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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94화 (984/1,794)

템빨 52권 - 20화

‘그리드님이 아스모펠 저자에게 검술을 배우신 건가?’

레쉬의 오해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 송이 꽃의 탄생과 종말의 과정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는 아스모펠의 검술은 그리드가 비교적 최근부터 선보였던 검무, <화(花)>의 최종적인 진화형처럼 보였으니까.

화검 아스모펠.

이제는 전설이 된 피아로와 함께 제국의 기둥이라 칭송 받았던 그의 실력은 레쉬가 소문으로 들어왔던 것만큼 대단했다.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카일을 감싸며 피어올랐던 꽃 봉우리가 만개하며 폭발한다.

비명과 통곡마저 허락지 않는 파괴력이 숲을 격동시켰다.

요란한 폭발 속에서,

푸화하하학-!

넝마가 된 카일이 튀어나왔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도 그는 전혀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멜다, 켄트릭, 단테 세 사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아무래도.... 폭발하는 힘을 자력으로 밀어낸 듯하군.”

“.....”

세 기사는 알고 있다.

과거의 아스모펠이 2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검술이 지닌 한계 때문이었다.

오러-지금은 검기-로 폭발 에너지를 만드는 아스모펠의 검술은 강력한 광역 파괴력을 자랑하는 반면 단일 대상에게 비교적 약했고 체력의 소모가 무척 컸다.

아스모펠이 피아로와의 승부에서 매번 패배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래, 아스모펠은 피아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본 바가 없다.

하지만 피아로를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왜?

폭발 시 힘이 분산되는 아스모펠의 검술을 보고 ‘위력이 아쉽다.’는 감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피아로가 유일했으니까.

그렇다.

세 기사들의 기억 속 아스모펠은 ‘피아로를 넘지 못하되 세계를 발밑에 둔 사내’였다.

이제는 검호의 경지에 올라 검기까지 다루게 된 그의 검술을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멀쩡한 오늘날의 카일은 괴물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로 단장급....’

전 황제 쥬앙데르크.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그 무능하고 어리석은 자가 카일만큼은 정확한 안목으로 선별했던 것인가.

불쾌함에 휩싸인 세 기사가 입술을 물어뜯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릉-!

전격을 두른 카일이 아스모펠과 뒤엉켰다.

솔로 넘버 나이트 출신 기사들의 검술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체술을 구사 중인 그는 아스모펠에게 간격을 내어주지 않고 파고들어 온 몸을 무기로 휘둘렀다.

쩌정!!

사선으로 내리 찍히는 팔꿈치가 아스모펠의 견갑을 강타한다.

쐐액-!

아스모펠이 역수로 쥔 검이 카일의 반대편 주먹을 쳐냄과 동시에 카일의 복부를 찌른다.

파지지지직!!

무릎을 세워 아스모펠의 검날을 올려 친 카일이 아스모펠의 견갑을 짓누르고 있는 팔꿈치에 전류를 집중시키자 찌리리릿, 아스모펠의 몸이 잠시 감전됐다.

꽈앙!!

누가 봐도 고귀한 혈통.

아스모펠의 고운 얼굴이 주먹을 얻어맞고 뭉개진다.

쿠당탕탕!!

나뒹구는 아스모펠의 푸른 망토가 흙에 더럽혀졌다.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아스모펠을 따라잡은 카일이 요란하게 펄럭이는 푸른 망토를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아스모펠의 몸뚱이가 지면에 처박혔고, 움찔거리는 아스모펠의 미간에 꽝, 꽝, 꽝! 카일의 주먹이 연달아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하핫....! 하하하하핫!!”

카일이 희열에 휩싸였다.

그는 무신의 신탁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기둥들과 비교해 초라했던 나.

급기야 어떤 괴물에게 한쪽 팔까지 잃고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던 내게 위대하신 신께서는 궁극의 무도를 제시해주셨다.

덕분에 유적지를 떠도는 지난 몇 달 동안 7개의 비급을 습득한 카일은 신의 기적을 체험했다.

잃었던 팔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몸속에 흐르는 전류를 더욱 강화시키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위대한 신께서 내려주신 힘.

머잖아 나는 그랜드 마스터를 뛰어넘을 것이며, 내 팔을 빼앗아갔던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궁극의 무도를 손에 넣는 순간 천하를 오시하리라....

