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6화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그리드가 숲에서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자 라우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바알 아닙니까? 아니, 의심의 여지없이 바알인데요?”
“말도 안 돼.”
그리드는 라우엘의 추측을 단칼에 부정했다.
“바알은 거의 최종보스 같은 존재야. 녀석이 등장하기엔 아직 타이밍이 너무 이를뿐더러 포스도 없었다니까?”
그리드가 제시하는 근거는 결코 빈약하지 않았다.
대악마 벨리알과 베리드 모두 무시무시한 포스를 자랑하지 않았던가.
다른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그리드조차도 그들에게 절망의 편린을 엿봤을 정도다.
숲에서 조우했던 악마의 정체가 지옥의 절대군주 바알이었다면, 그리드는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공포감을 체험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별반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명색이 최종보스가 일개 유저의 몸에 빙의하는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도 말이 안 되지. 특정 플레이어만 최종보스의 힘을 빌릴 수 있으면 너무 언밸런스잖아. 백날 밸런스 외치는 S.A그룹이 그런 사태를 허락할 리 없어.”
“전하께서도 브라함의 힘을 빌려오지 않았습니까?”
“브라함은 최종보스급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 보기엔 브라함이나 바알이나 똑같이 사기일 것 같은데요.”
“어쨌든 다르잖아. 그게 바알이었을 리 없어.”
그리드가 재차 단언해보였다.
“심지어 그랜드 마스터보다 실력이 아래로 보였다고.”
대충 감 잡아 말하는 게 아니다.
아그너스의 몸에 빙의했던 악마가 내뿜던 마기는 대악마 베리드. 아니, 벨리알보다 훨씬 못했다.
그랜드 마스터가 잠들어있지만 않았어도 이미 그랜드 마스터에게 수세에 몰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플레이어의 몸에 빙의하는 형태로 강림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페널티를 동반한 상태였음을 감안할지라도 제1위 대악마 바알이라고 보기엔 너무 약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리드의 마기를 소멸시켰다는 점과 투기를 최대속도로 채운 점, 그리고 순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점을 보아 상위급 대악마일 가능성은 높았지만 바알이라는 건 확대 해석이다.
“하지만 본인을 지옥 옥좌의 주인이라고 말했다면서요?”
“지옥에 옥좌가 한 개냐? 지옥은 영토가 33개로 나뉘어져있고 33마리의 대악마가 각자 영토를 다스리고 있는데 당연히 옥좌도 33개지.”
“하지만 아그너스는 바알의 계약자입니다.”
“아그너스가 바알의 계약자라고 해서 바알하고만 엮인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지. 나는 벨리알, 베리드랑 계약 안 했는데도 걔네 힘 쓸 수 있잖아. 아그너스도 룬 등의 다른 효과로 다른 대악마의 힘을 빌리게 됐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그 악마는 파그마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면서요? 파그마가 전대 바알의 계약자였으니 대악마 중에서 파그마를 잘 아는 존재는 역시 바알 아닙니까?”
파그마.
바로 그게 핵심이다.
아그너스의 몸에 강림했던 악마는 그리드와 파그마를 놓고 비교할 정도로 파그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라우엘이 악마의 정체를 바알이라고 보는 이유다.
하지만 이 또한 그리드에게 부정당했다.
“파그마는 번헨 열도에서 농성하면서 지옥 군단의 침공을 홀로 막아낸 위인....이야. 파그마와 직접 싸우고 파그마에게 엿 먹어본 대악마가 한둘이 아니라고. 비단 바알 뿐만 아니라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대악마들 대부분이 파그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다.”
“흠.... 그렇군요.”
라우엘이 한 수 접었다.
그리드는 번헨 열도를 정화한 영웅왕이며 직접 아스가르드에 올라 신을 만난 존재.
대악마와 신들에 대한 그의 이해도는 라우엘의 지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라우엘이 백날 추측해봤자 그리드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그럼 전하께서는 아그너스에게 강림했던 악마의 정체를 뭐라고 보십니까?”
“아모락트 아닐까?”
“브라함이 말했던 야탄의 첫 번째 종 말씀이시군요.”
“응, 인계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제일 적극적인 놈이지.”
“하지만 배후에서 야탄교를 운영할 정도면 꽤 부지런한 성격 같은데....”
“....?”
