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80화 (775/1,794)

템빨 43권 - 15화

‘이게 무슨....’

‘나타나도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다니?’

하스터와 휴렌트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계획이 있었다.

하스터는 탈진 상태에 빠진 휴렌트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할 계획이었고, 휴렌트는 ‘전설이 될 자’의 칭호 효과를 토대로 하스터에게 반격할 계획이었다.

그래, 두 사람 모두 승리를 노리고 있었다. 각자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입장에 있었다.

한데 이때 불청객 그리드가 나타나 두 사람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건 완전히 노렸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드 탓에 승리의 기회를 놓친 하스터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어떻게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할 수 있었는가?

엿볼 수 있는 진실은 단 하나였다.

‘일부러 노리고 있다가 등장한 거야. 그게 확실해.’

하스터는 생각한다.

자신은 지존을 엿보는 최강의 인재인 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터였다.

‘그리드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스모펠에게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전달 받으면서 감시하고 있던 게 분명해.’

내가 오러 마스터 휴렌트를 꺾음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을 우려, 승리 직전에 나타나 훼방을 놓은 것이 정황상 확실하다.

‘....지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입인가. 과연 무섭군....’

하스터가 합리적(?)인 사고를 토대로 상황을 파악하는 그때, 휴렌트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곡해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나를 알고 있었나?’

휴렌트는 상기했다.

피아로는 그리드의 부하다. 그리드에게 자신이 겪는 많은 일들을 보고할 가능성이 높았다.

‘맞아. 그리드는 내가 지난 수 년 동안 템빨국 농부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을 거야.’

애초에 템빨국은 그리드의 나라다.

그리드가 본인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가능성은 적었다.

심지어 지금 당장 휴렌트와 하스터가 싸우게 된 경위까지 파악하고 있는 수가 있었다.

휴렌트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드, 너는 논밭이 망가진 데에 분노하고 있는 거지?’

이는 즉.

‘피아로 님 밑에서 힘겹게 논밭을 가꿔온 내 노고를 존중한다는 뜻일테지.... 그 예의바른 태도 또한 존중의 의미인 것이고.’

찌르르, 휴렌트의 가슴이 울렸다.

사실 그는 그리드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

당연하다.

그리드는 미국의 영웅, 혹은 희망이라고 불리던 자신을 단 5초 만에 쓰러뜨린 장본인.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강의 랭커였던 휴렌트는 그리드 탓에 명성을 잃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방황해야만 했다. 순전히 그리드 때문에 삶이 피폐해졌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휴렌트가 그리드에게 원한이 없을 리 만무했다. 휴렌트는 언젠가 반드시 그리드에게 설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부질없는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그리드는 내가 템빨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내가 성장해서 결국 자신을 노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나를 쫓아내기는커녕 묵묵히 지켜봐주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처럼 위기를 겪자 도와주러 달려왔고....’

정작 그리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너라는 남자.... 도대체 얼마나 마음이 넓은 것이냐.’

정녕 큰 그릇이다.

그 대단하신 피아로 님께서 그리드를 섬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깨달은 휴렌트는 과거에 집착해온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리드에게 설욕하겠다고?

굳이, 왜?

정작 그리드는 과거 따위 진즉에 털어내고 나를 지켜봐주고 있지 않았는가.

그래, 그리드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전 에트날 왕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레이단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했다. 용서했기에 나를 그저 묵묵히 지켜봐줄 수 있었고, 지금 이처럼 논밭이 망가진 순간에는 친히 달려와 나를 대신해 분노해주고 있는 거다.

이때 나 혼자 과거에 집착하며 그리드에게 설욕할 기회만 엿본다?

한심하다. 지독히 이기적이다.

‘그리드의 마음이 마치 바다 같다면 내 마음은 우물에 불과하군. 나는 참 작은 놈이다.’

모든 진실(?)을 엿본 휴렌트.

그는 본인이 부끄러웠고, 그리드가 존경스러웠다.

한동안의 침묵 속에서.

“그래서, 누가 배상하실 겁니까?”

그리드는 재차 질문해왔다.

족히 100평 규모의 밭이 외부인들의 사사로운 싸움 때문에 쑥대밭이 된 상황!

그리드는 템빨국 국왕 된 도리로써 간과할 수 없었다.

그는 농부들이 흘린 피와 땀의 가치를 알고 있었으니까.

‘어째서 휴렌트가 이곳에 있는 건지, 하스터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관계없어.’

저들이 왜 굳이 나의 영토에서 싸우고 있는 것인지, 나를 발견하고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피아로는 왜 이들의 싸움을 말리지 않은 것인지.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었고, 그리드는 배상 문제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연히 저놈이 변상할 겁니다.”

휴렌트는 하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놈이 당신의 밭을 망가뜨렸어요.”

“흐음....”

휴렌트의 설명을 듣는 그리드가 살짝 당황했다.

그리드는 당연히 휴렌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 제1회 국가대항전 당시.

표적 맞추기에서 내게 쓴맛을 보여줬던 미국의 최고 실력자.

비록 PvP에서는 5초 만에 그를 쓰러뜨렸다고 하나, 그리드는 단 한 번도 휴렌트를 우습게 생각한 적이 없다. 휴렌트의 강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휴렌트가 제(制)의 검무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드는 자신이 그렇게 쉽게 승리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방어력을 무시하는 고정 데미지를 자랑했던 휴렌트의 ‘오러’와 검무를 모조리 차단했던 휴렌트의 통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드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했던 아저씨, 휴렌트가.