카일은 그렇게 믿어왔고 이 순간 확신을 품게 됐다.

믿음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확신 말이다.

실제로 그는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솔로 넘버 나이트들을 홀로 압도하고 있었으니 황홀경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핫....?”

신나게 주먹을 휘두르던 카일이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아스모펠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했던 까닭이다.

계속 주먹에 얻어맞고도 두개골이 박살나기는커녕 콧대조차 주저앉지 않았다.

‘초월자의 피부?’

설마 이자는 자신의 순수한 재능만으로 초월의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만큼 대단한 놈은 아니었다.

카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스모펠의 안면 일부를 감싸고 있는 푸른 망토에 꽂혔다.

‘설마?’

이 망토가 내 공격력을 흡수하고 있다고?

고작 천 쪼가리가?

부정하면서도, 카일은 아스모펠의 망토를 붙잡아 벗겨냈다.

휘몰아치는 망토의 틈새로 검날이 솟구쳤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나의 왕께서 하사하신 보구다.”

아스모펠의 음성은, 카일이 검에 가슴을 꿰뚫린 후에야 이어졌다.

흔들리는 카일의 상체를 어깨로 밀어내며 일어난 아스모펠이 검으로 반월을 그린 뒤 칼집을 집어던졌다.

파지직!

카일이 베이는 순간 방출했던 전류가 검기를 담고 있는 칼집에 가로막혔고,

채챙-!

채채채채챙!!

고작 2미터 높이로 던져졌던 칼집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칼집을 사이에 두고 공방을 펼치는 두 사람이 발생시키는 충격파와 자력이 칼집을 계속해서 허공에서 춤추게 만들었다.

스파아아아앗-!

수십 회의 공방이 펼쳐지는 동안 몇 송이의 꽃이 피었다가 졌다.

이를 악 물고 검술을 구사하는 아스모펠의 검기가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반면.

파직-!

파지지지지직!!

격류처럼 휘몰아치는 카일의 전류는 조금도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카일에게 있어서 전류란 끊임없이 순환하는 힘.

소모되지 않는다.

무한한 동력이다.

츠칵-!

검기의 봉우리를 만개시켜 카일의 시야를 방해한 아스모펠의 검이 카일의 쇄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아차한 아스모펠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으나.

뻐어어어어엉-!

악착같이 쫓아온 카일의 손바닥이 아스모펠의 가슴에 얹어진다 싶더니 발경이 전개됐다.

땡그랑!

허공에서 춤추던 칼집이 드디어 떨어진다.

“쿨럭....!”

속이 진탕된 아스모펠은 비명을 삼켰지만 각혈하고 말았다.

내장이 온통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실감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되어 지냈던 청년은 이제 없다.

카일은 쥬앙데르크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강해져 있었다.

1인자의 등을 좇던 2인자는 이제 없다.

나는 이제 2인자조차 못 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을 나는 크게 낭비해왔으니까.

나는, 정체되었다.

‘그리드 전하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아니, 그리드 전하께서 나를 찾아오시기 전에 스스로 각성했다면.

아니, 마리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피아로를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않았어도....

오직 후회로 점철 된 삶.

부끄러운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이 순간.

“.....”

아스모펠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휘청, 뒤로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레쉬가 잠자코 있는 메르세데스와 세 기사들에게 재촉했다.

“도와드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

“당신의 동료잖아요!”

제국 기사 중 아스모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타락한 영웅.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와 동료를 팔아넘긴 배신자.

새 황제 바사라가 모든 진실을 밝힌 반작용으로 인해서 아스모펠은 오물을 뒤집어썼다.

더 이상 영웅이라 칭송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의 기사들만큼은 아스모펠을 다시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가 과거에 배신했던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날의 모든 죄를 대부분 용서받았다는 뜻.

그가 용서받고자 얼마나 큰 용기를 내었을지,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감수했을지, 레쉬와 검은 발 기사단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기사들은 아스모펠을 진심으로 대단하다 느꼈고, 그가 힘들게 다시 잡은 기회를 통해서 과오를 씻어낼 수 있기를 응원했다.

한데 죽게 생긴 것이다.

“이미 당신들은 저분을 용서하신 거 아닙니까?!”

“.....”

