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5화
전화에 놀란 바다가 들썩인다.
쏴아아아아아---
파도가 위로 솟구쳤다. 높이, 더 높이. 태양이라도 덮칠 기세다.
“아……!”
갑자기 나타난 주작과 주작이 내린 불의 비의 여파로 끓어오른 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에 발생한 높은 파도에 이르기까지. 위협적인 장관을 순차적으로 목격하고 압도당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식을 뱉었다. 파도는 결국 닿지 못한 태양을 등지고 나타난 사람들 때문이었다.
“다행히 안 늦었네.”
후, 짧은 입김을 불어 장궁에 남은 열기를 식히는 적발의 여성. 요염한 자태로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드는 그녀가 바로 조금 전의 주작을 소환한 장본인이었다.
신궁 지슈카. 20억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활을 잘 쏜다는 인물이다.
“구경꾼이 많군. 죄다 죽여서 피의 제물로 삼는다면 저 괴물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레이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을 둘러보며 입맛을 다시는 동양인 사내. 그는 블러드 워리어 카츠였다. 유페미나, 아그너스와 나란히 최초 3인의 히든 클래스 전직자로 손꼽히는.
“유페미나가 일대일 승부에서 졌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가 아니었나 보군.”
장창을 세워 등을 기대고 있는 사내는 백마 기사 폰이었고,
“그리드 님의 말대로 분신이 엄~~ 청나게 강하다는 뜻 아닐까요? 너무 기대됩니다!”
눈을 반짝이며 건틀릿을 착용하는 금발의 미청년은 획득 난이도 SSS급으로 분류되는 노말 클래스 <아수라>의 유일한 전직자 레가스였다.
“여기서 내가 활약하면 대한민국의 위상을 더욱더 드높일 수 있겠군.”
후후훗…….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허리춤의 칼집을 쓰다듬는 사내는 단 2회의 발검으로 전대 <영웅>의 수급을 취한 극검.
“지금 당장 주군의 가면을 벗지 않으면 부모님 안 계시는 걸 인증하는 것으로 알겠다…….”
눈 한번 꿈쩍 않고 상대방의 부모님을 언급하는 패드리퍼 후로이.
“우선 내가 일대일로 싸워 보고 싶은데.”
대검을 뽑아 쥐며 의욕을 불태우는 사내는 전체 랭킹 1위에 빛나는 대검술사 크리스.
“방심하지 말아요.”
독보적인 미모로 자신의 주변 풍경을 잿빛으로 퇴색시켜 버리는 미인은 데빌 슬레이어 유라.
“야 씨, 저거 실패작 아니야? 몸빵 못할 거 같은데?”
혼자서만 지레 겁먹고 있는 사내는 대머리 반트너.
“큭… 크크큭! 벌써부터 당신의 절망이 느껴지는군요. 결코 이루지 못할 목적을 부여받고 태어난 당신의 덧없는 삶, 오늘 이 몸께서 파. 괴. 하고 안식을 선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글오글!
듣는 이의 손발을 오그라뜨리는 멘트를 지껄이는 청년은 라우엘.
붉은 비룡 위에 올라탄 채 등장한 그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지금 당장 한 팀을 꾸려서 국가대항전에 출전할 경우 모든 분야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을, 그야말로 각국을 대표할 만한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유페미나, 아스모펠, 둘 다 고생 많았다.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이만 쉬어.”
지잉! 지이잉!
홀로 떠 있는 백광의 검과 황금 칼날을 거느린 흑발의 사내가 있었으니,
“테, 템빨왕…….”
“그리드다!! 진짜 그리드야!!”
그를 알아본 대중들이 환호했다.
앞서 언급한 10명의 인물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파급력을 행사하는 거물 중의 거물. 지존, 그리드의 등장이었다.
쿠웅-!!
비룡에 의지해서 날고 있는 동료들과 달리 마치 마법사처럼 홀로 하늘을 날고 있던 그리드가 지상에 착지한다.
이때,
휘리릭-!
날카로운 파공성이 사람들의 귓가에 아주 어렴풋이 들려왔고,
“……!”
그리드의 분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얇고 투명한 실에 몸을 포박당했다.
은사(銀絲)였다. 동대륙 판게아에 서식하는 철갑귀들이 생산하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실!