‘지금은 내게 정중히 존대를....’

그리드는 이게 바로 예절의 힘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자신이 먼저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었으니 연장자인 상대방 또한 자신을 예의바르게 대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뿌듯했다.

하스터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내가 논밭을 망쳤다고? 끽해야 새싹 두 개를 밟은 게 전분데?”

맞다.

지금 당장 논밭이 쑥대밭이 된 원인은 휴렌트에게 있었다. 하스터를 괜히 오해한 그가 결투를 신청한 것이 문제였다.

한데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을 전가하다니?

하스터는 억울했다. 휴렌트의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이봐, 그리드. 괜한 트집 잡지 말고 남자답게, 의도대로 행동해라. 작금의 상황, 애초에 네가 의도적으로 만든 거 아닌가?”

꽈드득, 이를 간 하스터가 소리치자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인간은 계속 반말이네.’

예절에 예절로 호응하는 휴렌트와는 상반되는 인물!

하스터에 대한 그리드의 첫 인상은 최악이었다.

자기는 꾸벅, 고개까지 숙여가며 인사하고 경어를 사용했건만 하스터는 예의 없이 지껄였으니 불쾌했다.

이쯤 되니 휴렌트가 엄청난 신사처럼 보였다.

“후.... 그래....요. 당신에게 변상 받으면 되겠군.”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그리드는 논밭이 쑥대밭이 된 원인이 하스터에게 있다고 보았고, 그에게 사과와 배상을 청구했다.

“하스터 님? 당신은 멋대로 본국에 침입해서 소란을 일으키고 물질적인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반드시 변상하도록 하세요. 피땀 흘려 일해 온 농부 분들께도 사과하고요.”

“....계속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가.”

하스터의 확신이 깊어졌다.

지금, 자신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이들은 처음부터 한패였다.’

천하의 오러 마스터가 쓸데없이 농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겠는가? 그것도 하필이면 이곳 템빨국에서?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하스터는 휴렌트가 하필 지금 이곳에서 농부로 변장하고 있다가 자신에게 별 트집을 잡고 결투를 신청한 일 모두 철저히 계획 된 일이라고 보았다.

휴렌트 또한 템빨단에 가입한 것이며, 그리드의 명을 받아 행동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를 견제하는 한편 내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말이지....’

본인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람을 테스트하다니.

이게 바로 권력의 힘이라는 건가?

템빨왕 그리드의 저력에 큰 충격을 받은 하스터가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좋아. 그리드 너에 대해서는 파악했다. 아스모펠과의 동행이 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혼자 활동하며 전직 퀘스트를 수행해야겠군.”

“?”

뭔 소리야?

아스모펠이라는 이름은 갑자기 왜 튀어나오지?

그리드가 어리둥절해지는 그때.

타앗-!

힘껏 도약한 하스터가 허공을 여러 번 박찼다.

터엉-! 터엉!!

곡예에 가까웠다.

하스터가 허공을 박찰 때마다 파공성이 터졌고, 하스터의 몸은 1미터씩 앞으로 튀어나갔다.

“뭐야?”

변상하라니까 튄다고?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소리쳤다.

“저자를 체포해!!”

누구를 향한 명령인가?

허공의 하스터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자신은 이미 그리드와 휴렌트를 크게 따돌린 상태였고, 논밭 도처에는 죄도 농부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템빨단원들이 있는 것도 아닌 이곳에서 과연 그 누가 나를 붙잡겠는가?

‘그리드, 이번엔 내가 여러모로 당했다지만 두 번 다시는 방심하지 않겠다.’

보여주겠다.

네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견제할지라도 나는 굴복하지 않고 기필코 성장하여 지존을 노리고야 말겠다.

다짐하는 하스터의 측면으로.

“....!?”

퍼어어어엉-!!

2개의 불기둥이 솟구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상위 마법 파이어 월의 연속 발현이었다.

이미 휴렌트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하스터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큭....! 누가?’

파이어 월과 파이어 월 사이에 약간의 시간 차가 있었기에 망정이다.

덕분에 <용장>이 발동해서 목숨을 부지했지, 만약 2개의 파이어 월에 동시에 타격을 입었다면 그대로 사망에 이르렀으리라.

오싹해진 하스터가 시선을 돌리는 방향에.

“우물우물, 꿀꺽. 허, 멀쩡할 줄은?”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제 마법의 위력이 약했습니다.”

새참으로 삶은 감자를 씹어 먹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말도 안 되는....?’

이를 악 물고 도망치며, 하스터는 현실을 부정했다.

자신에게 죽음의 위협을 안긴 2개의 고위 마법이 농부들의 손끝에서 발현 된 거라니? 그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저들 또한 휴렌트처럼....’

그리드의 명령을 받고 농부로 위장 중인 최고의 실력자들일 터.

타앗-!

전력으로 질주하는 하스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리드,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던 거지? 너는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나를 붙잡은 뒤에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냐?’

당대의 지존, 전대 지존 크라우젤과는 확실히 다르다.

무력과 권력, 그리고 음흉함을 겸비하였으니 결코 쉽게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깨닫는 하스터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공포감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

그리드는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스터를 놓쳤기 때문이 아니라 곁에 선 휴렌트 때문이었다.

초롱초롱!!

나이가 최소 마흔은 넘었을 아저씨가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드는 무슨 영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다소 불쾌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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