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5화
쿠와아아아아-!!
단단한 피부가 요동칠 정도의 중력이 전신을 짓누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광이 빠르게 스쳐간다.
바람의 비명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다.
‘아홉....’
오크 로드 테루찬은 구름과 맞닿은 높은 상공에서부터 추락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차갑고 단단한 지면과 충돌할 예정임에도, 그는 오직 셈을 세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 순간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추락하는 육체가 겪을 파괴와 고통이 아닌 명예의 실추였다.
템빨왕.
자신에게 10합을 버텨보라고 도발한 인간....
그는 필시 강했다.
깊은 묘리와 놀라운 위력이 담긴 검술, 까다로운 마법과 강력한 번개, 스스로 움직이는 아티팩트를 동시에 다루는 그의 실력은 전대 오크 로드 이상이었다.
급기야 용마저 소환하는 그의 저력에 놀란 테루찬은 패배를 염두에 둬야함을 깨달았다.
파치지지지직!!
푸른 용이 동반한 번개가 테루찬의 거구를 지졌다.
몸 속 모든 세포를 경직시키는 짜릿한 고통 속에서 테루찬은 인정했다.
상대는 강하다.
영웅왕이라는 이름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그래.... 나는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허망한 패배는 없어야한다.
나는 전사들의 왕.
드래곤의 아가리에 삼켜질지언정 드래곤의 혀를 깨물고 죽겠노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세상 모든 오크의 정점이자 어스름족을 이끄는 내가 채 10합을 버티지 못하고 진다?
그건 세상 모든 오크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다. 나 하나로 인해 모든 오크가 권위를 상실할 것이다. 다시 옛날처럼.
나는, 버텨야한다.
‘열....!’
지상과 충돌하기 직전, 테루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합(合)이란 서로의 공방이 마주친 횟수를 뜻하는 바.
상공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테루찬이 휘두른 검격의 횟수만 무려 20회가 넘었다. 테루찬의 검과 포효가 파괴하고 찢어낸 그리드의 보호막은 30개에 육박했다.
버틴 것이다.
인간의 표정이 너무나도 위풍당당하기에 내가 채 10합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는 것인가 걱정했는데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쿠륵....!”
나는 너를 10합 내로 제압할 수 있다.
마치 그리 말하는 듯했던 템빨왕의 선언을 수포로 만들었으니 최소한의 명예는 지킨 셈.
깨닫는 테루찬의 눈빛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번개에 지져지며 경직되었던 그의 근육과 신경, 그리고 세포가 강인한 ‘정신력’에 호응하여 일제히 깨어났다.
꽈드득-!
고양이과 맹수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 마비로부터 풀려나 운동 신경을 회복한 테루찬이 이를 악 물고 허리를 비틀어 자세를 납작 엎드렸다.
콰아아아앙!!
테루찬의 거구가 지면에 떨어졌다.
귀를 찢는 폭음이 발생하며 지축이 흔들렸고 10만 오크 대군이 술렁였다.
“오오....!”
베즐 후작과 하울 요새의 병사들은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은 뿌옇게 일어나는 저 흙먼지 너머에 죽어가는 오크 로드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크 로드가 도검의 침범조차 불허할 정도로 단단한 피부와 근육을 지녔다지만 저토록 높은 상공에서 떨어졌으니 무사할 리 없다고 믿었다.
한데....
“쿠우오아아아아아아!!”
흙먼지가 걷히면서 드러난 테루찬의 모습은 비교적 멀쩡했다.
마치 짐승처럼 두 손과 발로 땅을 짚고 선 녀석의 사자후가 오크들을 열광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에 휩쓸려 마비됐던 오크들의 육체가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났다.
“테루──찬!! 쿠륵!!”
“테루──찬!! 쿠륵!!”
쿵쿵! 쿵!! 쿵쿵! 쿵!!
강자에게 복종하는 오크의 습성은 생존 본능에 의거한 것이다.
