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4화
‘도대체 언제 복구되는 거지?’
그리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베리드가 왜곡시킨 현실이 빼앗아간 직업과 칭호, 그리고 스킬들.
‘일시적’으로 사라진다기에 금방 다시 복구될 줄 알았더니, 어째 20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이러다가 설마 잘못 되는 건 아닐까....
시간이라는 개념은 개체 별로 다른 것이기에, 그리드는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였다.
‘영생을 지닌 대악마에게 있어서 찰나라 함은 인간의 평생보다 짧다.’
시스템이 이딴 개소리.... 궤변을 지껄이면서 왜곡 상태를 풀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잃은 모든 것들이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다.
라고, 남들보다 뒤통수를 많이 맞아본 그리드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되돌아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서사시의 마검사는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직업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그마의 후예를 뛰어넘는 격을 지녔고 전투력은 파그마의 후예를 압도했다.
파그마의 후예로 되돌아가는 건 엄밀히 따져서 너프다.
서사시의 마검사가 다시 서드 클래스 판정을 받게 되는 순간, 기껏 얻은 그리드의 검무와 초월의 격을 봉인당할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 아니, 대장장이로써의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수백, 수천 개의.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아이템을 만들었다.
때로는 단지 몇 푼의 돈을 받고 아이템을 판매하기도 했고, 때로는 힘든 사건에 얽히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인연을 쌓아올렸다.
내가 칸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대장장이였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으로 축약이 된다.
대장장이라는 직업은 그리드의 근간이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대장일이란, 뗄래야 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작업이었다.
“돌려줘....”
설사 다시 약해져도 좋다.
나는, 나이고 싶다.
“장난 그만 치고 돌려줘.”
퍼엉-!
쿠콰콰콰콰쾅!!
협곡이 파괴된다.
피아로와 크라우젤 일행, 그리고 키리누스와 칠공작들에게 둘러싸인 베리드는 피투성이가 된 채 포효했고 전투는 점차 심화됐다.
니야오옹.
그리드의 어깨 위에 앉은 노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울었다.
자신은 템빨콘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작고 까칠한 혓바닥으로 그리드의 뺨을 계속 핥아주었다.
푸르릉.
템빨콘은 여전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이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환수께서 고작 수컷 따위의 뺨을 핥아야하다니.... 그런 불만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성스레 그리드의 뺨을 핥아주었다.
그리드의 표정이 너무 괴롭고 쓸쓸해보였으니까.
그때.
[진실 왜곡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잃었던 직업과 칭호, 그리고 모든 스킬과 특성이 복구됩니다.]
[단, <서사시의 마검사>의 격이 <파그마의 후예>보다 높으므로 <그리드의 검무>가 활성화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드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며 불안에 떨던 그가 안도하며 환희했다.
쏴아아아아.....
잃었던 힘과 축복들이 다시금 몸에 깃들기 시작한다.
잃을 줄 알았던 힘들이 여전히 몸에 남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리드는 여전히 유지되는 초월의 격을 자각했다.
서드 클래스로 회귀한 서사시의 마검사는, 그러나 여전히 그리드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의 서사시는 그가 직접 써내려간 것.
순전히 그리드의 것이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며,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시대의 강자들을 발견하여 투기가 축적되기 시작합니다!]
[투기가 1 상승할 때마다 근력, 체력, 민첩성이 0.5퍼센트씩 상승합니다.]
구오오오오-
적자색의 아우라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영웅왕의 상징.
전대 영웅왕은 검성 뮐러였다.
““네놈!””
난무하는 씨앗과 호미질, 거기에 이어지는 두 개의 창격에 꿰뚫리고 비명을 토하던 베리드의 시선이 거짓말처럼 그리드에게 꽂혔다.
생명력이 30퍼센트에 도달하고 있는 녀석은 자신을 둘러싼 피아로와 칠공작, 그리고 검성 크라우젤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파그마와 뮐러.
대악마도 좌시할 수 없는 인간 두 명의 힘을 이어받은 것으로 모자라 자신만의 길까지 개척한 그리드의 잠재력을, 그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제 그리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악마의 어그로를 끄는 인물이라는 뜻.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불운이었다.
꽈드드드드드드드득!
사방으로 금속의 가시를 전개하여 피라미들을 떨쳐낸 베리드가 기다란 칼날을 연성했다.
