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2화
“뭐? 오크 따위가 내 혈마법을 맞고도 멀쩡하다고?”
“쿠륵. 아프다. 뱀파이어. 나쁘다! 쿠륵!”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어린놈이 반말하지마라! 내가 네놈보다 수백 년은 더 살았다!”
“힘 센 사람이. 쿠륵. 어른!”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아악! 내 감자! 내 감자 내놓으라고!!”
채챙!
채채채챙!!
“.....”
누가 봐도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미소년 놀과 우락부락하게 생긴 30대 아저씨 테루찬의 감자 쟁탈전이 심화되자 이를 지켜보던 스컹크 일행의 표정이 멍해졌다.
혼란스러운 대화내용은 둘째 치고 흡혈종족 뱀파이어와 육식종족 오크가 감자를 놓고 다퉜으니 버그인가 싶었다.
‘저 빨간 감자가 특별한 건가...?’
스컹크 일행이 피감자에 주목하기 시작하는 그때.
‘오존과 치우.’
그리드는 환국의 조직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가람과 파그마는 일반적인 양반으로 그들이 환국의 ‘백성’이다.
그 위로 치우가 있어 백성들에게 시련을 안기며, 치우는 또 오존(五尊)을 섬긴다.
‘일단.... 일반적인 양반은 신이라고 볼 수 없어.’
그리드는 가람과 파그마에 대해서 나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무위는 필시 대단했고 특히 말년의 파그마는 어지간한 대악마를 압도하는 수준이었지만 신이라고 보기엔 큰 무리가 있었다.
가람의 경우 특기가 ‘방심’이라 그리드에게도 여러 번 당했을 정도인데 명색이 신이 그 정도로 어설플 리가 없다.
또한 헥세타이아가 파그마를 질투했던 이유는 ‘인간 주제에’ 신을 위협하는 대장장이 실력 때문이었다. 파그마가 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오존이나 치우부터가 신이고 그 아래 양반들은 신들의 후예쯤 되는 건가?’
가장 합당한 추측이다.
그리드는 양반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 오존 위로 또 왕 같은 존재가 있을지 등등을 생각해보다가 문득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것도 신의 권능이었군.’
과거, <하늘의 부름>이라는 히든 퀘스트가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모든 대장장이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발생한 대규모 퀘스트였는데 당시 그리드는 100명의 대장장이를 이끌고 동대륙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람을 만나 낭패를 겪었다.
당시 가람은 말했다.
‘네놈 하나 잡자고 벌인 일이건만─’
그렇다.
무려 수십, 수백 만 명의 대장장이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떠오른 퀘스트가 사실은 그리드 한 명을 저격한 함정이었다.
NPC에게 퀘스트로 현혹당하는 일, 그리드는 파그마의 기서를 찾았을 때부터 겪어봤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으나....
‘지금 생각하니까 소름 돋네.’
그 정도 규모의 퀘스트를 발동시킨다는 건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당시 가람을 도와 함정을 판 사람은 오존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쫓겨난 신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으며, 내게 썩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무저갱의 정체도 모른 채 탐사했다가 성공해서 환국에 진입했다면.... 나는 어떤 꼴을 당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쯤 되니 이정이 고맙다.
‘나름 기연이었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양반들과의 관계는 부정적으로 흘러갈 듯하다.
가람은 문제도 아니었다.
힘이 필요하다. 정보가 필요하다.
어느 날 또 함정에 빠져 위기를 겪을지 모를 일이다.
‘더 노력해야 돼.’
고작 400레벨을 돌파했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초월자가 됐다고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동식 대장간 같은 건 못 만드나?’
직업 특성 상, 그리드는 대장간에 틀어박혀 지내야하는 시간이 굉장히 많다.
이는 즉 사냥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뜻이며 성장의 저조를 의미했다.
‘사냥과 대장일을 동시에 하고 싶은데.’
물론 그리드에게는 휴대용 용광로가 있다.
하지만 휴대용 용광로 하나로는 완벽한 대장간 환경을 조성할 수 없었다. 휴대용 용광로를 토대로 제작하는 아이템의 종류와 재질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었으니 사냥과 대장일을 동시에 한다고 해봤자 능률이 적었다.
