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10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선생님께서 제게 말할 기회를 안 주셨습니다.”
“기회란 스스로 쟁취하는 것! 명색이 검성이란 자가 그리 쉽게 제압당해 기회를 잃어서야 쓰겠나!!”
“선생님께서 앞서 평가하셨다시피 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반면 선생님께서는 고결하신 탑의 결사 중 한 분이시니 저로써는 저항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에잉, 요즘 아이들은 약해빠져서 말이야. 나 때만 해도 검성쯤 되면 한 손으로 드래곤을 때려잡고 다녔는데.”
“그런 이야기는 전설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험험, 그만큼 용맹하고 무쌍했다는 말이지, 거참. 한 마디도 안 지려고 드는군.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모르는가?”
“죄송합니다.”
“....크흠.”
괴한에게도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천성이 제멋대로인 그조차도 크라우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억울한 상황에 놓이고도 끝까지 옳은 말만 하며 예의를 지키는 크라우젤의 태도가 그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군자가 따로 없도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한은 알고 있다.
사람의 성격이란 타고나는 것이며,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단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었고,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철부지도 아니었다.
오래 산 사람이 무조건 지혜롭고 현명하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 군자만 넘쳐서 평화로웠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 아이의 인품은 진짜다.’
깊이 한숨 쉰 괴한이 한탄했다.
“후우, 자네에게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난 이제 곧 죽을 목숨이거늘.”
“탑의 사정을 제게 유출하셨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체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어.”
“체벌이라는 게 사형이었습니까?”
“큰일 날 소릴! 자네는 비유와 과장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겐가? 무서워서 농담도 못하겠군!”
“죄송합니다.”
“후우....”
‘설마 두려워하는 건가?’
연신 한숨을 쉬더니 급기야 어깨까지 늘어뜨리는 괴한을 보자 크라우젤은 상당히 놀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같은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자존감이 강한 괴한이 두려워할 정도면 체벌이라는 것의 무게가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의 결사와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크라우젤은 단언해보였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오늘 들은 이야기를 외부에 발설할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자네는 탑의 이름이 왜 하필 지혜의 탑인 줄 모르는가 보군.”
“저 같은 속인이 결사 분들의 깊은 뜻을 감히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크라우젤이 몇 년 동안이나 랭킹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괴한은 어느새 크라우젤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혜로운 자들이 모여 세운 탑이기에 지혜의 탑인 걸세. 결사들은 내 행적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파악할 테니 내 실수를 가리는 건 불가능하다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못하는 이치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물론 크라우젤도 알고 있었다.
6년 전 탑을 방문했던 그는 탑의 결사 대부분이 소름 돋을 정도의 오성(悟性)을 지녔다는 사실을 목격한 바 있다.
하지만 눈앞 괴한처럼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한데 괴한은 자신 역시 다른 결사들과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묻어가고 있었으니 이쯤 되면 황당함을 넘어서 부러웠다.
‘여러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군.... 여태껏 특별한 근심걱정 없이 살아왔을 것 같다.’
장수의 비결일 수도 있다.
크라우젤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동안 괴한이 생색내듯이 말해왔다.
“뭐, 자네는 걱정 말게. 자네만큼은 체벌을 당하지 않게끔 내가 사력을 다해서 막아보겠네.”
“.....”
난 단지 듣기만 했을 뿐이다.
다른 결사들이 오늘의 상황을 파악할 경우 내게 체벌을 가하기는커녕 도리어 사죄의 뜻을 전해올 것이다.
지혜의 탑은 매우 이성적인 조직이었으니까.
한데 괴한이 생색을 내자 크라우젤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오만하게 웃은 괴한은 당당하게 질문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선구자는 누구인가?”
모른다, 라는 대답은 통하지 않는다.
나를 끌어내린 경쟁자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애초에 대답을 피할 이유도 없다.
지혜의 탑과 선구자는 상호 협력하는 관계.
탑과의 교류는 선구자에게 무조건 이롭다.
괴한이 내게 해줬던 이야기가 그리드에게는 <히든 퀘스트>로 다가와 막대한 보상을 선물할 것이었다.
“템빨국이라는 나라의 왕입니다.”
“템빨? 어감이 괴이하군.”
