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46화 (1,036/1,794)

템빨 54권 - 20화

“아쉽다. 정말로 아쉬워.”

템빨국과 가우스 왕국의 전쟁 영상을 시청한 한국인들이 탄식했다.

그리드의 활약이 크면 클수록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이 도리어 많았는데 이들의 연령대가 상당히 높았다.

최소 50대 중반에서 많으면 70대 초반.

대한민국이 e스포츠의 정점으로 군림했던 시절을 목격하거나 직접 체험한 세대다.

“게이머의 전성기는 짧은 법인데....”

게임 국제대회가 열리면 무조건 한국이 우승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대회 준우승 타이틀이 망신 취급을 받고 비난의 대상이 됐던 시절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황금기는 짧았다.

미국, 유럽, 중국의 자본력에 굴복하고 수많은 인재들을 해외에 빼앗긴 한국의 e스포츠 신화는 불과 15년여 만에 끝을 고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인재들이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해외 리그에 쏟아 붓기 시작하자 해외의 게임 수준이 한국을 따라잡고 이내 추월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Satisfy가 출시됐을 무렵 한국은 이미 ‘게임약소국’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위상이 추락해 있었다.

하지만 5년 전 그리드라는 혜성이 등장했다.

그리드는 누군가의 부모님으로 살아가느라 게임과 차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50, 60, 70세대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켜 국민들이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었다.

무려 20억 명이 플레이한다는 가상현실게임.

급기야 축구, 야구, 농구, 럭비 등의 인기스포츠 종목을 모조리 합한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시장으로 발전한 Satisfy에서 지존으로 군림하며 활약해준 그리드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인들은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영광을 잃어본 세대는 누군가의 시대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한 바 있다.

“아직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을 때 왕성하게 활동해야할 텐데....”

“그러게 말일세....”

게임은 여느 스포츠와 비교해도 선수의 전성기가 지극히 짧다. 보통 20대 중후반만 되도 노장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한데 그리드는 이미 서른을 넘겼다.

언제 다시 누군가에게 지존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국대전에 불참하겠노라 선언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당장 내년에 그리드의 전성기가 끝날 수도 있는 거고, 그리드의 전성기가 끝나는 순간 한국이 국대전 1위, 2위라는 타이틀을 두 번 다시는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 불안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올해야말로 반드시 국대전에 참가해야했던 게 아닐까....

많은 국민들이 근심했다.

대한민국에는 그리드 외에도 유라, 극검, 코크, 포식이불족발 같은 인재들이 즐비했지만 미국, 캐나다, 영국, 중국 등의 열강과 비교하면 선수풀이 무척 적은 편에 속했다.

더군다나 극검과 포식이불족발은 그리드보다도 나이가 많아 몇 년 내로 활약이 줄어들 공산이 컸다.

한국은 국대전 1위를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를 놓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근심이 깊어지는 그때 뉴스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속보)남미 최고 랭커가 한국인?>

<(속보)법무부, 대통령령으로 지슈카 특별 귀화 단행>

<국적법 제7조 제1항 제3호에 의거한 조치임을 밝혀>

<(속보)신궁 지슈카는 천재.... 한국어 이미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 놀라운 한국어 실력이 심사에 큰 영향을 미친 듯>

<대한애국협회장 강대한, 정부의 빠른 대처에 감사하다>

“....오우.”

“누나 나 죽어.”

쏟아지는 뉴스 내용을 재차 확인한 사람들의 근심이 거짓말처럼 씻겨나갔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최강의 하이랭커로 손꼽히는 신궁 지슈카.

잠재력이 가장 높은 랭커로 손꼽히는 그녀가 한국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대한민국에 드리웠던 암운이 걷히는 듯했다.

인터넷도 난리가 났다.

-와 갓한민국ㄷㄷ 세계최고미녀 2명 보유국가ㄷㄷㄷ

-미인들의 나라;;

-이대로 1세기만 지나도 한국인 외모 유전자 우월해질 듯.

-뇌절 자제. 한국이 아니라 그리드 집안 유전자만 우월해짐.

-....

-....

***

‘아버님의 생각이 틀리셨던 것 같습니다.’

레이단 사막 요격전의 결과를 보고 받은 네메시스 왕이 칵투스 왕릉을 찾아왔다.

템빨왕 혼자서 9만의 선봉대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고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불러들인 뱀파이어 군단은 이미 템빨왕의 부하가 돼있었다는 둥.

도무지 믿기 힘든 소식들을 취합해 궁리해본 네메시스 왕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밑바닥 출신인 템빨왕은 결코 가우스의 상대가 아니라고 장담했던 선왕의 유지는, 틀렸다.

‘아버님께서는 그리드가 단지 운이 좋아 왕이 된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실상은 저희야말로 운이 좋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평민에 불과했던 그리드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온갖 기적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 기적이란 행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선왕은 기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낮게 평가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태어난 순간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던 우리야말로 행운의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니었을까?

타고난 운명에 취해 시야가 매몰됐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에트날 왕국의 멸망을 보고 배웠어야했습니다. 템빨국이 건국되었을 때 많은 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싸움뿐이다.

궁전으로 돌아온 네메시스 왕이 갑옷을 입었다.

예식을 위한 치장이 아닌, 전쟁을 위한 무장이었다.

“지원군의 상황은?”

“여전히 폴드 왕국의 결사대에 발이 묶여있다고 합니다.”

“허, 폴드 왕국에 어떠한 저력이 있기에 4개국의 행군을 막아선단 말인가.”

“1왕자 샤이닝의 병법과 무재가 소문 이상이라 하옵니다....”

