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22화
“신(神).”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된 존재.
흑발의 사내를 규정하던 하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큼 다가오는 사내의 표정과 몸짓, 심지어 걸음걸이까지에도 어떤 의미가 담겨있음을 엿본 것이다.
검무였다.
‘전장 한복판에서 의식을 진행하겠다고?’
왜?
무엇을 위한 의식을?
의문에 휩싸이던 하랑이 문득 눈치 챈다.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에 담긴 모멸을.
이는 즉 양반을 부정함이다.
‘...신살(神殺)의 의식!’
쿠르르릉!!
공간이 지배당한다.
사내가 펼치는 의식에 통제당한 대자연의 모든 기운이 하랑에게 살의를 표출했다. 그녀에게 썩 사라지라고 협박하듯이 포효했다.
‘아아, 그랬구나.’
위기를 코앞에 둔 하랑이 깨달았다.
한울의 말씀을 부정하며 궤변을 일삼던 형제, 파그마.
한울께서 그를 끝끝내 벌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지 하랑은 알게 됐다.
‘치우 당신이 파그마를 비호했던 거였어.’
당신은 파그마로부터 희망을 엿봤던 것인가.
파그마가 자신을 죽여줄 거라는 희망을.
콰르르르르륵!!
수십 줄기의 검기가 하랑에게 쏟아진다.
무엄하게도 신조차 잡아먹을 기세를 품은 검기의 격랑은 필시 굉장하여 수십 마리의 용이 날아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랑을 긴장시킬 수준이었다.
‘굉장해.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신을 멸할 수 없어.’
텅, 터텅! 터터터터텅!!
양반들 스스로는 권능이라 믿는 무형지기가 펼쳐진다.
하랑의 의지가 일대의 공기를 폭발시켜 용을 닮은 검기의 쇄도를 차단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공간 전체가 그리드의 지배하에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드가 하랑을 없애고자 전개한 초연살파극이 일으킨 파장은 일대의 모든 기운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하랑의 의지도 포함됐다.
덜덜덜.
하랑의 몸이 스스로의 의지와 달리 떨린다.
공포다.
이내 그녀의 의지가 완전히 꺾이자 무형지기가 흩어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직접 검을 휘둘러서 검기에 맞서야했다.
쾅!! 콰쾅!!
사신의 숨결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검기조차 운용할 수 없게 된 하랑.
그녀가 순수한 신체능력만으로 그리드의 검기를 베고, 막고, 떨쳐내기를 반복한다.
검과 검기의 충돌 때마다 찢겨지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피가 흩뿌려졌고, 검기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발생하는 폭발이 그녀가 걸치고 있는 의상과 장신구들을 벗겨내고, 깨뜨렸다.
“....”
십공신들이 숨을 죽였다.
고작 한 번의 호흡이 이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개의 검기를 모조리 베어 흩어버리는 하랑의 신위에 압도당한 것이다.
“....후우.”
하랑이 드디어 숨을 토했다.
그녀는 아직 완전치 못한 신살의 의식을 자신이 파훼했다고 믿었다.
흩어졌던 검기들이 다시금 허공에 응집해 떨어지기 직전까진 말이다.
“....!”
콰쾅! 쿠콰콰콰콰콰쾅!!
초(超), 연(聯), 살(殺), 파(派)에 이어 대미를 장식하는 극(極)의 묘리가 하랑을 폭격한다.
막 숨을 돌리고 있던 하랑의 허점을 정확하게 노리는 마무리 일격이었다.
“.....”
적막이 깔렸다.
하랑이 섰던 자리가 뿌연 먼지로 뒤덮였고 초연살파극의 검무는 종결됐다.
“커흑.... 쿨럭, 쿨럭!!”
검무의 마지막 동작에서 멈춘 상태로 몇 번이나 피를 토한 그리드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슈카가 그에게 달려가며 손을 뻗었지만 그의 곁에는 이미 유라가 있었다.
지슈카가 도착하기도 전에 유라가 그리드를 부축해 자신의 품에 안았다.
질끈....
지슈카가 입술을 깨무는 그때 뿌옇게 일어났던 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넝마가 된 하랑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처 입은 전신으로부터 피를 쏟아내면서도 꼿꼿이 선 그녀가 그리드를, 정확히는 파그마를 부정했다.
