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8권 - 6화
“전하께서 길드원 한 명, 한 명에게 격려의 말도 좀 해주시고요.”
“응, 그래.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템빨단원의 숫자는 900명이 넘는다. 이번에 새로운 포병들이 온다니 1,000명을 넘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격려를 건네라니?
한 마디씩만 교환해도 족히 몇 시간은 걸릴 중노동인데?
“그게 뭔 시간 낭비야?”
그리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라우엘이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기왕이면 상대방의 형편에 맞는 아이템을 만들어주겠노라 약속도 해주시고요.”
“뭐라고? 내가 길드원 전부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걔네들 형편을 일일이 살펴서 아이템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맞아요. 전하께서는 길드원 전부를 모르시죠.”
“...그, 그건 애초에.”
라우엘이 무엇을 꼬집고 있는지 눈치 챈 그리드의 말문이 잠시 닫혔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도 핑계거리는 있었다.
“애초에 길드 관리는 네가 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나도 길드원을 늘리자는 네 의견에 동의했던 거고.”
내가 일일이 길드원들에게 신경을 써야했으면 길드원을 늘릴 일도 없었다.
이제 와서 내 무심함을 비난해봤자 난 당당하다.
“나는 레벨 올려서 강해지고 아이템 만드는 데만 열중하라며? 근데 이제는 길드까지 신경 쓰라고?”
바쁘다. 귀찮다. 시간 없다.
이런 핑계들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나는 너랑 달라서 능력이 안 된다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없어. 한 가지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
짜증스레 말하던 그리드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일?
함께하는 동료들의 면면을 기억하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행위를 ‘일’이라고?
그리드는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신입 템빨단원들을 얼마나 소홀히 생각해왔는지 깨달아버렸다.
‘기본예절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런 주제에.
계속 그래왔던 주제에 나는 그들이 템빨단과 템빨국을 위해서 힘써주길 바라왔다다.
그들이 내 동료라고 외쳐왔다.
내 입장에서는 고작 싸구려에 불과한 아이템들을 빌미로.
화끈-
그리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길드원들에게 미안했다.
떨리는 그의 눈빛을 엿본 라우엘이 손사래 쳤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어요. 지금은 힘든 시기 아닙니까? 저는 이럴 때야말로 길드원들에게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낄 계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전하를 비난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
“아니. 나는 손가락질 당해도 싸.”
지난 수년 동안 템빨단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는 단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소름끼칠 정도로 불손한 의도를 품고서 템빨단에 접근하기도 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그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선별해서 현재의 템빨단원들을 모은 사람이 바로 라우엘이다.
그의 피와 땀, 눈물, 콧물이 모여 이룬 결과를 그리드는 당연한 권리인양 받아들여 왔다. 그의 노력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동료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바뀔 수 없다더니.”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었구나.
깨닫는 그리드의 입가에 쓰다 못해 서글픈 미소가 걸린다.
“저, 전하.”
그리드가 고개를 들지 못하자 라우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 그래도 가장 바쁜 사람에게 큰 부담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괴로웠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그리드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좋아. 이참에 모두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도록 하자.”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맑게 변해있었다.
포병대 창설일까지,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고마운 동료들의 면면을 모조리 기억하리라.
다짐하는 그리드는 며칠이고 밤을 샐 각오였다.
왕, 전사, 대장장이, 재단사, 가장이라는 역할에 이어서 길드 마스터의 역할까지....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지만, 뭐든지 해봐야 아는 법이다.
그리드는 자신의 끈기와 열정을 믿었다.
***
밤에는 직계 뱀파이어와 어쌔신들이.
낮에는 템빨단의 최상위 랭커들과 자이언트 웜들이.
제국군은 사막을 횡단하는 내내 적의 습격을 받았다. 행군 속도가 무척 더뎠고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어 피로도가 크게 누적됐다.
특히 사막의 지형과 온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군마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다. 기병대는 기동성과 파괴력을 상실해갔다.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어젯밤만 해도 359명이 탈영을 시도했어요.”
“적군의 상태도 우리와 썩 다르진 않을 거요. 적들이 기습을 가해올 때마다 우리 또한 제대로 대응하고 많은 적을 사살하지 않았소?”
“그렇소이다. 서로 똑같은 피해를 입어도 병력의 우세는 우리 쪽에 있으니 템빨군이 받는 심리적 압박이 더 클 거요. 우리 군에 359명의 탈영병이 있었다고? 그럼 템빨군에는 1,000명의 탈영병이 생겼을 테지.”
“너무 낙관적인 해석입니다. 저들에게는 든든한 성벽과 풍족한 식량이 있는 반면 우리에게는 얇은 막사가 전부고 당장 마실 물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제국군은 본래 이틀 내에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무리 행군 속도가 느려도 레이단 성의 위치가 멀지 않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계속되는 적의 출현 탓에 이틀은커녕 나흘 이상 걸리게 생겼다.