“템빨왕의 간택을 받는 자들은 하나 같이 대단하구나.”

준비해놓은 계책 중 하나가 또 다시 무용지물이 되고야 말았다.

템빨왕이 행사해온 기적은 행운이 아닌 실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재차 입증된 것이다.

역시 선왕의 평가는 틀렸다.

하지만 모든 잘못은 선왕을 설득하지 못했던 내게 있다.

속이 써 얼굴을 굳힌 네메시스 왕이 마지막 희망을 돌아보았다.

이제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금발의 소녀가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과실주를 마시고 있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패전 소식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제국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마탑의 괴물이 봤을 땐 템빨국조차 우스운 것일 테지.

“골드히트 공, 송구합니다. 공께 처음 의뢰를 드렸을 때보다 우리의 전황이 더 불리해지고 말았습니다.”

“요호호.... 신경 쓰지 마시오.”

10명의 대마법사를 홀로 압도할 거라는 소문의 마법왕, 골드히트.

이번 전쟁에 대비해 준비한 새로운 육신에 만족하고 있던 그가 싱글싱글 웃었다.

“이보다 더 힘든 전쟁이었어도 나는 흔쾌히 가우스를 도왔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골드히트 공....”

골드히트의 속내를 모르는 네메시스 왕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네메시스 왕은 골드히트가 가우스에게 입었던 옛 은혜를 갚고자 나서준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오해였다.

오직 자신을 위해 수천, 수만 명의 어린 아이들을 희생시켜온 괴물이 은혜를 알 리 만무하다.

‘브라함....’

골드히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와 브라함의 관계를 알고 있던 그는 부활한 브라함이 그리드 곁에 있을 거란 사실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

골드히트는 브라함과의 만남을 꿈꾸고 있었다.

템빨국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그리드와의 악연이 장벽이 될까 염려해서였고 둘째, 브라함의 실력을 직접 목격해보고 싶어서였으며 셋째, 자신의 제자들과 뇌신을 폐기물로 만들어버렸던 그리드를 적당히 혼내주기 위함이었다.

“요호...! 요호호홋....!”

스승 릴리스는 터득하지 못했던 강화 마법.

하지만 나는 다를 것이다.

브라함이 직접 내게 배움을 준다면 나는 반드시 깨우칠 수 있다

그리고 브라함은 릴리스의 제자였던 나를 외면하지 못하리라.

브라함과 릴리스의 관계는 결코 하찮지 않았으니까.

***

“와... 길이 끝도 없이 계속 나오네.”

“앞으로 보름은 더 이동해야할걸?”

“뭐? 그 정도야?”

무시무시한 강시들을 쓰러뜨리고 간신히 판게아를 벗어난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좌절감을 맛봤다.

본격적인 동대륙 모험을 위해선 우선 카라스에 들러야할 필요가 있었는데 거리가 예상 이상으로 멀어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길이 제대로 닦이지 않아서 말들도 너무 빨리 지치고.... 거의 온종일 걸어야하니까 미치겠네.”

“이럴 땐 억만장자들이 부럽다니까. 그런 사람들은 비룡 타고 금방금방 날아갈 거 아니야.”

“동대륙에선 비룡도 함부로 못 꺼낼걸?”

“왜?”

“용으로 승천하는데 실패하고 괴물이 된 이무기들이 비룡만 보면 질투심에 잡아먹는다더라.”

“별....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북쪽으로 가볼걸.”

“그거야말로 자살행위지.”

앞서 걷는 일행들로부터 북쪽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헤라의 귀가 쫑긋 섰다.

북쪽은 은인 켄트릭이 홀로 향했던 방향이다.

몬스터 군락들이 즐비한 곳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철강시도 우습게 처치했던 켄트릭 님에겐 큰 난관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조금 걱정은 된다.

“북쪽 몬스터 군락은 철강시랑은 비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각 군락의 보스들이 400레벨을 넘는대.”

“시작의 마을 근처 필드 보스 레벨이 400이상이라고...? 그게 진짜야? 아무리 동대륙이라지만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정상적인 반응이다.

400레벨 이상의 보스 몬스터, 서대륙에서는 상위 던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쉽게 믿지 못하는 일행에게 설명하던 사내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 판게아가 망하기 전에 동대륙에 왔었던 거 말해줬지?”

“응.”

“당시에 그리드가 하나의 군락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거든?”

“오?”

“근데 그 하나에서 멈췄어.”

“....?”

“이후에 다른 군락은 그리드조차 손대지 못했다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무도 그리드에게 점령당했던 큰 독 쥐 군락을 제외한 모든 군락이 멀쩡히 존재하고 있고. 지존조차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바로 북쪽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앞만 보고 걸어.”

“....!”

헤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아무리 켄트릭이 강하다고 해도 지존만 할까?

그리드조차 어쩌지 못했다는 몬스터 군락에 도전한 켄트릭이 헤라는 너무 걱정됐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 켄트릭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누군가를 도울 힘이 없었다.

가봤자 도리어 방해만 될 것이었다.

‘....내가 싸울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라 병마야.’

헤라는 의뢰인의 아들을 떠올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만을 학습해온 어린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었다.

헤라는 그 아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동안 잘 참았노라고 웃으며 말해주고 싶었다.

***

“휴우.”

그리드가 십년감수했다.

[게으른 소 군락의 지배자 <특등급 흑우>를 해치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흑우가 구슬피 웁니다.]

[판게아 북쪽 지역의 두 번째 관문을 최초로 돌파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도박꾼의 주사위>를 획득하였습니다.]

[<흑우의 뿔>을 획득하였습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