“신들과 인간의 허세를 지켜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아~주 아주 무료한 존재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지....”
“그럼 다른 놈인가보지. 애초에 그놈의 정체가 뭐든 뭐가 중요해?”
결국 아이템이나 스킬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발현되는 악마에 불과하다.
룬의 힘에 귀속 된 대악마의 힘은 살아생전 대악마의 힘과 비할 바 없이 약하며, 동화 상태의 브라함 또한 명백한 한계를 지녔었다.
아그너스의 몸을 빌려 등장했던 악마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뜻이다.
단지 아그너스의 힘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고작 그 정도 사안에 집착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드는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았다.
아그너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려서 불쾌했다.
“당장 신경써야할 문제는 따로 있어.”
그리드가 퀘스트 정보를 공유했다.
세계수로부터 받은 퀘스트였다.
<조사>
난이도:SS
세계수가 다크 엘프 베니야루의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베니야루를 토벌하여 세계수의 조사에 도움을 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베니야루 사망.
퀘스트 클리어 보상:세계수와의 호감도 소폭 상승. 연계 퀘스트 <수색> 발생.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 없음.
*이미 클리어한 퀘스트입니다.
“....??”
라우엘이 당황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세계수는 만물을 포용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
그녀, 혹은 그가 엘프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문장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낯설고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리드가 설명해주었다.
“세계수는 베니야루가 어둠에 물든 원인을 외부에 있다고 판단하더군.”
엘프는 필요 이상으로 순수하나 고집이 강한 종족.
스스로 정도를 정하고 철저히 따르니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만약 그리드가 엘프들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왕 키르에게 그대로 끌려가 노예가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면 또 모를까, 그리드 덕분에 위기로부터 벗어나놓고도 베니야루가 스스로 원해서 어둠과 동화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 세계수의 주장이었다.
“다음 퀘스트 내용을 보라고.”
<조사>는 베니야루가 죽은 시점에서 이미 종료된 퀘스트다.
그리드는 이후 연계 된 새로운 퀘스트의 정보를 불러왔다.
<수색>
난이도:S
가우스 왕국령의 숲에서 활동했던 베니야루는 세계수의 예상대로 의태에 불과했습니다.
세계수는 이번 사태의 원인이 고대의 종 <라플레시아>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플레시아는 마음에 어둠을 품은 존재들을 현혹해 양분으로 삼는 종족으로 예로부터 숲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마족에게 큰 위협이 되곤 했습니다.
베니야루의 본체를 품고 있을 라플레시아의 위치를 수색해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라플레시아 발견
퀘스트 클리어 보상:세계수와의 호감도 소폭 상승. 베니야루와의 호감도 최대치.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 없음. 베니야루 사망.
“아.... 세계수는 활동 중인 베니야루가 의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군요. 과연 태초부터 있어온 존재답게 남다른 안목입니다.”
“애초에 고대의 종이라는 건 세계수의 숲에만 서식하고 있잖아? 그래서 고대의 종과 얽힌 일에 유난히 해박한 걸 수도 있지. 뭐 어찌됐든, 템빨단 2군이나 템빨 그림자단 소속원 중에서 실력 좋은 사람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난 수색 관련 스킬이 없으니까 탐험가나 어쌔신을 지원 받고 싶은데.”
라플레시아를 토벌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퀘스트다.
실제로 난이도도 S로 무난한 편.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베니야루를 구출할 수 있는 기회이니 그리드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베니야루를 구출하려는 이유?
엘프 중에서도 강한 ‘12테’ 중 하나인 그녀와 호감도를 쌓고 계약을 맺기 위해서─ 같은 계산 따위, 그리드의 안중에 없었다.
베니야루는 함께 싸우며 슬픔과 분노를 공유했던 인연.
그녀를 돕고 싶은 그리드의 마음은 봄날의 개나리처럼 당연히 피어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아는 라우엘이 피식 웃고 말았다.
“세계수의 숲을 수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공교롭게도 수색 그 자체에 특화 된 인재가 템빨단엔 아직 부족합니다.”
“이런 젠장. 역시 그렇지? 어쩐지 딱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
“하지만 이번 일에 딱 적합한 인재가 외부에는 한 명 있어요.”
“외부?”
“네.”
라우엘의 손가락이 그리드의 가슴을 겨누었다.
“전하께 반한 사람.”