“부족해.... 이건 완전한 신살의 의식이라고 볼 수 없어.”
다만.
“사.... 살려줘....”
가짜 신에 불과한 우리를 멸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의식이다.
죽어가며 애원하는 나은이, 이미 앞서 죽은 그루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고통은 낯설지.”
씁쓸한 미소를 그린 하랑이 나은의 목을 꺾어주었다.
자신의 최후를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형제에게 안식을 선사하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로 불쾌했다.
아니, 이건 슬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하다.
인간들이나 흘릴법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물을 매만져본 하랑이 그리드에게 질문했다.
“네가 이곳에 찾아와 저지른 모든 일은 파그마의 뜻이야?”
“아니.”
유라의 가슴에 기대어 선 그리드가 4개의 갓 핸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답했다.
“나는 오직 내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해왔을 뿐이다.”
사람들을 돕고자 애쓰는 점이 닮아보일지 몰라도, 그리드와 파그마의 성향과 사상은 엄연히 달랐다.
그리드가 조금 덜 이기적이고, 조금 덜 오만하며, 훨씬 더 뛰어난 공감능력을 지녔다.
그리드는 확신한다.
“애초에 파그마는 나처럼 못하지.”
파그마는 지극히 효율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대의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그가 초왕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드가 장담컨대, 파그마의 성격으로는 이토록 단기간 내에 주작의 부활을 노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딱히 파그마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리드는 파그마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당당하게 말하는 그리드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하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파그마가 남들과 달랐다고 하나 결국 양반.
그 또한 인간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신의 형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며, 결국 진짜 신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양반이라는 존재가 더욱 더 덧없게 느껴졌다.
“파그마는 죽은 거야?”
“그래.”
“그렇구나. 환국을 떠났으니 수명을 잃었겠지. 그래도 훌륭한 제자를 남겼으니 우리처럼 허무하진 않았겠네.”
“.....”
그리드를 파그마의 제자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그리드는 파그마와 만나본적조차 없고 단지 그가 남긴 기서를 통해서 기술을 계승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긴장한 채, 아직도 죽지 않고 몸을 가누고 있는 하랑의 반격을 대비했다.
주륵.
그리드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막대한 반동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하나의 진원진기를 소모하여 2배 상승했던 공격력이 정상수치로 되돌아옵니다.]
[진원진기를 소모한 대가로 모든 자원 회복과 상태 이상 회복이 일시적으로 정지합니다.]
[<잠재력 개방>스킬 효과로 개화한 <초연살파극>을 사용한 대가로 현재 골절과 과다 출혈 상태를 겪는 중입니다.]
[5,900의 피해를 입습니다.]
[5,900의 피해를 입습니다.]
[5,900의 피해를....]
아직 유라가 등장하기 전, 그리드는 이미 스킬 창조권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자신의 분신이 사용했던 <초연살파극>을 떠올렸다.
언젠가 자격을 충족하면 자연히 습득할 여지가 있는 5융합 검무가 당장 필요하답시고 스킬 창조권을 소모한 셈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리드는 긴박했고, 당장에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최강의 스킬이 바로 5융합 검무였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시스템이 그에게 제동을 걸었다.
[현재 당신의 능력으로는 <초연살파극>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드의 의식에 이처럼 응답한 시스템은,
[<초연살파극>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잠재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잠재력이라는 단어가 그리드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잠재력 개방.
어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전 세계에 채 5명도 안 되는 플레이어가 보유 중이라고 알려진 준 레전드리급 스킬.
특정 조건 달성 시 개화할 스킬들을 미리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알려진. 즉, 비활성화 상태의 스킬 트리를 일시적으로 개방시켜준다고 알려진 그 회심의 스킬을 그리드는 떠올린 것이다.
초연살파극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경위다.
“그리드!”
십공신들이 그리드의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리드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알게 된 그들이 일제히 하랑을 경계하며 그리드를 호위했다.
여전히 가람과 전투 중인 은발 사내와 그리드 일행의 모습을 번갈아 살펴본 하랑이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신계라도 만들 셈인가...?”
이들은 필시 미약한 존재다.
지금쯤이면 이변을 감지했을 풍사와 운사 중 한 명만 등장해도 이들은 감당 못하고 전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의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 이들이 신격을 쌓을수록 오존도 좌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치우가 이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테고.