아니, 굳이 진군을 고수했다가는 사막 한가운데 고립된 채 말라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식수의 부족이 문제였다.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가 독에 오염 된 상태.
제국군은 수십 만 병력이 먹을 식수를 오로지 수송대의 공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수송대라고 어디 쉽게 사막을 건너오겠는가?
템빨군이 수송대를 순순히 보내주겠는가?
“....”
제국군 사령관의 막사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어느 젊은 귀족이 모두를 대신해서 말했다.
“일단 퇴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질책하는 이 또한 없었다.
용기를 얻은 젊은 귀족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모인 수십만의 군대는 비교적 실전 경험이 부족합니다. 사막이라는 지형을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 탓에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죠.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온갖 전쟁에 참여했던 제국의 정예 군단들은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당장 칠공작 전하들의 군대만 해도 물 만난 고기처럼 사막을 횡단할 테죠.”
“일단 군대를 사막 바깥까지 물리고 정예 군단의 도착을 기다리자 이건가?”
“네.”
“.....”
레이단 국경에 집결한 수십 만 제국군.
최대 28만이었으나 현재는 23만까지 줄어든 그들의 임무는 템빨국 정복이 아니다.
공군이 템빨국에 잠입해 주요 거점을 탈취할 때까지 적군의 시선을 끌고 발을 묶을 것.
딱 그 정도의 역할만을 부여받았다.
한데 이미 천공왕 리갈과 공군은 전멸했다는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단으로 진격했던 이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서였지만, 욕심을 부리다가 가문의 병력을 모조리 잃게 생겼다.
지금은 신중해야할 때다.
“으음....”
사령관 풀바즈 후작이 침음했다.
독기를 품어도 부족할 판국에 퇴각 명령을 바라는 귀족들의 시선이 그는 마음 아팠다.
제국이 언제부터 이리도 약해졌단 말인가.
지난 수 백 년, 마땅한 적수도 없이 대륙의 패자로 군림했던 제국은 사냥하는 방법을 잊은 맹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국에 겁쟁이는 필요 없어.”
푸화학-!
“....!”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싶더니, 천막에 핏물이 번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3개의 머리는, 조금 전까지 후퇴를 주장했던 젊은 귀족들의 것이었다.
“디, 디워스 공!”
질색한 풀바즈 후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를 쫓아 자리에서 일어난 귀족들과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기름에 떡이 저 산발이 된 머리와 후줄근한 차림새.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은 대춧빛으로 달아올라 있다.
제국 귀족들의 목을 베고도 태연히 술병을 기울이는 그 거지같은 사내의 정체는 취공(醉公) 디워스.
제국의 칠공작 중 하나였다.
“저, 전하를 뵈옵니다!”
사색이 된 귀족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 하나 디워스의 살인을 비난하지 않았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자에게 감히 누가 엄한 소리를 하겠는가.
심지어 풀바즈 후작조차도 말문을 잇지 못한 채 치를 떨 뿐이다.
힐끔, 후작의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한 디워스가 피식 웃었다.
“이딴 쓰레기들을 죽인 게 그리 화낼 일이오?”
“그들 또한 대사하란 제국의 귀족이외다. 그들에게도 황제폐하께서 내려주신 영토와 백성이 있고 병사가 있소... 천하의 디워스 공이라 하셔도 원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오.”
“글쎄. 내가 볼 때는 무능한 신하이며 영주인 이들의 죽음을 사람들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디워스가 좌중을 둘러보자, 히끅 놀란 몇 몇 귀족과 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한 디워스의 난폭함은 같은 칠공작들 또한 꺼려할 정도였으니 백작 미만 하급 귀족들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못했다.
저벅저벅.
디워스가 상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숨 쉬고 있는 풀바즈 후작으로부터 지휘봉을 빼앗더니 외쳤다.
“놈들은 감히 제국의 공작을 시해한 역적이다.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개밥으로 줘도 부족할 판국에 감히 후퇴를 논하는가!!”
쩌렁쩌렁!
술기운을 머금은 강력한 마력이 막사를 진동시켰다.
막사 안 귀족들과 기사들은 순식간에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며 휘청거렸다.
오직 다섯 사람.
풀바즈 후작과 4명의 백작만이 술기운을 몰아내며 온전히 서있을 수 있었다.
디워스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지는 그때.
“저, 적입니다!”
기사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적장 크리스가 단기필마의 기세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한 놈? 한 놈이라는 말이냐?”
방금 술기운을 분출했기 때문인지, 혈색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디워스가 맑은 눈으로 물어왔다.
그를 알아보고 기겁한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곧 해가 지는지라...!”