“근데 왜....! 근데 왜 돕지 않고 외면하는 겁니까!!”

레쉬가 비난하듯이 소리쳤다.

그는 아스모펠과 아무런 친분이 없다.

아스모펠이 어떤 꼴을 당하던 그는 큰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는, 전투를 방관하고 있는 메르세데스와 전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기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워도....! 기사가 동료를 버려선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소리치는 레쉬의 시선은 메르세데스를 향하고 있었다.

기사를 불신했던 전 황제에게 유일하게 총애 받았고, 그렇기에 템빨국으로 보내졌던 전설의 기사.

레쉬는 그녀를 동경했기에 비겁한 감정에 숨어 기사도를 등지는 그녀의 행태를 더욱 더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은.”

레쉬를 빤히 바라본 채 침묵하던 메르세데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정신을 현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저분을 모르시는군요.”

세 기사들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부단장이 쉽게 당할 줄 알아?”

“저자는 내가 본 누구보다도 음흉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배신했던 거지.”

“부단장을 죽이는 건.... 우리가 될 것이다.”

“....?!”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들에 어리둥절하던 레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카일의 공격을 연달아 허용하고 흙바닥을 몇 바퀴나 뒹굴던 아스모펠이 끝내 손에서 검을 놓치고 있었다.

기사가 검을 놓친다는 건 즉, 죽음을 뜻하는 바.

“끝이다!”

승리를 확신한 카일이 전류를 계속해서 방출, 양손 끝에 모아 그것을 아스모펠에게 쏘았다.

아니, 쏘려다가 못 쏘고 신음을 토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움찔거리고 있던 아스모펠이 생뚱맞게도 칼집을 던져 카일의 눈을 찌른 탓이었다.

“크악....! 이, 이 비겁한 놈!”

목숨을 구걸하듯이 개처럼 바닥을 뒹굴던 것은 아까 던져놓았던 칼집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는가?

손에서 검을 놓친 것은 내 방심을 유도하고 칼집을 암기로 부리기 위함이었는가?

교전 중에 몇 번이고 벨트를 노출하며 그 어떤 암기도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한 밑작업이었고?

지독히도 음흉한 놈이다.

시야를 상실하고 뒷걸음치는 카일의 귓가로.

“나 같은 쓰레기에게 정정당당함을 바랐던가?”

아스모펠의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빛을 잃은 그의 눈동자에는 모든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피아로와 동료들을 배신했던 그날처럼, 그는 도의를 버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그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드를 위해서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왕께서 내게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 명하셨다. 그러니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

솔직한 심정이야, 죽고 싶다.

아직도 옛 동료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통스러워 당장 혀를 깨물고 자결하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왕께서는 아직이라고 하셨다.

그리드 전하께서는 내게 죽지 말라 하셨다.

그러니, 참아야한다. 살아야한다. 이겨야한다.

[당신의 기사 ‘아스모펠’이 고유 특성 <2인자의 저력>을 발휘합니다!]

“....아스모펠?”

막 세계수의 숲에 도착한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르는 그때.

그와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피칠갑한 아스모펠은 카일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혹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나? 템빨국과 제국은 동맹 관계를 맺었다고 들었다. 우리가 굳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지? 너희들은 내 앞길을 방해했고 내 명예를 실추시켰다. 무엇보다 너희는 나보다 약하니 힘의 섭리에 따라서 죽는 게 타당하다.”

“그런가. 미안하군. 네가 나보다 강하므로 죽이지 않고 제압하긴 어려울 듯하다.”

전성기의 아스모펠은 피아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다.

그의 ‘기준’이 피아로였기 때문이다.

어떤 상대를 만날지언정 무조건 피아로보다는 약했으니, 아스모펠은 자신이 피아로의 실력의 절반만 따라할 수 있어도 상대를 꺾을 수 있다는 확신을 품어왔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당신의 기사 ‘아스모펠’이 목표로 삼아왔던 1인자의 뒷모습을 떠올립니다.]

“무상농법 변화식.”

구오오오오오─

측량할 수 없이 커다란 그림자가 일대를 집어삼킨다.

저 멀리 뚜렷하게 보이는 세계수의 가지만큼이나 거대한 기둥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기가 아닌 강기의 집약체였다.

“이게, 무슨?”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사색이 되는 카일을 그림자가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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