하지만 이동식 대장간이 있으면 어떨까?
‘사냥터 한가운데 대장간을 펼쳐놓고 작업하다가 노에들이랑 갓 핸드가 몹몰이 해오면 한 번에 쓸어버리고....?’
생각해보던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실현가능성이 꽤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큰 마차에다가 막사 형식으로 지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캠핑카처럼 말이다.
마침 그리드에게는 손재주 좋은 드워프 친구(?)도 한 명 있었다.
함부로 성을 무너뜨렸다가 그리드에게 약점이 잡힌 드워프 케를은 그리드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종족이니까 합당한 보상을 주면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거야.’
“전하.”
“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그리드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걸까?
세 명의 기사가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아로가 소개해주었다.
“순서대로 아멜다, 켄트릭, 단테라고 합니다. 저와 아스모펠이 적기사단을 이끌던 당시 이들은 각자 다섯 번째, 일곱 번째, 아홉 번째 기사라고 불리며 명성을 높였었지요. 워낙 거친 삶을 살아와 격식은 잘 모를지 몰라도 실력이 출중하고 충의를 아는 이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전하! 전하! 말씀 많이 들었어요!!”
“피아로 대장을 거둬주신 것으로 모자라 저희들의 누명을 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영광입니다. 늙은 몸이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만나서 반갑소.”
새로운 동료를 얻는 일만큼 기쁜 일은 세상에 또 없다.
하물며 이들은 전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들뜨지 않았다.
그의 고요한 시선이 세 명의 기사에게 머물지 않고 그들의 뒤편으로 향했다.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가 보였다.
몇 년 동안 홀로 떠돌며 옛 동료들을 모아온 아스모펠과 몇 달 전부터 그를 도와온 메르세데스.
넝마가 된 그들의 모습에 그리드의 가슴이 찌릿, 저려왔다.
“고생 많았다.”
성큼, 세 기사들을 지나쳐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의 앞으로 다가간 그리드가 그들을 꽉 끌어안았다.
지난 수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해온 그리드의 가슴은 무척 넓어 두 사람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마워.”
“....강녕하신 모습을 보아 기쁩니다.”
세 사람의 포옹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두 번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리드는 두 사람을 껴안고 있는 팔에서 끝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전하....”
“.....”
메르세데스는 소녀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 반면 아스모펠은 처참하게 얼굴을 구겼다.
죄인에게는 행복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멜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스, 아스모펠. 불쌍해.”
“.....”
***
<국왕의 검>을 꺼낸 그리드가 세 명의 기사들을 차례대로 관찰했다.
이름:아멜다
나이:37세 성별:여성
종족:인간
칭호:지리학자
*어떤 장소에서든 아군에게 유리한 지형을 찾아냅니다.
*파티를 맺는 아군의 지형적응력을 100퍼센트 상승시킵니다.
*자신이 속한 군대의 행군속도를 대폭 상승시킵니다.
칭호:수다쟁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첫 마디를 반드시 더듬어 적의 사기를 꺾고 능력치를 소폭 하락시킵니다.
*아군과 대화 시 낮은 확률로 버프를 부여합니다.
레벨:435
근력:2,673 체력:1,960
민첩:2,300 지력:2,105
스킬:[제국 검법(B)] [검술의 귀재(S)] [지리학(SS)]
전대 적기사단의 다섯 번째 기사입니다.
대대로 명명 높은 학자를 배출했던 대학자 가문의 외동딸 출신이나 검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적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가 전쟁에서 세운 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멜다의 경우, 싱클레드와 비교하면 레벨이 매우 낮았다.
싱클레드가 2번째 기사였던 점, 더군다나 아스모펠보다 강했다던 메르세데스의 평가를 고려해 봐도 레벨 차이가 너무 컸다.
싱클레드의 레벨은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455였으니까.
또한 싱클레드는 전투에 특화 된 칭호와 스킬을 대량 보유하고 있던 반면 아멜다는 좀 특이했다.
기사답지 않다고 할까.
