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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96화 (891/1,794)

템빨 48권 - 21화

300명의 기사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단 수초 만에 추종자를 없앤 그리드의 무위에 진심으로 경탄했다.

‘그렌할 전하께서 저자를 존중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기사들은 그렌할의 태도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왔다.

아무리 열쇠가 필요해도 그렇지 그리드는 적국의 왕이다.

심지어 천공왕 리갈을 시해한 역적.

한데 그렌할은 그리드에게 깍듯했고 은근한 호감까지 표했다.

도대체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던 것이다.

템빨왕 그리드는 소문 이상의 강자였다.

그렌할조차도 추종자 하나를 잡는데 수십 합을 겨루건만, 그리드는 단 몇 수만에 추종자를 사냥해버렸다.

칠공작 이상의 강자!

기사들은 그리드의 무위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제국 밖에 저만한 강자가 버티고 있었다니...

혹시 저자가 무패왕의 재림이 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근심이 될 지경이다.

십공신들도 난리가 났다.

인간형 일반 몬스터의 치명적인 약점이 ‘적은 생명력’이라고는 해도 추종자의 레벨은 400이 훌쩍 넘을 터.

그런 괴물을 스킬 한 방과 평타 몇 방으로 쓰러뜨린 그리드의 전투력은 불과 몇 달 전과 비교해도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십공신들은 그리드의 끊임없는 발전에 존경심마저 느꼈다.

특히 휴렌트의 충격이 컸다.

‘난 저거 한 마리 잡으려고 스킬을 다 소모했었는데....’

휴렌트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십공신들과 달리 고위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칠공작들과 합석한다는 게 다소 무리가 있었고, 그보다는 해안가를 둘러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인족 도시 세이렌에 농사를 지은 피아로는 말했었다.

모래에서 바닷물을 먹고 자라는 농작물을 창조했다고.

충분히 검증한 후 내게도 모종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아름다운 해안가에서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휴렌트는 그런 감상에 젖은 채 해안가를 둘러보았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감상에 젖는 것도 사치였다. 그 시간에 수련을 했어야 옳았다. 잠시라도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가는 평생 그리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는 근심이 생겼다.

한편.

“.....”

칠공작들은 크게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추종자를 쉽게 해치운 그리드의 무위를 보고도 전혀 감탄하지 않았다.

마침 그리드도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주는 경험치가 너무 적은데?’

300레벨짜리 잡몹을 잡았을 때 얻을만한 경험치.

추종자는 딱 그만큼의 경험치만 주고 떠났다.

이상한 일이다.

“....!”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그리드가 황급히 검을 곧추세웠다. 마침 날아온 주먹이 <신을 겨누는 검>의 황금색 검신과 충돌했다.

쩌어엉-!

격렬한 폭음.

그리드의 두 발이 허공에 한 뼘 뜬다.

날아온 주먹에 깃든 힘이 그리드의 근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증거였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검에 맞물린 주먹을 밀쳐낸 후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그리드를 덮쳐왔던 무신의 추종자가 팔꿈치를 내렸다.

꾸욱.

추종자의 팔꿈치가 그리드의 무릎 위를 눌렀다. 그 탓에 그리드의 다리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고 발차기가 무위로 돌아갔다.

“너....?”

추종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리드가 경악했다.

얼굴 생김새와 특징이 조금 전 자신이 없앴던 추종자와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의문을 느끼는 순간.

스파앗-

추종자가 2명, 3명, 4명, 5명으로 나뉘었다.

분신술이었다.

최초에 그리드를 덮쳤던 추종자는 이 녀석의 분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분신술을 익힌 추종자들은 처음 등장할 때 분신을 미끼로 던져서 상대방을 방심시키곤 하지.”

그렌할이 중얼거렸다.

무신의 추종자는 먼 옛날 칠악조차도 위협했다는 절대지경의 강자.

물론 신화 속 추종자들은 5개가 아닌 수십 개의 비급을 익히고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5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들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을 단 수 초 만에 없앤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칠공작조차도 진심전력을 다한 궁극의 기술을 전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렌할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그리드가 과연 어떻게 대처할지 잠자코 지켜봤다.

어떤 공적을 세움으로 인해서 영웅왕이 된 그리드.

과연 그에게 영웅 중의 영웅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렌할은 귀족이기에 앞서 무인으로써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할 터.’

추종자들이 익히고 있는 분신술은 기존의 분신술과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기존의 분신은 ‘본신의 능력치를 30퍼센트 이내’ 수준으로 재현하여 존재감이 다소 약한 반면 추종자들의 분신은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순간적으로 ‘본신과 능력치를 교환’하는 특성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교환이기 때문에, 분신이 강해지는 순간 본체의 능력치는 하락하여 허를 찔릴 경우 위험에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었고 그 약점을 공략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분신과 본체의 생김새와 기운에는 차이점이 없다. 기감이 아무리 발달한 사람이라도 본신을 찾아서 저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렌할은 5개의 분신에 둘러싸인 그리드가 작금의 위기를 과연 어떻게 타개할지 궁금했다.

참고로 분신술을 사용하는 추종자와 처음 싸웠을 때 그렌할은 4분, 모르이즈는 5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을 정도로 애를 먹었었다.

“....음?”

그렌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안대에 가려진 그리드의 왼쪽 눈에서 푸른 불꽃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동시에.

퍼펑-!

퍼퍼퍼퍼퍼퍼펑!

“....!?”

그리드를 둘러싸고 있던 분신들이 모조리 폭발하며 사라졌다.

“뭐야, 뭐야? 저건 무슨 능력이야?”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반복하던 모르이즈.

당연히 그리드를 하수로 여기며 그리드의 전투에 별 감흥을 보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분신을 허망하게 잃은 추종자 또한 당황하는 눈치였다.