“우리 사이에 대화는 필요 없지?”
딸칵!
일정 수준 이상의 레벨이나 저항력을 갖춘 대상은 은사의 속박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난다. 경험을 토대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드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곧바로 <땡기미>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르르륵-!
팽팽하게 당겨진 채 분신의 몸을 묶고 있던 은사가 느슨하게 풀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땡기미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푸우욱-!
은사 끝에 매달려 있던 <+1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칼날>이 분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2,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방어력 보소?’
거의 최소 데미지만 들어가는 것으로 봐서는 분신의 방어력이 무아지경의 칼날의 공격력보다는 위라는 뜻이 됐다. 분신이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를 무장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분신 고유의 체력 스탯이 최소 3천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철컥!
분신의 단단함을 확인하면서 은사 끝에 매달려 있던 무아지경의 칼날을 땡기미에 부착시킨 그리드가 곧바로 마법을 날렸다.
“매직 미사일!”
퍼펑-! 퍼퍼퍼퍼펑!!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분신과의 대결을 앞두고 그리드가 세운 작전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유라의 증언을 토대로 예상하건대 분신은 그리드보다 더 다양한 검무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검무 자체의 레벨이 높을 가능성이 컸다.
파그마의 검무의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이던가? 발동하기까지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리드는 분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임으로써 분신이 검무를 발동할 여력 자체를 주지 않을 계획이었다.
“노에! 랜디! 주,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우선 매직 미사일로 분신의 얼굴을 저격, 시야를 방해한 그리드가 각종 펫을 꺼냈다.
“니야옹!!”
“안녕.”
딱! 딱딱딱!
그리드가 3명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랜디가 곧바로 검무를 전개, 매직 미사일의 폭격을 당하고 있는 분신에게 살(殺)을 꽂았고, 뽀송뽀송한 백색 털의 노에는 짧은 팔다리를 활짝 펼치며 전격을 날렸다.
푸욱-!
파직! 파지직!!
[당신의 펫 ‘랜디’가 대상에게 4,1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당신의 펫 ‘노에’가 대상에게 6,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이 감전에 저항하였습니다.]
딱! 딱딱!
연신 턱을 맞부딪치며 눈빛을 교환한 템빨골 1과 2는 분신의 좌우를 점령하고 있었다.
<스켈레톤 파괴자>의 힘을 발동시킨 템빨골 1은 분신의 손목을 <초급자용 그리드의 레이피어>로 찌르면서 <해골 부수기>를 전개, 분신의 골절을 유도했고, 마땅한 공격 스킬이 없는 템빨골 2는 평타라도 날리면서 분신의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템빨골 1의 <해골 부수기> 스킬이 실패하였습니다.]
[템빨골 1이 대상에게 19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템빨골 2가 대상에게 23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콰자작!!
확률성 발동 스킬인 해골 부수기는 실패했다.
한데 그리드가 계속 쏘는 매직 미사일의 폭음 사이로 뼈가 부서지는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신이 휘두른 평타에 템빨골 1의 머리통이 날아가며 발생한 소리였다.
[템빨골 1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템빨골 2가 <해골 붙이기> 스킬을 전개합니다.]
[템빨골 1이 회복되었습니다.]
퍼석!
[템빨골 1과 템빨골 2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빨골아……!”
템빨골들의 레벨은 아직 한참 낮았다. 최소 그리드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레벨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분신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한 것이었다.
분신의 눈 먼 평타를 맞은 템빨골들이 허무하게 소멸해 버리는 그때,
“천톤 검!”
비룡에서 뛰어내린 크리스가 하강하며 궁극기를 전개했다.
벨리알의 뼈를 재료로 제작된 칠흑의 대검이 분신의 정수리를 강타했고, 분신이 밟고 선 지면은 이때 발생하는 무게를 감당 못하고 무려 50센티미터 이상 움푹 들어갔다. 분신이 마치 말뚝처럼 땅에 박힌 것이다.
하지만,
[대상에게 251,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분신의 몸을 통째로 양단할 목적으로 전개되었던 크리스의 궁극기는 분신을 양단하기는커녕 찰과상밖에 입히지 못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에 젖은 눈으로 크리스를 쏘아본 분신이 반격할 요량으로 검을 고쳐 쥐는 순간,
“부모님께서 낳아 주신 얼굴이 부끄럽다고 타인의 얼굴을 가면으로 쓰다니! 네놈은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더냐! 아! 부모 없다고!?”