“무구의 힘을 빌린다는 뜻을 품은 단어입니다.”
“무구의 힘을 빌려?”
로브에 가려진 괴한의 얼굴이 똥 씹은 듯이 구겨졌다.
검이 빛나는 것은 검술이 있기 때문.
즉, 도구보다 기술이 위대함은 당연할진데 그 템빨국의 왕이란 작자는 자신과 완전히 반대되는 사상을 지닌 것 같았으니 벌써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괜히 탑을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뮐러와 비견되는 무재를 지녔으며 예의마저 바른 크라우젤과 재회할 수 있었으니 기뻤노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괴한이 크라우젤에게 악수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웠네. 다음에 만날 때는 그대가 다시 선구자이길 바람세.”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흐음....”
괴한이 눈에 이채를 띠웠다. 크라우젤로부터 열정은 느꼈지만 자신감은 읽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만한 무재의 자신감을 상실시킬 정도라니, 템빨국의 왕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작자란 말인가?
‘왕.... 왕이라.... 설마?’
괴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뮐러보다 뛰어난 무재를 지녔던 단 한 명의 존재, 그 또한 일국의 왕이었음을 상기한 것이었다.
‘설마 마드라의 후인인가?’
무패왕 마드라.
평생을 새장 속에 갇혀 싸우다가 날개를 펼쳐보기도 전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뮐러가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무재라면 마드라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무재였다.
마드라가 살아있었다면 지혜의 탑은 지금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탑의 수장은 평가할 정도였다.
왜?
드래곤이 모조리 봉인당해 탑의 존재의의가 사라졌을 테니까.
‘....훗, 너무 멀리 나갔군.’
괴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비급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난 마드라의 후인이 존재할 리 만무했을 뿐더러, 마드라는 고작 무구에 집착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자는 어떤 하찮은 병기로도 수만, 수십만을 학살하는 위인이었다.
‘템빨국의 왕은 아무래도 지략가일 확률이 높겠어.’
무재의 한계를 왕의 권력과 도구에 대한 의존으로 극복한 유형의 인물이라고 추측함이 옳다.
개인에 불과한 크라우젤이 감당하기엔 큰 장벽이리라.
판단한 괴한이 발걸음을 돌렸다. 상대가 누구인 줄 알았으니 찾아가는 일쯤이야 그에겐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그대로 떠나려하는 괴한에게 크라우젤이 질문했다.
“선생님의 존성대명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크라우젤은 괴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니 이름 정도는 물어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괴한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비반, 일세.”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괴한의 정체는 크라우젤의 예상대로였다.
2대 전 검성이었다.
***
-뭐해?
[대상이 귓속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님~?
[대상이 귓속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와, 진짜 대단하네.”
지혜의 탑의 정보가 필요했던 그리드는 보름 전부터 크라우젤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난 보름 동안 크라우젤은 단 하루도 어김없이 귓속말이 불가능한 지역에 있었다.
귓속말이 차단되는 지역은 대게 인스턴스 던전이나 금지 등의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에,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집중력과 지구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보름 이상 동안 수련이나 사냥을 유지 중이라는 건데....’
육포를 한 보따리 준비해 갔나보다. 잡템은 줍지도 않고 버리나보다. 물약의 소모를 최소화하나보다. 수리 키트는 워낙 무거워서 많이 챙기지도 못했을 텐데, 아이템 내구력의 소모는 무슨 수로 감당하는 거지? 설마 보조 무기를 돌려쓰면서도 사냥 유지가 가능한 건가?
‘생각해 보니까 측은하네.’
그리드는 수리 키트 없이도 아이템 수리가 가능했고, 근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크라우젤보다 훨씬 큰 무게 게이지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키르에게 빼앗았던 템빨콘 덕분에 스태미나 유지 면에서도 유리했다.
애초에 스틱세이의 매스 텔레포트가 있으니 사냥터와 집을 왕복하는 과정에 소모되는 시간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다.
크라우젤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는 뜻이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에게 동정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크라우젤은 둘 사이의 불합리를 굳이 자각하지 않았다.
크라우젤의 사정은 남들과 똑같았으니까.
