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18화
<빛을 잃은 아다만티움>
추락한 운석의 파편입니다.
아다만티움과 동급의 경도와 강도를 지녔으나 신성력은 잃었습니다.
무게:10
라인하르트의 대장간.
“흠....”
아다만티움은 신계에서 자생하는 광물이다.
한데 운석이 즉 아다만티움이라고 한다.
왤까?
잿빛의 물질을 손에 쥔 그리드가 곰곰이 생각해볼 때였다.
“아득히 높은 천상의 거산을 쪼갠 레베카 여신께서 그 파편들로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을 빚으셨다고 하지.”
드워프 케를이 다가왔다.
그는 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아다만티움과 운석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거산의 파편이 즉 최초의 아다만티움인 게요.”
“그렇군.”
개연성의 부여.
NPC와 퀘스트의 근본적인 역할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덕분에 의문이 해소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를은 새로운 의문을 던졌다.
“하면 블러드 스톤은 뭐일 것 같소?”
“....?”
“우리들 대장장이가 광물을 토대로 새로운 물건을 창조하게 된 배경에는 빛의 여신의 가르침이 있소. 빛의 여신께서 만물을 창조하고자 만드신 물질이 아다만티움이므로 ‘광물의 역할’이 창조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됐지.”
“.....”
백 년 이상 무저갱에 갇혀있었던 여파일까.
드워프 케를은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가 많았다. 어떨 때는 애보다 못할 정도로 골칫덩이처럼 굴었다.
한데 지금은 다르다.
웬일로 온전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었다. 장인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리드가 꿈에 그렸던 ‘드워프의 모습’ 그 자체인 것이다.
“지옥에는 광물이 존재해선 안 된다는 뜻이오. 신화가 서술하는 야탄은 오직 파괴만을 일삼는 악신이지 않소? 물론 항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주기를 두고 나타나 활동하는 거라지만, 어쨌든 그는 세계의 파괴를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란 말이요. 한데 그의 세계라고 알려진 지옥에 ‘창조의 도구’인 광물이 존재한다는 게 대체 말이요, 방귀요?”
“.....”
이래서 말투가 중요한 거구나.
진중한 표정의 드워프 케를은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신화에 대한 지식도 상당해서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질문이었다.
근데 마지막 방귀라는 단어가 산통을 깼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그리드의 집중력이 순식간에 깨졌을 정도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대화할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새삼 자각한 그리드가 다짐했다.
‘앞으로는 진짜 책 많이 읽어야겠다.’
돌이켜 보면, 책 많이 읽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티가 나곤 했다.
특히 웹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지적인 매력이 강해서 인간관계가 좋았고 연애도 잘했다. 멋지고 능력 좋은 부인, 잘 생기고 착한 남편 만나서 결혼까지 직행한 케이스도 많았다.
그리드의 의식이 잠시 샛길로 빠졌을 때였다.
“나는 어떤 거대한 뒤틀림을 느끼오.”
“....!!”
케를이 놀라운 발언을 했다.
신화에 많은 왜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단지 광물의 개념을 통해서 눈치 챘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케를은 드워프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감탄하던 그리드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말했다.
“그런데 결국 마족에게도 생활환경이 필요하지 않소? 내가 잠시 지옥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곳에도 울타리와 마을이 있었고 집과 성이 있었소. 당연히 대장장이도 있었지. 그들이 살아감에 있어서도 자원은 필요한 것이니 지옥에 광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소이다. 애초에 야탄은 주기적으로 파괴를 일삼는 존재. 자신의 활동시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생명체들이 무엇을 창조하든 신경도 안 쓰는 게 아닐지?”
“그게 상식적인 반응이긴 하지.... 하지만 정녕 이상하지 않소? 야탄은 빛의 여신과 대립하는 존재이며 지옥은 신계와 대립하는 세계인데 어째서 빛의 여신이 만든 개념이 지옥에 스며들어 있는 거란 말이요? 나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오.”
“.....”
그리드는 직감했다.
지금, 케를은 이 세계에서 용납 받지 못할 의문을 제기하려 하고 있었다.
레베카와 야탄이 사실은 대립하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다.... 뭐 그런 식의 뻔한 의문 말이다.
‘설마?’
“웁! 웁웁!!”
말을 계속 이어가려는 케를의 입을 그리드가 틀어막았다.
그는 칠악성과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등장하는 ‘신’들의 존재를 떠올리고 있었다.
케를이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신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사적으로 그를 제지한 것이다.
“빌어먹을!”
그리드의 손을 뿌리친 케를이 역정을 냈다.
“역시 당신도 똑같군! 개소리 집어치우고 닥치라는 게지? 나를 망령 난 늙은이 취급하는 게야! 그렇지?!”
“.....”
아무래도 케를은 많은 이들에게 부정당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탈리마를 떠나 루반나와 제국을 오갔던 이유는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혹시 신의 저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결과적으로 무저갱에 갇혔다? 아니, 이건 너무 나갔네.’
어쨌든 참 쪼잔한 신들이다.
늘 지상을 감시하며 일희일비하는 그들을 과연 전능하고 관대한 신이라 할 수 있을까?
칠악성을 통해서 세상의 진실을 엿보고 헥세타이아를 통해서 신의 열등감을 엿봤던 그리드.
그는 이쯤 되자 ‘쫓겨난 신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랜드마스터에 의해서 처음으로 거론됐던 존재들.
그랜드마스터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며, 지금의 신들이 그들을 추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조금 더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칠악성의 화신.
그랜드마스터는 황제 쥬앙데르크 이상의 중요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그리드에게 필시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그랬다.
아쉬움을 느끼는 그리드였으나.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겠지.’