복종을 거부하는 순간 도전으로 간주됐으니 죽기 싫으면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테루찬의 이름을 연호하며 발을 구르는 오크들은 본능이 아닌 이성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피를 흘리며 추락하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테루찬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전설 속 영웅의 재림을 외치며 열광했다.
그리드의 선전이 도리어 오크라는 종을 단합시킨 것이다.
삐질, 창공의 그리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렇게 맞고도 멀쩡하네. 초연살극의 데미지가 생각보다 덜 들어갔어.’
그리드는 10합 내에 승부를 보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투기가 최대치에 도달한 상태로 템빨과 검무, 마법을 모두 적극 활용해서 싸웠다.
궁극기 연살화극(聯殺花極)과 초연살극(超聯殺極)을 연속으로 전개했다는 것부터가 그리드가 얼마나 진지하게 승부에 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초연살극(超聯殺極)>
4개의 검무를 하나의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3,7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히는 살(殺)의 검기를 1초 동안 7회 발사하고 검기를 적중시킬 때마다 대상을 <무장해제>시킵니다. 또한 출혈과 절망 효과를 유발합니다.
모든 검기는 대상의 방어력을 65퍼센트 무시합니다.
★디텍트 포스와 윈드 커터, 인챈트 웨폰 효과 적용.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검기 소모:4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시간
공격력을 2배 증폭시키는 초(超)의 원리에 따라서 초연살극에 귀속 된 살의 검기는 공격력이 2배 상승적용 받았다.
‘표식’이 최대치로 누적 된 대상에게 사용 시 총 22,560퍼센트의 물리 공격력+100퍼센트의 마법 공격력이라는 계수를 자랑하는 연살화극보다 높은 계수를 자랑하는 셈이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안정적인 위력을 자랑하는만큼 재사용 대기 시간이 더 길었고, 물리 방어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대에겐 연살화극보다 못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오크 로드 테루찬을 상대로는 연살화극보다 못한 셈이다.
마법 저항력은 형편없이 낮은 대신 물리 방어력이 높은 테루찬은 극(極)의 효과가 유발한 방어력 무시 수치가 무색하게도 초연살극을 버텼다.
애초에 연살화극의 데미지도 그리드의 예상보다 적게 들어갔다.
테루찬이 ‘템빨’이 없는 상대라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방어구 자체를 무장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무장해제 효과가 무용지물이었다.
‘스탯빨 정말 지리는군.’
쯧, 혀를 찬 그리드가 지상의 테루찬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테루찬의 생명력은 이제 채 5분의 1도 남지 않았지만 그리드는 낭패를 느꼈다.
테루찬의 생명력 회복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도 문제였고, 그보다는 검기의 고갈이 더 큰 문제였다.
그리드가 <내리쳐라!>에 맞고 마비 된 테루찬에게 추가 검무를 연계하지 못했던 이유다.
검기를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검을 휘둘러야하는데, 테루찬을 10합 내에 제압하겠노라 선언했던 까닭에 평타를 쓰지 못하고 검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화, 초연화, 연, 살....’
하늘을 올려보는 오크 로드와 시선을 마주친 채로, 그리드는 자신이 총 몇 개의 검무를 사용했는지 헤아려보았다.
7개.
10합까지 3합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모든 궁극기를 소모한 상태로 3합 내에 오크 로드를 제압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단언한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빌어먹을 신장.’
정말 딱 한 번만 터져줬어도 지금쯤 오크 로드의 항복을 받아냈을 텐데.
50퍼센트 확률은 개뿔, 체감하기로는 로또나 다름 없다.
스스로의 불운에 정말.... 정말로 깊은 화가 치솟는다.
그리드가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인간의 왕이여! 쿠륵!!”
테루찬이 그리드를 불렀다.
지상에 착지하다가 부러진 것인지, 테루찬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축 늘어진 상태였다.
“나는....! 쿠륵! 50합을 넘게 버텼다!”
