 떨어졌고, 유페미나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한데,
“……?”
실패작은 도중에 멈췄다. 유페미나는 죽지 않았다.
분신의 시선은 유페미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하늘 저편을 바라보는 분신이 작게 읊는다.
“죽인다. 그리드.”
끼이이이이익-----!!!!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을 가리며 떠오른 것은 거대한 주작이었고, 이어서 쏟아지는 불의 비 사이로 몇 발의 화살이 같이 날아왔다.
푹-! 푸푸푸푸푹!!
불의 비와 화살이 분신을 인정사정없이 덮치는 한편 유페미나와 아스모펠을 회복시켰다.
“매번 늦는 뻔한 전개, 이제 없다.”
스틱세이의 매스 텔레포트를 타고 등장한 이들, 그리드와 십공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