그래, 크라우젤은 평범했다. 자신이 극복해야하는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측은하게 여기는 그리드가 도리어 비정상적이었고 개사기였다.
“흐음, 도대체 지혜의 탑이 뭘까.”
오직 선구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탑.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보고(寶庫)쯤으로 여겨왔는데 광룡철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이는 조직이었다니?
다소 경계심이 든다.
마법왕 골드히트가 탑주로 있는 <영원의 탑>처럼 음흉한 곳은 아닐까 싶다.
따앙! 따앙!
대현자 스틱세이조차 모르는 미지의 영역은 오랜만이었기에, 휴대용 용광로를 펼쳐놓고 아이템을 만들며 펫과 소환수로 사냥 중인 그리드는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소드 브레이커>의 제작을 완료하였습니다.]
“또 실패인가.”
그리드는 지난 보름 동안의 시간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 투자했다.
템빨골들과 노에, 랜디, 티라멧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사냥을 진행하는 한편 국가대항전 당시 사용했던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를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은 당연히 ‘성능’이 아니라 ‘형태’다.
그리드는 청룡의 부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청룡의 숨결과 아스타로트의 뿔을 이미 소진한 상태였다. 두 재료 중 아스타로트의 뿔은 재고가 남지 않았기에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의 성능을 재현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청룡의 소드 브레이커는 형태부터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형태를 완벽히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네.’
역시 휴대용 용광로와 모루만으로 제작하는 아이템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다음 국대전까지 잠깐’ 써먹을 아이템을 제작하겠답시고 대장간에 꼬박 이틀을 틀어박혀있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안 되겠어. 잠깐 귀환해야겠다.”
사방에 흩어진 채 사냥 중인 템빨골들과 노에 일당을 역소환한 그리드가 곧장 라인하르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보름 동안 만든 10자루의 소드 브레이커 중 9자루를 길드 창고에 넣어뒀다.
반출 권한은 극검과 이벨린 등 템빨단 내 상위 검사들로 설정했다.
그들이 나중에 창고를 본다면 알아서 가져갈 것이다.
비용도 양심껏 지불할 테고.
‘그 양심이 너무 대단해서 문제지.’
시세보다 더 쳐줄 때가 많다.
내게 필요 이상으로 고마워하는 그들이다.
‘이런 아이템쯤은 그냥 공짜로 받아가도 되는데....’
그리드가 소모하는 아이템 제작 재료 중 태반은 동료들이 공수해주는 것이다. 그리드야말로 늘 동료들에게 신세를 지는 기분이었다.
“쉬지 않고 대장간으로 가시는 건가요?”
귀환하자마자 갑옷을 벗어던지고 천 옷으로 갈아입는 그리드의 곁으로 메르세데스가 따라붙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푸른색 보석이 박힌 서클릿이 장식되어 있었다.
템빨단의 유일한 세공사 장인 엘리자베스가 수인족 왕의 눈물을 가공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화염술사 랭킹 1위 라엘라가 패시브 형태의 마법인 <화염의 축복>을 걸어놔서 원기 회복을 돕는 성능을 발휘했다.
안 그래도 강인한 메르세데스는 더욱 더 지치지 않게 됐다.
“응, 아무래도 좀 더 집중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리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활짝 핀 목련처럼 아름다운 메르세데스와 나란히 걷고 있자니 행복해서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꽃잎을 기어 다니는 송충이 같았다. 역시 외모란 상대적인 법이다.
“전하.”
성을 빠져나온 후.
지름길을 이용해 대장간을 향하던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제지에 걸음을 멈췄다.
“....?”
투명한 백호 검을 뽑아 쥔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앞을 가로막고 선 후에야 그리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수상한 인물이 접근해오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도 격이 부족하군.’
초월자의 격을 벌써 몇 번이나 쌓아올렸는데도 메르세데스와 비교하면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어느새 10미터 앞까지 다가온 괴한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누구지?”
“시중이 낄 자리가 아니다.”
“냥하핫!!”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리드의 곁을 맴돌던 노에가 자지러졌다.
“주인이 거지꼴로 다니니까 노예로 오해하는 거다옹~”
“크음.... 조용해, 이 노에야.”