“해가 지는데 뭐?”
무슨 말을 하려는가?
디워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어떤 변화가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쿠르르르릉-!
격동하는 대지.
출렁이는 천막.
겁에 질린 병사들의 비명.
피부를 저리게 만드는 강렬한 마력.
끝으로 이어지는 피 냄새.
“뱀파이어!”
무엇이 등장했는지 빠르게 파악한 디워스가 막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하늘 위, 아름다운 소년이 뾰족한 어금니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포식해주마!!”
쿠와아아아앙!!
혈빛 마력이 사막을 뒤덮는다.
착취의 성질을 지닌 마력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미처 산개하지 못한 제국의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라처럼 변해가는 그들의 몸에서 피가 뽑혀 나와 하늘 위 소년에게로 운반되었다.
“크하하하하!”
뱀파이어 소년, 놀.
배가 터질 정도로 폭식하고 기뻐 웃는 그의 얼굴에 기름이 반질반질하다.
먹어도, 먹어도 끝나지 않는 만찬에 그는 극한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은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웁....!”
마력을 타고 올라오는 피를 마음껏 포식하며 기뻐하던 놀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배를 움켜쥐었다. 눈처럼 희던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떨리는 적안이 지상의 한쪽을 포착한다.
나의 마력이 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착취해온 발원지.
그곳에는 손에 술병을 든 채 몸을 흐느적거리는 인간 하나가 서있었다.
취공 디워스였다.
“한 잔 마시고 취한 거야? 꼬맹이라 술이 약한가?”
터엉-!
디워스가 도약했다.
허공을 답보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병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 했다.
꽈아아아앙-!
병사들은 그저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울린다 생각했을 뿐이고.
쿠당탕탕!!
이어서 지면에 추락한 소년 뱀파이어의 모습을 보면서 저 괴물이 천벌을 받았다 여겼다.
꽈드득!!
디워스의 까칠까칠한 손이 놀의 얇은 목을 거머쥔다.
버둥버둥.
초월적인 악력에 붙잡혀 일으켜진 놀의 발이 허공을 찬다.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소년의 얼굴을.
콰작!!
디워스가 술병으로 후려쳤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놀의 얼굴에 상처를 남겼고, 향기만으로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독주가 놀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었다.
“신목의 뿌리로 담근 술이라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나본데.”
킥킥 웃은 디워스가 새로운 술병을 꺼내 한 번에 들이켰다. 다시 불콰하게 취한 그의 얼굴이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춧빛을 띄운다.
“그 손 놔라!!”
놀이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적진을 휘젓고 있던 크리스.
금방 퇴각할 계획이었던 그가 적진 깊숙이 달려오고 있었다.
놀의 이변을 눈치 채고 제국군 한가운데까지 돌진해 들어온 것이다.
“천톤 검!!”
쿠와아앙-!
낙타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종베기.
플레이어 최고의 대검술사가 시전하는 궁극기가 디워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기세만 보아서는 디워스를 통째로 양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슬쩍.
흐느적거리며 상체를 숙인 디워스는 너무나도 쉽게 크리스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이어서 기이한 각도로 발차기를 날려 오니, 안면을 얻어맞고 눈앞에 별을 본 크리스는 그대로 낙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큭...! 쿨럭...!”
한 대 맞고 죽는 줄 알았다.
무시무시한 공격력에 위축된 크리스는 후회했다. 내가 미쳤다고 적진 한가운데까지 달려와서 죽음을 자처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놀...!’
디워스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놀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후회?
없다.
나는 죽어도 된다. 놀을 구해야한다.
결의를 다진 크리스가 세컨드 클래스 <폭군>의 힘을 끌어올렸다.
황금색 이름을 자랑하는 <취공 디워스>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보고도, 그는 망설임 없이 대검을 겨눴다.
디워스가 끌끌 웃었다.
“바로 일어날 줄이야. 그것 참 터프한 녀석이로다.”
크리스도 피식 웃었다.
“그리드한테 맞았으면 못 일어났을 텐데. 네가 좀 약하네.”
“그리드...?”
“템빨왕 전하 말이다.”
“....템빨왕 따위를.”
디워스의 얼굴이 흉악하게 구겨졌다.
제국의 위대한 공작을 한낱 소국의 왕 따위와 비교하는 눈앞의 정신 나간 놈을, 그는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네놈 따위가 감히 나의 주군을 비하하는가.”
그림자 속 어떤 인물 또한 디워스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스파앗-!
스파아아아아아앗!!
전장 곳곳에 드리운 수십만 개의 그림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새 조국을 위해 싸우며, 옛 조국의 원한을 갚겠노라!”
콰르릉!
콰르르르릉!!
그림자의 창과 칼이 전장을 난도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