칼날의 길이는 무려 3킬로미터.
그리드와 베리드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간극을 메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길이였다.
그것은 생성과 즉시 그리드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니, 관통해야만 했다.
““....!?””
란스티어 술법의 계승자이기 전에 신속의 주인이었던 사내.
직업 고유 특성으로 ‘속도’와 관련 된 판정을 유리하게 받아왔던 페이커는 <초상비(草上飛)>를 얻음으로서 한 단계 진화한 바 있다.
그는 베리드가 쏘아낸 칼날에 반응했고, 아직 회복하지 못해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그리드의 앞으로 나서서 단도를 측면으로 세웠다.
쩌어어어엉-!
베리드가 연성한 칼날과 페이커의 단도가 맞물리며 굉음이 폭발했다.
끼리릭-!
방향이 미묘하게 비틀린 칼날의 끝이 그리드의 심장이 아닌 하늘로 솟구친다.
콰앙!!
페이커의 몸은 저 멀리, 협곡의 한 벼랑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페이커!”
그리드의 경악성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어쌔신의 단점은 내구력이 형편없다는 점.
특히 공격력과 생명력이 높은 정예 등급 이상의 몬스터와 전투 시 의문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물며 베리드는 대악마다.
그리드는 베리드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선 페이커가 살아있기 힘들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페이커는 의외로 멀쩡했다.
베리드의 칼날을 후려칠 때는 란스티어의 체술을 활용하고 절벽과 충돌하는 순간에는 그림자 병사들을 소환하여 조력을 얻었으니까.
태연한 표정으로 흙먼지를 꿰뚫고 나타난 페이커가 어안이 벙벙해진 그리드에게 말했다.
“너를 지켜야할 사람이 약해선 안 되겠지.”
페이커는 무신 제라툴에게도 인정받은 남자.
“그리드, 나도 전선에 합류하겠다.”
아이스 플라워 길드를 단신으로 궤멸시켰을 당시의 그는 노말 클래스 전직자에 불과했다.
“너는 회복에 전념해라.”
그리고 현재.
“살문 개방(殺門開放).”
그림자의 왕 카심으로부터 란스티어의 체술 이론과 그림자술을 수학 중인 페이커는 어쌔신의 왕좌를 노리는 중이다.
“신살(神殺).”
스카아아아악-!
섬광 그 자체였다.
빛이 된 페이커가 협곡을 관통했고, 붉게 충혈 된 베리드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뒤집혔다.
아찔한 정신 속에서 베리드는 직감했다.
이건 위기다.
이것이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라는 것일 터다....
그러니.
““....22지옥 소환!!””
나는, 나의 모든 힘을 해방한다.
세계가 내게 강제로 부여한 규칙을 깨뜨린다.
그 대가로 빛의 여신에게 영혼을 갉아 먹힐지언정.
다른 대악마들에게 비웃음을 살지언정 상관없다.
인간의 손에 의해 육신을 잃는 굴욕만큼은 피해야한다.
[22지옥이 인계에 현현합니다.]
[대지와 대기가 마기로 물들어갑니다.]
[22위 대악마 베리드의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22위 대악마 베리드에게 현재 적용 중인 모든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인류는 지옥의 환경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스킬과 마법의 위력이 30퍼센트 하락하고 캐스팅 속도가 60퍼센트 하락합니다.]
[마법 저항력과 물리 방어력이 20퍼센트 하락합니다.]
[생명력과 마나, 스태미나의 자연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스태미나 하락 속도가 빨라집니다.]
[물약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22지옥의 마수들이 출몰합니다!]
『아,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그리드의 무쌍에 흥분했던 중계진과 시청자들.
그들의 흥분 상태는 진즉에 끝나있었다.
그들은 급기야 칠공작까지 나서자 더욱 더 수세에 몰리게 된 베리드를 보면서 도리어 냉정해졌다.
베리드의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베리드가 새로운 페이즈에 진입할수록 명확한 현실을 엿보게 되었으니까.
지옥 소환이라는 최후의 페이즈가 임박하고 있다는 현실 말이다.
이는, 32위 대악마 벨리알에게 학습한 바 있는 절망의 끝.
인류 최후의 날의 도래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검은 재가 번지기 시작한 하늘 곳곳에 벼락이 나부낀다.