급기야 발랑 뒤집어지는 노에의 토실토실한 뱃살을 살짝 꼬집어준 그리드가 상황을 살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메르세데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무구에 의존한다 하더니 과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아닌 것이 없구나.”
“귀하는 누구십니까?”
메르세데스의 말투가 의외로 정중했다.
감히 전하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으로 모자라 전하를 시중으로 착각했다는 이유로 꾸짖기에는 상대의 기도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은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하지만 꾸준히 성장 중이었고 대상의 실력을 파악하는 일쯤이야 쉽게 해내왔다.
한데 괴한을 상대로는 혜안이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그의 실력이 메르세데스를 넘어서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대를 만나고자 탑에서 왔네.”
“탑....?”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짜고짜 탑이라니 쉽게 이해가 안 됐다.
반면 그리드는 경악하고 있었다.
‘설마 지혜의 탑을 말하는 건가?’
탐욕은 이미 소모해서 광룡철의 성질을 억제했는데도 위치가 발각 당했다고?
지혜의 탑이 정확히 뭘 하는 조직인지 알 수 없었던 그리드가 장비를 꺼내기 위해서 인벤토리를 여는 순간이었다.
“어디 한 번! 새로운 선구자의 실력을 확인해 볼까!”
괴한이 소리치며 덤벼왔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지혜의 탑에서 보낸 살수(?)였다.
채앵-! 채채채챙!!
메르세데스와 괴한의 검이 허공에서 다섯 번을 연달아 얽혔다.
모두 메르세데스가 방어하는 형태였다.
부드럽게 회전하며 이어지는 괴한의 검이 나선을 이루자 메르세데스의 검은 쉽게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연신 미끄러졌다.
괴한이 감탄했다.
“내 일초를 버티다니! 대단하도다!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재가 있었구나!!”
스팟-!
“....!?”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 괴한이 메르세데스의 신형이 무너진 틈을 노리고 그리드에게 날아갔다.
메르세데스가 따라붙었지만 괴한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가락이 그리드의 혈을 점하고자 쇄도했다.
한데.
[<+4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을 착용하였습니다.]
[<+3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를 착용하였습니다.]
[<+4 란스티어의 망토>를 착용하였습니다.]
[<+7 꼬깔 투구>를 착용하였습니다.]
[<+7 템빨 왕관>을 착용하였습니다.]
[<+4 ><(파그마가 제작한)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착용하였습니다.]
[<+1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을 착용하였습니다.]
마침 인벤토리에서 모든 장비를 꺼내서 착용한 그리드의 급소들이 철저히 봉인됐다.
참고로 크라우젤이 착용하는 방어구는 ‘도포’로 천 계열이다.
민첩성을 보장하는 대신 물리적인 충격에 취약했다.
반면 그리드의 방어구들은 물리력에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톡.
“....?”
괴한, 즉 2대 전 검성 비반의 손가락이 발할라에 가로막힘과 동시에,
스카칵-!
메르세데스의 검이 비반의 등을 베었다. 정확히는 비반의 로브를 스친 수준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찰나 넋을 잃었던 비반이 그 와중에도 반응해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피한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 쌓아온 경험과 반복 수련의 힘이었다.
“하긴....! 일국의 왕이 평범한 시중을 거느리고 다닐 리 만무하지!”
잠시 조용히 선 채 생각해보던 비반이 그렇게 외쳤다.
그가 메르세데스에게 경고했다.
“탑의 존재는 외부인에게 유출돼선 안 되네. 하니 기사를 잠시 물리도록 하시게.”
“귀하는 대체 누구시죠?”
“탑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영원의 탑 말씀이신지요?”
“핫, 우리 지혜의 탑을 그딴 하찮은 마탑과 비교하다니.”
“지혜의 탑....? 처음 들어보는데요.”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꽤 긴 침묵이었다.
한참 동안 떨리던 비반의 눈동자가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그대가 왕궁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네. 왕궁의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대에게 예를 갖추는 광경을 확인했으며 그대의 기량이 이 도시의 정점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했네.”
그러니까 제발 맞다고 해라.
간절히 바라면서, 비반은 질문했다.
“그대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닌가?”
“아닙니다만.”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
‘미친 사람인가?’
‘미쳤다옹.’
그리드와 노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