하급 바람 정령의 힘을 빌린 후로이가 따발총처럼 빠르게 지껄이자 <도발> 스킬이 발동, 분신의 어그로를 끌어왔다.
찌릿, 분신은 여전히 비룡 위에 올라탄 채 얄밉게 지껄이는 후로이를 노려보았고, 그 탓에 크리스에게 반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푸욱-!
“그만 소란 떨고 썩 꺼져.”
폰의 장창이 분신의 등을 꿰뚫는다.
“광룡파!!”
퍼어어엉-!
레가스의 발경이 분신의 가슴을 강타했다.
“……!”
앞뒤로 동시에 전달되는 충격이 꽤 컸는지 입을 떡하니 벌린 분신은 비명을 삼켰다.
“파그마의 검무!”
동료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그리드는 최강의 스킬을 완성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연살파극(聯殺波極)!!”
푹-! 푸푹! 푹푹푹!!
강력한 살의를 담은 찌르기가 분신을 연속적으로 찌른 뒤,
콰작! 콰자자자자작!!
폭풍 같은 검기를 방출, 분신을 그 안에 가둔 채 수차례 벤다.
끝으로,
콰르르르릉!!
벼락 같은 베기가 떨어졌으니, 분신은 입과 가슴에서 검붉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대상에게 2,395,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압도적인 공격력!
그리드의 필살기가 분신의 방어력을 가늠하고 있는 크리스, 폰, 레가스를 모두 경악시켰지만,
“부족해……!”
정작 그리드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필 중요한 순간에 감감무소식인 <신장>을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동료들과 함께였다. 초조해할 필요가 없었다. 부족한 부분은 동료들에게 의지하면 됐다.
“내게 맡기라고.”
철컥-!
노에와 랜디가 출현했던 시점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발검의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극검. 끝까지 나서지 않은 채 <이야루그트집>에 <이야루그트>를 꽂아 넣고 기를 모으던 그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마력을 100퍼센트 충전한 <이야루그트>가 <도취> 상태에 있습니다. 자아를 상실하여 폭주합니다.]
[이야루그트의 사용 조건이 ‘제물이 될 자’로 변경됩니다.]
[이야루그트의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이야루그트의 공격력이 500퍼센트 상승합니다!!]
“섬(殲).”
서걱-!!
Satisfy에 존재하는 모든 스킬 중에 공격력과 빠르기로 수위를 다투는 <발검>이 붉은색의 검광을 그린다.
검광이 닿는 대상은 그리드의 분신이었다.
“……!!”
연살파극까지 굳건히 버티는가 싶던 분신의 신형이 흔들렸다. 어깻죽지가 크게 베인다 싶더니 그대로 한쪽 팔을 잃고 비틀거렸다.
“라우엘.”
“네. 풍룡의 격노.”
지슈카와 라우엘은 힘을 합치고 있었다.
흐름의 주인의 힘을 발동시킨 라우엘이 바람의 방향을 비틀었고, 불꽃을 머금은 지슈카의 화살은 강풍을 타고 날아가 분신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연속되는 공격에 직격당하고 난무하는 분신의 핏줄기를,
“블러드 토네이도.”
카츠가 지배했다.
이미 대지에 스며든 핏방울을, 아직 허공에 부유하는 핏줄기를 모조리 끌어모아 자원으로 활용한 그가 분신을 피의 폭풍 속에 가두고 난도질했다.
“주인!”
“그리드!!”
노에와 동료들이 그리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재촉하지 않아도 그리드는 이미 <연살파(聯殺波)>의 검무를 밟고 있었다. 피의 폭풍에 갇혀 있는 분신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따앙! 따앙! 따앙!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불길하다.
그리드는 서둘렀다. 하지만 늦었다.
콰작-! 콰드드드드득!!
<대장장이의 눈>을 토대로 그리드가 현재 무장 중인 장비의 정보를 확인한 분신은 <제작> 스킬을 활성화시켰고, 그리드의 장비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칸과 그리드의 비화가 담긴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가 <움직이는 요새>를 전개하면서 피의 폭풍과 연살파를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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