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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87화 (782/1,794)

템빨 43권 - 22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임철호 회장의 코멘트였다.

임철호 회장은 50일 앞으로 다가온 제4회 국가대항전이 새로운 혁신의 장이 될 것이며, 이는 Satisfy가 추구하는 ‘플레이어가 만드는 세계’의 연장선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

“아고 죽겠네.”

캡슐에서 나온 신영우가 몸을 풀었다. 뚜둑. 뚜두둑. 뭉쳐있던 근육들을 이완시킨다.

“바람 좀 쐬고 싶은데...”

열흘 전 S.A그룹 본사를 다녀온 이후, 신영우는 4천왕으로 선발 된 자신의 가신들을 점검하기 위해서 단 한시도 낭비하지 않았다.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더 나은 아이템을 고안하며 대장일에 매진하였고, 이는 정신적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되어서 영우를 압박했다.

신영우는 심신의 안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섣불리 외출하기는 겁이 났다. 며칠 동안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한 이유와 같았다.

국가대항전에 불참하겠노라 선언한 자신에게 쏟아질 사람들의 비난과 분노를 영우는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무시와 멸시를 겪어온 영우는 욕먹는 일쯤이야 이제 익숙하다고 떠들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존중받아야한다. 비난에 익숙해질 의무 따위, 죄인이 아닌 이상에야 없었다.

“쯧.”

잠시라도 상념에 빠지면 이렇게 된다. 끔찍한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폐부를 찌르고, 목을 옥죈다.

이제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 영웅조차도 과거의 트라우마 앞에서는 무방비했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해야하는 이유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신영우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할 줄 알았고 적에게는 잔인할 수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우울한 감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신영우가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하. 좋다.”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며, 신영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더러운 오물 같은 옛 기억들이 숨에 실려 날아갔다. 영우는 눈앞에 펼쳐진 거리를 보았다.

대로를 사이에 둔 상가건물들이 서로를 마주본 채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도 적잖게 보였다. 낮은 고지에 세워진 공영주차장에는 꽤 많은 숫자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신영우의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황량한 땅이 이제는 활기로 들끓고 있었다. 영우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몰려들었던 사람들과, 그들을 노린 상인들이 찾아와 만든 새로운 번화가. 그리드가 아닌 신영우라는 인물이 세운 작은 업적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 드세요.”

감회에 젖어있던 영우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영우 건물의 세입자가 운영하는 카페 종업원이 음료를 건네 오고 있었다.

“이걸 왜....?”

“영우 씨가 마스크를 쓰고 계시길래. 혹시 감기라도 걸리신 건 아닌가 걱정돼서요.”

영우는 마스크 하나로 본인의 외모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마스크는 영우의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콧대를 도리어 부각시켰다. 애초에 이 근방의 사람들은 영우의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마워요.”

기껏 베풀어주는 호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찻잔을 건네받은 영우가 괜히 어색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월세는 안 깎아줄 거라고 사장님한테 전해주세요.”

“후훗. 네, 어차피 제 월급으로 사드리는 거라서.”

“저기.”

꾸벅, 인사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종업원을 신영우가 불러 세웠다.

“원망하지 않습니까?”

“뭘요?”

“제가 국대전에 불참할 거라는 기사 보셨을 거 아닙니까?”

아, 이 사람.

어째서 마스크를 쓰고 불안한 듯이 주변을 살펴보나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종업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마음이야 있죠. 매년 영우 씨가 활약하는 모습을 응원하면서 기쁨을 느껴왔으니까요. 그거 알아요? 제가 사는 아파트. 영우 씨가 국대전에 출전하는 날이면 주민들의 함성 소리로 들썩여요. Satisfy를 잘 모르는 우리 부모님과 할머니도 국대전은 꼭 챙겨보세요. 게임 규칙도 모르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가슴 조리면서 당신을 응원하죠. 우리 가족 모두 영우 씨의 팬이에요.”

“.....”

“저는 영우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은 우리 가족을 화목하게 만들어준 영웅이니까요.”

종업원은 영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친구와 친구의 가족들도, 친구의 친구의 가족들도 영우 씨의 팬이에요. 영우 씨가 국대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래서 설령 한국이 좋은 성적을 못 거두게 된다고 해서 당신을 원망할 사람은 그중에 단 한 명도 없어요. 애초에 영우 씨에게 국대전 참가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백 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는 듯이, 종업원이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SNS 계정으로 접속하더니 그리드와 관련 된 태그를 검색해 영우에게 보여줬다.

“봐요. 사람들은 오히려 영우 씨를 걱정하고 있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금메달 보상을 못 받고 손해 보면 타격이 심하지는 않을지 염려할 뿐이죠.”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리드로 인해서 한국이 피해를 입게 생겼다.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됐다. 라는 등의 이유로 그리드를 비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신영우는 도리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는....”

신영우가 마왕 역할극을 수락한 이유는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부재로 인해서 한국이 몇 개의 금메달을 놓치게 되고,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국대전 순위 혜택을 못 누리게 되는 일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일이었으니까.

신영우는 자기 자신과 템빨국을 위해서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 영우는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신영우 앞에 선 여인과 SNS 속 국민들은 신영우를 영웅이라 칭송하고 있었다. 신영우 또한 칭송 받는 일이 좋았었고, 즐겼었다.

‘자격도 없으면서.’

예상치 못한 죄책감에 휩싸인 신영우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무엇인가를 느낀 종업원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당신이라는 존재에게 위안을 얻어왔기 때문이에요. 일종의 감사 표시인 셈이지, 당신에게 어떤 짐을 짊어주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괴로운 표정 짓지 마세요.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누구에게도 당신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자격 없어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또 누군가는 그들을 비난할 거예요.”