환호하듯 외치는 테루찬의 표정이 기고만장했다. 자부심마저 엿보였다.
그리드의 실력을 인정한 그는 그리드의 공세를 버틴 스스로가 기특했던 것이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이제 고작 7합을 겨뤘을 뿐인데?”
“쿠륵....? 네가 검을 휘두른. 쿠륵! 횟수만! 40번! 이상!!”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시치미라니?
오크족 사이에서도 못 볼 그리드의 철면피에 당황한 테루찬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황당한 주장이군. 내가 검을 수십 회 휘둘렀을지 몰라도 실제로 사용한 검무는 7개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7합이지.”
“.....?”
“.....”
양아치, 인가?
그리드가 펼치는 기적의 논리가 전장을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만들었다.
테루찬과 오크들은 물론이고 폴드 왕국의 병사들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저 흉포한 오크 로드조차도 헤즐 후작과의 약속을 지키고 명예로운 모습을 보였는데 황제와 어깨를 견준다는 템빨왕이 명예를 모르다니?
누군가는 실망했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정작 테루찬은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쿠륵....! 그런가! 아직 고작 7합인가!”
두렵다.
템빨왕은 무서우리마치 강한 인간이다.
그것이 테루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좋군....! 쿠륵! 마침 더 싸우고 싶었다!!”
테루찬의 호승심은 역으로 불타올랐다.
테루찬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전력을 쏟아 붓는 극한의 전투를 갈망했다.
설령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일지언정 후회가 없을 자신이 있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전사가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쿠륵! 싸우자!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
제한을 두지 않는 결투.
검기의 고갈 탓에 상황이 좋지 않았던 그리드로서는 당연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씨익.
미소 짓는 그리드의 입 꼬리가 대악마의 그것처럼 크게 찢어져 올라갔다.
“응하도록 하지.”
퍼엉-!
그리드가 하강했다.
흑화의 지속 시간이 유지되는 동안 뽕을 뽑으려는 의도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액-!
그리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섬전처럼 쇄도하는 그의 몸은 점차 더 밝게 백열하고 있었다.
청룡의 부츠에 귀속 된 조건부 발동 패시브.
최대 속도에 도달 시 낮은 확률로 신체가 번개로 변하는 <뇌신>스킬의 태동이었다.
꽈아아아아앙!!
“쿠르륵....!”
이것은 세계의 의지 그 자체인가.
그리드의 검을 대도로 막아내는 테루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창공에서부터 떨어지며 발생한 가속력을 고스란히 머금은 그리드의 일격은 테루찬이 딛고 선 대지를 출렁이게 만들 정도였다.
“인간...! 그대의 이름을! 쿠륵!! 알려다오!!”
포효하듯 물어오는 테루찬의 이글거리는 시선과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그리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그리드.”
채챙-! 채채챙!!
뇌기가 휘몰아쳤다.
아이템 합체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 온전한 형태로 되돌아온 열망의 무아검과 테루찬의 대도가 서로 맞물릴 때마다 주변에 번개가 떨어졌다.
“너를 탐하는 자다.”
공방을 교환할 때마다 짜릿하게 달아오르는 피부.
예상대로 대단한 테루찬의 실력에 고조된 그리드가 자신의 솔직한 바람을 입 밖에 꺼내자.
“크하핫핫!! 쿠륵! 전사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테루찬이 폭소했다.
조소가 아니다.
불쾌한 기색 따위 없었다.
오래 전 역사 속 로드가 인간을 숭배한 경우가 있음을, 그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콰쾅-! 쾅!! 콰쾅!!
검과 도의 마찰음이 점차 폭음으로 변해간다.
극한의 집중력에 도달한 그리드와 테루찬이 온갖 궤도에서 공방을 나눴다.
각국 방송사의 카메라가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기 시작했다. 근접 촬영을 포기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간.
번쩍-!
그리드의 몸에 뇌신이 깃들었다.
테루찬의 대도가 그의 몸에 닿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