화르륵!
쿠르르르르릉!!
협곡 사이사이로 용암보다 뜨거운 지옥불 폭포들이 쏟아졌고 메마른 대지가 쩌적,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키야아아아아아!!
생태계가 변한다.
절벽 위 꽃들이 식인 식물로 변했고 땅속의 두더지들은 몸집이 성벽처럼 커다란 마물로 변했다.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 기이하고 흉측한 마물들이 꿈틀꿈틀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리드가 있었다.
““큭큭....! 크하하하하핫!!””
베리드가 대소를 터뜨렸다.
인간을 가축취급하며 그토록 콧대 높게 굴던 녀석이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엄청 기뻐하네요.』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겠죠.』
이게 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일행, 그리고 칠공작들 덕분이다.
저들이 없었다면, 대악마 베리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인류를 개미처럼 짓밟았을 터.
그래, 여기까지 몰아붙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다.
저놈이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도리어 분이 풀리고 속이 시원하다.
각국 방송사의 중계진과 시청자들은 그리드와 크라우젤 일행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를 표했다.
템빨단 원군이 협곡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최소 30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벨리알 레이드 당시처럼 극적인 도움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
중계진과 시청자들은 베리드 레이드가 이대로 실패로 끝날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리드와 크라우젤 일행의 피해가 최소화되기만을 빌었다.
한데, 반전이 생겼다.
“지옥 소환하면, 뭐?”
“시시하군.”
““....!?””
베리드 레이드 파티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던.
아니, 앞으로도 두 번 다시없을 역대급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크라우젤과 피아로, 그리고 키리누스와 칠공작들.
전설, 혹은 초네임드급 NPC인 그들은 전원 초월적인 저항력을 갖추고 있는 바.
지옥의 디버프 효과가 온전히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드는....
하알짝~
연신 혀로 핥아주는 템빨콘 덕분에 스태미나를 계속 회복 중이었다.
““이, 이놈들이....!””
촤르르르르륵-!
낭패를 표한 베리드가 수백 종류의 무기를 연성한다.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나 상승한 녀석의 연금술은 전보다 흉흉한 기세를 발휘했다.
하지만.
“용납하지 않습니다.”
두 눈을 부릅뜬 금관 바사라의 적기가 베리드의 연금술을 약화시켰고,
“하하하! 쓸데없이 단단해져서 손맛이 더 좋아졌는데?”
“너무 들뜨지 마시게.”
칠공작 중에서도 드물게 사이가 좋은 그렌할과 모르이즈의 협격이 베리드의 약화 된 연금술을 산산조각 냈으며,
“그동안 실력이 죽은 건 아닌지 제가 확인해볼게요.”
“....많이 컸구나.”
오래간만에 제외한 피아로와 레이첼의 연계기가 베리드의 육체에 새로운 상처를 아로새겼다.
또한.
“유성 검.”
“그림자 군단.”
크라우젤과 페이커가 함께 마물을 도륙하고 길을 열자, 창끝에 청광을 응축시킨 키리누스가 돌진하여 베리드를 위협했다.
크라우젤과 파티를 맺음으로서 <검성의 오러>를 적용 받고 있는 그들 전원은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해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자들.
그들에게 둘러싸인 베리드는 무척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바로 두려움.
최상위 포식자가 결코 느껴서는 안 될, 나약한 감정이었다.
““비겁한 놈들....!””
드디어 플래그가 꽂혔다.
비겁.
악당의 유언이라고 봐도 좋을 단어가 튀어나왔다.
베리드는 자신의 최후를 엿봤고, 그리드와 크라우젤 일행은 레이드 성공을 직감했다.
그리고 불청객이 나타났다.
벼랑 위에 올라 선 그는 녹색의 산발을 광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리치 소환, 무무드.”
일생을 악의에 시달려온 피해자.
차라리 착취하기를 선택한 패자(霸者).
또 다시 인간에게 실망한 그는 비로소 완전해졌다.
그의 시야에 담기는 세상은 완연한 잿빛.
일말의 기대도, 미련도 없다.
“죽여.”
쿠와아아아아앙-!
리치 무무드가 쏜 무지갯빛의 마력이 레이드 파티를 덮쳤다.
“아그너스으!!”
분노에 찬 그리드의 외침이 하늘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