“기억해 둬. 모든 양반이 우리처럼 허술한 건 아니야.”
“....?”
“허송세월해온 우리와 달리 공부하고, 단련해온 양반들도 더러 있거든.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독해. 누구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뒤늦게 단련을 시작한 가람처럼 어설프지도 않아.”
마치 조언을 해주는 듯하다.
무슨 의도지?
양반의 저열한 성격을 알고 있는 그리드는 하랑을 의심하고 경계했다. 뒤로 어떤 수작을 부리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입조차 떼기 힘들 정도로 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단지 고통을 인내하고자 노력하는 그에게 하랑이 웃어주었다.
“죽기 전에 너를 남긴 파그마가 부럽네.”
순간.
콰자자자작!
하늘에서 떨어진 누군가가 하랑의 약해진 몸을 양 갈래로 찢어버렸다.
가람이었다.
“허억.... 허억....”
브라함과의 격전이 어지간히도 힘든 듯했다.
종잇장처럼 일그러진 가람의 얼굴은 땀과 피로 범벅이었고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했다. 계속해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보아하니 당장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한 명의 인간도 처리하지 못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놈들이군.”
이미 죽었던 나은과 그루, 그리고 지금 막 자신이 죽인 하랑의 시체에 부정하다는 듯이 퉤, 피 섞인 침을 뱉은 가람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랑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힘을, 정확히 말해선 그녀가 쌓아온 신앙을 흡수한 효과였다.
“뭐, 이쯤 되면 나 혼자서도 충분하겠지.”
가람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하랑과 자신에게 분산되었던 인간들의 신앙을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시킨 그는 전보다 완전해졌다.
훨씬 더 강해졌다.
제법 지친 은발 놈과 다 죽어가는 그리드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든 인간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품을 정도로.
“우선 이 역겨운 공간부터 바꿔볼까.”
스칵-!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해진 가람의 무형지기가 허공을 벤다.
그러자.
쩌적! 쩌저적!!
수천 개의 눈을 끔뻑이며 지상을 주시하던 지옥달이 반으로 양단된다 싶더니 유라가 소환했던 지옥이 통째로 갈라져 소멸했다.
양반들의 신성을 억제하던 필드 마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가람의 시선이 지슈카에게 꽂혔다.
주작의 축복을 받아 활활 타오르고 있는 주작궁을 손에 쥔 그녀의 잠재력을 가람은 좌시하지 않았다.
터엉-!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숨결 4개를 동시 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양반 중 하나였던 가람.
양반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재능과 투쟁심을 겸비하여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오다가 이 순간 완전히 각성한 그가 순보를 전개하자 십공신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호흡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순보의 발동은 하랑이 사용했던 순보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슈카의 사각에서 나타난 가람의 단창이 지슈카의 목덜미를 찌르는 바로 그때였다.
쩌정!!
조금 더.
여태까지보다 아주 조금 더 빨라진 그리드가 가람에게 쇄도해 공격을 날려 왔다.
기존의 공격들과 비교해서 조금 더 강력한 힘이 깃든 일격이었다.
“네놈?”
미세한 차이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드의 기습을 방어하는 가람의 몸이 살짝.
정말로 살짝 기울여졌고 이로 인해서 가람의 단창은 지슈카의 목을 찌르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다.
가람의 눈빛에 불신이 깃들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에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모습이 투영됐다.
“다 죽어가던 놈이 도리어 더 강해졌다고?”
“렙업했다, X새야.”
아껴뒀던 잔여 포인트도 사용했지만 거기까지 말할 여유는 없다.
“?”
가람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웬일인지 조용하다 싶었던 브라함이 온갖 구속 마법을 다중 전개해버리자 발생한 중력의 무게를 견뎌야했기 때문이다.
이를 악 무는 그의 둔해진 몸 위로 그리드의 검무와 십공신들의 궁극기가 쏟아졌다.
가람은 이를 잘 막아냈지만 반격에까지 나서지는 못했다.
[남방의 수호신 <주작>이 부활에 성공하였습니다.]
최악의 존재가 개입해온 까닭이다.
“큭....! 크아아아아아아아악!!”
가람의 상처 입은 육신과 영혼이 태양보다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불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드를 괴롭혔던 기나긴 악연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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