종업원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그녀는 대다수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한데 라우엘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다.

신영우의 흔들리던 눈빛이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신영우가 느껴왔던 ‘애국심’의 본질은 군대에서 형성 된 것이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해서 싸워야한다고 주입 받은 만큼 막연하게 그렇구나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바뀌었다.

신영우는 이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이웃들이 살아가는 ‘국가’라는 터전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지 제대로 인식했다.

그럼 정해진 일은 하나다.

‘우선 템빨국을 지키고.’

내 나라와 백성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선사한 뒤에는.

‘조국의 영웅이 된다.’

영웅이라고 해봤자 게임에서 지존이 되고 국민들에게 볼거리와 자부심을 제공해주는 일.

딱 그 정도 수준의 일에 불과했다.

지금 신영우의 다짐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가소롭고 하찮다며 비웃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의 이야기다.

가상현실세계의 등장이 세상을 급변시켰듯이, 세상은 무엇인가를 계기로 언제라도 바뀔 수 있었다. 지금은 우스운 영우의 다짐이, 언젠가 또 바뀌게 될 세상 속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언령(言霊)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치우의 시험>은 절대자로 태어난 환국의 양반들에게 몇 안 되는 시련이자 유희였다.

양반들은 100년에 한 번씩 시험을 치렀고, 낯선 번민에 휩싸인다. 그리고 번민을 극복할 때마다 재능의 개화를 맞이했다.

양반들 스스로는 ‘권능’이라고 칭하는 재능이었다.

“후우... 후우....”

간신히 시험을 통과한 사내는 피칠갑이었다. 상투가 풀려 산발이 된 그의 눈동자에는 강렬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오존(五尊)은 걱정하지 않았다.

“양반은 온 누리를 바로잡기 위해서 존재하는 바.”

“가람이여, 네가 살생의 길을 택했다면, 이는 즉 누리가 살육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니라.”

“살생으로 탄생의 순환을 도와라. 누리를 위한 일이다.”

“너의 살의가 잠재워질 때, 온 누리에 평화가 내릴지니.”

오존 중 넷이 가람에게 조언했다. 오직 단 한 명 한울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게 가람이 질문했다.

“한울이시여. 파그마를 기억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오존들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렸다.

태초부터 동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환국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던 이단아.

급기야 우민과 양반은 서로 평등해야 옳다고 외쳤던 돌연변이는 오존들에게도 썩 불쾌한 기억이었다.

단, 한울과 오존들 아래 정좌하고 앉은 치우만큼은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억한다. 너의 그 곰방대도 파그마의 작품이 아니더냐.”

순간.

콰자작!

허리춤에 꽂아놓고 있던 곰방대를 꺼낸 가람이 그것을 한 손으로 부셔버렸다. 그리드의 검조차 막아냈던 곰방대가 가루가 되어서 바람에 흩어졌다.

“놈이 죽었습니다.”

“....”

오존들의 반응은 덤덤했다.

환국을 오랫동안 떠나있는 양반은 영생을 잃는다는 사실,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파그마의 죽음은 예정 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가람의 말에는 그들도 제법 놀랐다.

“그리고 놈은 죽기 전 자신의 하찮은 잡기를 우민에게 전수하였죠.”

“우민에게 권능을...?”

전승과 계승은 환국의 금기다.

권능의 개화는 양반의 유일한 노력.

양반에게 있어서 권능이란 자신의 상징체였고, 그것을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빌리는 행위는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파그마의 권능을 이었다는 우민이 누구냐?”

“당장 놈을 찾아 멸해야한다. 양반과 우민 사이에 접점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

오존들의 얼굴이 대춧빛으로 물든 것을 확인한 가람이 한울을 보고 말했다.

“저는 놈을 압니다. 놈은 서쪽 땅의 왕을 자처하였습니다. 한울이시여, 적해를 갈라주시옵소서. 수천 년 전 우리에게 버림받은 서쪽 땅의 짐승들과 놈들의 왕을 제가 벌하겠나이다.”

“안 될 말!”

오존 중 풍사가 버럭 소리쳤다.

“서쪽 땅은 온갖 간악한 신들에 의하여 오염 된 곳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게 되면 너 또한 타격을 입고 권능의 일부를 잃을 것이다!! 단지 서쪽 땅을 밟는 것만으로 영생을 잃을 수도 있느니라!!”

“....”

가람이 짐짓 놀랐다.

오래 전 오존께서 버리신 서쪽 땅이 설마 그토록 오염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영생을 잃을 수도 있다...

풍사의 예상치 못한 경고가 가람의 마음속에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분노가 그 두려움을 집어삼켰다.

파그마의 잡기를 쓰는 우민에게 입었던 ‘작은 상처’를 떠올린 가람이 꽈드득, 이를 갈았다.

“제 한 몸 희생하여 누리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것입니다. 부디 적해를 갈라....”

“적해를 건너는 것은 네가 아니다.”

한울이 가람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그의 ‘시야’가 적해와 맞닿고 있는 도시 판게아를 살폈다. 도시는 텅텅 비어있었다.

“적해를 건너는 건 저들이다.”

한울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히든 퀘스트★ <하늘의 부름>이 생성되었습니다.]

수십, 수백만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알림창과 마주했다. 그중에는 템빨단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장장이라는 점이다.

국가대항전까지 50일.

Satisfy 시간으로 150일 남은 시점에서 지옥보다 잔혹한 땅이 아가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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