너무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가 살아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가 내게 호의적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좀 진정하셨소?”
그리드가 케를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아주 발광을 하던 케를은 이내 제풀에 지쳐 잠잠해진 상태였다.
그리드는 아이처럼 토라져서 입을 비죽 내민 털투성이 드워프를 달래고자 노력했다.
“나는 당신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소. 다만 당신이 꺼낼 말이 자칫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으므로 제지했을 뿐이오.”
케를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하는 말이 나를 위험에 빠뜨린다?
짚이는 구석들이 있었다.
“맞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불행이 찾아오곤 했었소. 혹시 그건 신의 저주인가?”
드워프에게 있어서 ‘초월적인 존재의 저주’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
염룡 트라우카에게 수백 년 동안 시달려온 종족이 바로 드워프였으니까.
몸서리친 케를이 벌벌 떨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를 그리드가 안심시켰다.
“불안해할 것 없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이상 당신은 안전하오.”
“.....”
그리드의 위엄과 매력 스탯은 매우 높다. 또한 그리드는 아이템을 통해서 스탯을 활용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왕의 검과 왕관으로 위엄과 매력 스탯을 대폭 상승시킨 그리드가 단언해 보이자 케를은 깊은 신뢰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드워프 ‘케를 옹’과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자리를 비켜드리겠소. 일전에 약조한 대로 성을 잘 보수하고 증축해 놓을 테니 왕께서는 안심하고 새로운 광물 창조에 전념하시오.”
케를의 말투가 조금은 공손해졌다.
수백 년 동안 살면서 전대 전설들을 목격했던 그와의 호감도가 작게나마 상승한 일은 그리드 입장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참에 황궁 설계도까지 넘기고 호감도를 바짝 당겨볼까, 그리드는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은 이르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이 설계도는 포식이불족발도 염두에 둬야했다.
포식이불족발은 여전히 템빨단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템빨단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도처에 그가 건설해놓은 던전들이 몬스터를 유인함으로서 작은 마을들을 수호하는 한편 초중레벨 플레이어들에겐 사냥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호구가 아니다. 내가 템빨단을 위해서 던전을 건설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은 지 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호구 역할을 자처해주는 셈이다.
포식이불족발은 조카 엘리자베스를 위해서 돕는 거라고 변명하곤 했지만 템빨단원들은 알고 있다.
포이즌 마스터 이단과 함께 요리하면서 템빨단원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온 그가 이제는 템빨단 전체에 호감을 품게 됐음을.
다만, 어떤 족쇄가 그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포식이불족발은 템빨단 가입을 원하는 눈치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자꾸 망설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드는 아직 알지 못한다.
최초에는 내게 광룡의 알을 빼앗긴 원한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건 결코 아닌 듯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
포식이불족발은 <블러드 카니발>이라는 어둠의 조직을 창설하고 운영했을 정도로 사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의 마음을 열고 사연을 알기까지 앞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상념을 떨쳐낸 그리드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용광로의 온도가 그리드가 원하는 수준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하지만 빛을 잃은 아다만티움, 광룡철, 블랙 미스릴, 베리드의 발톱 모두 녹는점이 달랐기 때문에 제련 과정을 각각 따로 진행해야했다. 단 시간에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집중.’
화르륵-!
불길 속에서 금속이 녹아내린다.
4가지 광물 모두 형태와 색깔이 달랐지만 제련된 직후엔 똑같이 붉게 빛났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올라오며 그리드의 몸이 땀에 흠뻑 젖게 만들었다. 그리드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전설이 아니었다면 큰 고통을 느끼며 물러나거나 쓰러졌을 정도로 대단한 열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사우나라도 온 사람처럼 평온했다. 물론 여유는 부리지 않았다. 파브라늄을 포함해서 총 다섯 가지의 광물을 제련하고 혼합하기 위해서는 0.1초의 촌각을 다퉈야했기 때문이다.
“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황금색의 칼날.
그리드의 곁을 맴돌던 파브라늄이 용광로를 향해서 몸을 던진다.
공격 시 매우 낮은 확률로 ‘황금구름떼’와 ‘갓 핸드’를 소환한다는 특성을 지녀놓고도 그리드의 불운과 열망의 무아검에 밀려 큰 활약을 못했던 <신을 겨누는 칼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새롭게 재탄생할 파브라늄은 갓 핸드 시절의 파브라늄 이상으로 활약하게끔 만들겠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급기야 파브라늄의 제련까지 성공한 그리드가 드디어 혼합을 시도했다.
[전대 전설들의 기술과 지식으로 창조됐던 <파브라늄>이 당신의 손끝에서 재탄생합니다.]
[매우 높은 손재주가 감지되었습니다.]
[<전설의 대장장이>의 기술들이 광물 창조를 주도합니다.]
[잠재 된 지식이 감지되었습니다.]
[<지공>의 특성이 광물 창조의 진행에 도움을 줍니다.]
[몇 개의 서사시가 감지되었습니다.]
[당신을 구성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새로운 광물에 스며듭니다.]
스파아아아앗--!!!
환한 빛이 대장간을 잠식하는데 이어서 대장간 바깥까지 뻗어나갔다.
사하란의 적기가 황도 타이탄 전체를 붉게 물들였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할지 몰라도, 라인하르트의 중심부가 황금색으로 물든 모습은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하고 장대한 광경이었다.
[축하합니다! 광물 창조에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광물의 이름을 결정해 주십시오!]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물질이 그리드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이 보유한 <직업 전용 아이템>의 개념을 넘어선, 그야말로 <그리드 전용 아이템>이었다.
“아.....”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감회에 젖은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광물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