“....?”
“탐험가 랭킹 1위 스컹크 말입니다. 그자라면 필시 전하를 도와줄 것입니다.”
***
‘카일을 얻은 뒤부턴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군.’
한숨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2황자 듀란달을 섬기는 기사, 레쉬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황좌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듀란달이 은밀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들 나라의 숲을 해방시켜주겠다.”
듀란달은 여러 왕국에 서신을 보냈다.
제국 황자의 힘과 권한으로 너희가 엘프들에게 빼앗긴 숲을 되찾아줄 터이니 너희들은 이후 나와 긴밀히 협력해야할 것이다, 라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황좌를 빼앗을 무력을 외부로부터 공급받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이다.
매우 뻔한 의도가 담긴 제안이었지만 의외로 많은 왕실들. 아니, 제안을 받은 모든 왕실들이 듀란달의 제안을 수락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숲을 되찾고 싶었으며, 현재의 세력 정세에도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은 자멸하게 생긴 이때 제국과 제국을 등에 업은 템빨국은 무사히 꿀이나 빨고 있었으니 불만과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직 템빨국만 편애하는 제국이 싫었다. 화합이라는 명목 하에 이종족들을 우리 밖으로 풀어놓고 우리를 방임하는 제국을 증오했다.
제국이 우리를 말려 죽이기 위해서 화합이라는 망상을 논한 게 분명하다는 의심마저 품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듀란달 황자가 제안해온 것이다.
새로운 제국에 우리 이상의 불만을 품고 있으며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무력을 지닌 존재가.
‘다른 왕국들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듀란달의 욕심은 도가 너무 지나쳐.’
여전히 듀란달을 지지하는 세력은 많았다.
아니, 도리어 전보다 더 많아졌다.
전 황제와 달리 정치와 경제에 의욕적으로 개입하는 바사라의 태도에 위협을 느낀 부패한 귀족들이 듀란달의 곁에 모여든 까닭이다.
더군다나 최근 무신의 유적지로부터 귀환한 카일이 듀란달의 회유에 넘어갔으니 듀란달의 세력은 이제 공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다른 왕국들의 힘까지 등에 업게 되면 황제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세력구도가 갖춰질 것이 뻔했다. 제국은 커다란 전화의 소용돌이를 겪을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을 바사라 황제가 모를 리 없는데....’
바사라가 당장 나서서 화근의 싹을 잘라주는 게 이상적일 터.
하지만 바사라는 이상할 정도로 듀란달을 방임했다.
세간의 소문에 의하면 조카들을 잘 챙겨 달라고 부탁한 황제의 유언 때문이라는데.... 고인의 유언을 지키려다가 도리어 조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상황이 오게 되면 본말전도 아닌가?
‘아니, 황제 입장에서도 듀란달은 눈엣가시일 것이다. 유언을 어길 명분을 챙기려고 고의적으로 듀란달을 방임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군.’
결정해야할 때다.
뻔히 역적이 될 듀란달의 곁에 남았다가 반란군의 일원이 되어서 온갖 위험과 손해를 겪느냐.
아니면 듀란달의 반역이 성공했을 때 챙길 이득을 생각해서 위험을 감수하느냐.
‘제길, 충성의 서약을 어기는 순간 얻게 될 페널티가 너무 크니 일단 곁에 남는 수밖에 없나?’
기사의 충의는 의무다.
서약을 어기는 기사는 무척 큰 손실을 입게 된다.
플레이어 기사들이 주인에게 버림받을지언정 주인을 쉽게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다.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레쉬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주인 ‘듀란달’이 모든 기사에게 새로운 지령을 내렸습니다.]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숲의 탈환>
난이도:S
더러운 이종족이 우리 인류의 숲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으니 짐은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은 인류의 평화와 권리, 그리고 존엄을 위해서 싸워야할 때.
우리는 무고한 희생자들과 협력하여 대륙 각지의 숲을 해방할 것이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3개의 숲을 해방할 것.
퀘스트 클리어 보상:무공 훈장. 연계 퀘스트 <숲의 탈환Ⅱ> 발생.
퀘스트 실패 시:듀란달의 신임 하락.
“끄응....”
일단은 조금 더 추이를 지켜봐야한다.
선임 기사의 인도 하에, 레쉬는 무거운 마음으로 제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