무신의 추종자는 구도자.

궁극의 무를 이루기 위해서 감정마저 버린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그들이 당황하는 모습은 칠공작들에게도 생소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바사라가 기함했다.

“마안....!”

“뭐? 마안이라고?”

권능을 행사하는 눈.

그것은 오직 마안족의 특권이다.

인간인 그리드가 마안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그렌할과 모르이즈는 바사라의 해석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광대한 지식에는 오차가 없었기에.

쩌어어어엉-!!

본체만 남게 된 추종자에게 그리드의 검이 꽂히고 있었다.

피부를 강철처럼 굳히고 팔을 교차시킨 추종자가 그리드의 공격을 막아냈다.

추종자의 호신강기는 무척 강해서 보통의 공격으로는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한데.

푸슈슈슈슉!!

“....!?”

그리드의 검과 부딪친 추종자의 팔이 피를 뿜으며 잘려나갔다. 추종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약자 멸시>

초월자의 반열에 들지 못한 대상에게 일격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대상의 현재 생명력의 80퍼센트를 소모시키는 일격을 꽂아 넣습니다.

스킬 마나 소모:5,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신을 겨누는 칼날에 귀속 된 스킬의 발현이었다.

상대가 네임드일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스킬이지만 일반 몬스터에게는 핵탄두나 다름없는 스킬이었다.

푹-! 푹푹!!

일격에 큰 피해를 입고 혼란에 빠진 추종자에게 그리드가 총 8회의 평타를 더 날리자.

쏴아아아아....

무신의 추종자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리드는 처음 분신을 잡았을 때와 달리 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398레벨인데도 불구하고 경험치 게이지가 0.01퍼센트나 차올랐을 정도다.

“.....”

“.....”

이번만큼은 칠공작들도 놀라서 입을 닫았다.

처음에는 자신들조차 애를 먹었던 분신술을 쓰는 추종자를 저렇게 쉽게 없애다니?

그리드의 솜씨에 솔직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리갈을 죽인 건 단순히 운이 아니었다는 거군.’

칠공작들의 마음 속에서 그리드의 존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굳이 <약자 멸시>를 쓴 보람이 있었다.

[거세안이 발동 중입니다. 지속적으로 마나가 소모됩니다.]

[거세안을 닫습니다.]

안대 속 왼쪽 눈을 다시 감은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추종자들이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 다들 조심해.”

“....그래.”

십공신들은 마음이 무척 쓰렸다.

그리드가 단 몇 초 만에 사냥한 몬스터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니....

실력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이 났다.

그 옛날 천외천 크라우젤에게 느꼈던 격차보다 훨씬 더 큰 격차임을 직감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계속 차이가 벌어졌다가는 짐짝으로 전락하고 말 거다.’

십공신들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두려워할 시간에 싸우고, 이겨서 강해지겠노라.

단단히 마음먹은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

밀림은 크지 않았다.

모든 함정을 해제하는 그리드의 활약과 성장을 갈망하며 추종자들을 사냥한 십공신들의 분투, 그리고 칠공작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덕분에 일행은 손쉽게 밀림의 끝에 도착했다.

쏴아아아아아아!!

계곡이 보였다.

쏟아지는 폭포수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야영하는 것이 어떻겠소?”

계곡의 지형을 확인한 그렌할이 제안하자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새벽부터 출발했는데 어느새 밤이다.

밀림을 돌파하는데 14시간이 걸렸다.

동료들과 함께 막사를 친 라우엘이 스컹크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는 길에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네. 공교롭게도 어떤 단서나 보물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밀림의 함정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벽화들을 몇 개 더 찾았을 뿐이죠.”

밀림은 유적지의 첫 번째 관문으로 돌파해야할 대상일 뿐.

밀림 자체의 중요도는 낮았다.

고개를 끄덕인 라우엘이 스컹크에게 육포를 건네주었다.

“길드를 직접 운영하시다보면 종종 번거로운 일이 생기곤 하지 않습니까?”

“인원이 100명이 넘다보니 자잘한 트러블이 생기긴 하죠. 하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 길드는 탐험대라는 컨셉을 지키고 있으니 어디 한곳에 정착하는 법이 없고 이권도 적어 정치싸움이 벌어지진 않아요. 물론 그만큼 길드원들이 힘들어해서 종종 이탈자가 발생하긴 하지만....”

“슬슬 정착하실 때도 된 것 같습니다만. 적해를 건너신 걸 보면 서대륙은 이미 거의 다 탐사하신 것 같은데요.”

“음.... 그렇긴 합니다.”

“템빨국으로 오시죠. 저희가 많은 편의를 제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적해를 탐사하시겠다고 하면 언제라도 군함을 대여해 드리고, 동대륙을 탐사하시겠다고 하면 언제라도 동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게끔 도와드리죠.”

“하하, 언제라도 동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다니.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요.”

스컹크가 웃어넘겼다.

동대륙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황당한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한 것이다.

라우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대현자 스틱세이가 그리드 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

“스틱세이는 대륙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 스크롤을 제작할 수 있고요.”

“네? 뭐라고요?!”

스컹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입....?”

재차 확인을 요구하려던 스컹크가 입을 다물었다.

라우엘이 등지고 앉은 계곡 중앙의 폭포.

저 멀리서 쉬지 않고 떨어지는 그 거대한 폭포 속에 어떤 인영이 도사리고 있음을 엿본 까닭이었다.

정신 수양이라도 하듯, 녀석은 눈을 감고 있었고 이쪽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폭포수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녀석의 이름은 무려 <10개의 비급을 익힌 무신의 추종자>였기에.

스컹크는 직감했다.

저것은 가디언이다.

분명히 어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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