별로 강해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능력치 총합이 비상식적으로 높았고 지리학을 활용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출중해보였다. 무엇보다도 <검술의 귀재>라는 스킬이 압권이었다.
<검술의 귀재>
‘검술’로 구분되는 스킬은 스킬북 없이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종류는 총 다섯 가지로 제한됩니다.
현재 습득 중인 검술(1/5):제국 검법
‘스킬북 없이 스킬을 익힌다는 게 뭔 소리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깨달았다.
‘교육이 가능하다는 건가?’
설마.
‘내 검무를 가르치면 그대로 습득하는 거야?’
아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검술의 귀재가 SS급 스킬이었다면 또 모를까, 공교롭게도 S급 스킬이다.
레전드리 등급의 스킬은 익힐 수 없을 것이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을 떠올렸다.
‘크라우젤은 검성이 되기 전부터 익혀놨던 검술이 엄청 많을 텐데.’
만에 하나라도 크라우젤이 아멜다를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근력을 상승시키는 계열의 검술도 있다고 들었어. 아멜다에게 그런 종류의 검술을 습득시키면 단점을 극복하고 엄청 강해질 듯하군.’
하지만 과연 크라우젤이 도와줄지는 의문이다.
‘다음에 부탁해봐야겠어.’
이름:켄트릭
나이:41세 성별:남성
종족:인간
칭호:섬멸의 기사
*물리공격력이 15퍼센트, 단일 스킬의 공격력이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자신보다 최대 생명력이 높은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힙니다.
칭호:선봉장
*모든 종류의 방어구를 착용할 수 있고 착용하는 방어구의 방어력을 10퍼센트 상승 적용 받습니다.
*전투에서 선봉에 설 시 최대 생명력에 비례하는 보호막을 얻습니다.
*전투에서 최초로 공격하는 대상에게 무조건 치명타를 입히고 이때 높은 확률로 즉사시킵니다.
레벨:440
근력:3,820 체력:2,190
민첩:1,215 지력:503
스킬:[제국 검법(B)] [돌진(A)] [돌진 명령(S)] [수급 베기(SS)]
전대 적기사단의 일곱 번째 기사입니다.
전장을 휩쓰는 능력이 독보적이었습니다. 피아로조차도 그와 함께할 때면 선봉을 양보했을 정도입니다.
이름:단테
나이:73세 성별:남성
종족:인간
칭호:배테랑
*모든 공격에 치명타가 적용되고 높은 확률로 약점 공격이 발동합니다.
*공격 시 대상의 방어력을 30퍼센트 무시하고 낮은 확률로 무장 해제 시킵니다.
칭호:노익장
*항상 치명타에 면역하며 근처에 있는 아군을 대신해서 피해를 입습니다. 아군을 대신해서 피해를 입을 때는 입는 데미지의 80퍼센트를 경감시킵니다.
레벨:480
근력:1,820(▼) 체력:650(▼)
민첩:715(▼) 지력:1,503
★이 인물의 수명이 다해갑니다.
스킬:[제국 검법(S)] [망량검(S)] [호위(S)] [저력(SS)]
전대 적기사단의 아홉 번째 기사입니다.
제국 검법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서 모든 적기사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지금은 실력이 많이 약해졌으나 때때로 놀라운 저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
켄트릭까지는 좋았다.
이건 정말 물건을 얻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단테의 정보를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자 그리드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수명이 다해갑니다, 라는 문구가 비수가 되어서 그리드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어쩔 수 없게도 칸을 떠올린 것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켠 그리드가 세 명의 기사들에게 최대한 활짝 웃어보였다.
“부족한 몸이오. 하지만 그대들의 왕으로 부끄럽지 않게끔 노력하겠소.”
“영광입니다, 전하.”
힘차게 대답한 세 명의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숲.
금빛 햇살에 물든 그곳에서 진행되는 기사의 서약식은 초라하지 않고 도리어 장엄했으며 성스러웠다.
이미 한 번 주인에게 버림받았던 기사들이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새로운 주인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약조했다.
“와아아아아아!!”
검은 발 기사들이 자신들의 입장도 잊고 환호하고 있었다.
‘정신 나간 놈들.’
병풍이 된 카일이 황당해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