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10화
『다시 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5회 국가대항전 2일차.
하루 동안 진행된 13개 경기 종목에서 총 129명의 선수가 활약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 4명의 선수만을 주목했다.
유라, 지슈카, 크리스, 그리고 검성 크라우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압권의 활약을 펼친 사람은 의외로 유라였다.
『이때 각 선수들의 위치를 보십시오. 한국 선수들의 시야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습니다. 중국 선수들의 유도에 완전히 넘어가 사면초가의 형국을 맞이했죠.』
『다시 보니 정말로 그렇네요. 중국 선수들의 포지션이 완벽해요. 한국 선수들 입장에선 그들의 접근을 인지조차 못했겠어요.』
『맞습니다. 중국 선수들의 기습은 당연히 성공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재생되는 영상 속.
폭포를 등진 채 고립된 한국팀에게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은밀히 접근 중이다.
그들의 포지션은 한 마디로 완벽했고 이변은 없어보였다.
하늘이 검게 물들기 전까진 말이다.
『여기서 보면 하늘에 지옥 달이 뜨자마자 유라 선수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상태로 블랙홀을 소환해 저격총의 총구를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발포했죠.』
그리고 총탄은 포복자세로 이동 중이던 중국인 플레이어들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이때 영상이 정지되며 지옥 달의 모습이 클로즈업 됐다.
『직접 확인하시죠. 지옥 달의 수천 개 눈 중 가장 큰 4개의 눈이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지.』
『...!』
진행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패널이 지목한 지옥 달의 눈 4개가 정확히 중국인 선수들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떠올릴 수 있는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유라 선수는 지옥 달과 시야를 공유하는 건가요...?』
질문하면서도 황당하다는 표정들이다.
시청자들의 어안도 벙벙해졌다.
들끓는 분위기 속에서 패널은 장담해보였다.
『네, 확실합니다.』
오직 지옥에만 출현하는 저 달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확히 무엇이기에 지옥의 징벌자에게 협조하는가....
『장담컨대 유라 선수는 여태까지와 다릅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이미 수차례 보여준 바 있는 전설의 위엄을 그녀 역시 갖추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유라는 분명 작년에도 크게 활약했었다. 하지만 다른 전설들과 비교해서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같은 전설인 크라우젤은 물론이고 지발에게도 패배했으니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의 그녀는 누가 봐도 달랐다.
이미 첫날부터 지발에게 복수했을 뿐더러 오늘의 협곡 전략전에선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중국팀을 무참히 박살냈다.
-달이랑 시야 공유 ㅡㅡ; 저거 거의 인공위성 운용하는 급이네.
-역대급 개사기 스킬임.... 크라우젤이 1대1 전면전에 특화된 반면 유라는 규모가 큰 전투일수록 더 빛을 발할 듯. 옆에서 누가 지켜만 주면 못할 게 없어보임.
-그럼 그리드는 어디에 특화됨?
-ㅋㅋㅋ질문이라고 하냐? 갓리드는 모든 전투에 특화돼 있지.
-그리드 보고 싶다.
-그러게....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아무리 열정적으로 떠들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울수록 시청자들은 그리드를 비교대상으로 삼았고 결국 그리드와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작년의 마왕 그리드가 펼쳤던 활약이 워낙 강렬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드 탓에 자극의 역치가 높아진 대중의 입장에선 유라도, 크라우젤도 아직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대중은 더 큰 전율을 원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줬던 전율 이상을 맛보기 위해선 그리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우울해졌다.
정작 그리드가 활약할 때는 싫어했던 안티들조차 이제는 그리드를 그리워할 지경이었다.
단.
-그래도 데미안은 기대해볼만 할 듯.
-그건 인정이지.
사람들은 적어도 마왕 토벌전만큼은 기대했다.
데미안 자체가 마왕의 버프 효과에 큰 특수를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사람들은 특히 데미안의 사천왕에게 주목했다.
레베카의 딸들과 템플러의 수장....
-제발 0.5그리드만 해줘라, 데미안.
-0.1만 해줘도 볼만할 듯....
뭐, 또 다시 그리드와 비교하면 평가가 박해졌지만.
***
그리드는 비교적 최근에야 호흡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 발생하는 찰나의 빈틈을 노리는 고수들과 대결하며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얻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쩌엉-!!
그리드가 제련한 2개의 숨결을 하나로 단련하고 융합하기까지 소요한 시간은 불과 27초.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리드가 예상했던 이론상 최대 속도보다 무려 2초나 단축된 시간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집중력이 합일해 일으킨 쾌거였다.
“후우...!”
군더더기 없는 동작을 위해 무호흡 상태를 유지했던 그리드가 드디어 숨을 토했다.
팽창하는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있었다.
‘이거.... 원래는 실패하는 게 정상이었다.’
2개의 숨결을 단련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리드는 깨달았다.
숨결과 숨결의 융합은 본래 ‘불가능’하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신에 필적하는 수준이 아니라 헥세타이아 신이 직접 나서도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각자 상반되는 속성을 지닌 숨결들이 필사적으로 서로를 거부했고, 이때 발생하는 온갖 반응이 대장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작의 숨결은 스스로 불타 소멸했으며 백호의 숨결은 단단히 굳어 대지에 스며들었으니 손써볼 도리 자체가 없었다.
이는 결코 바뀌지 않을 섭리와 같았다.
하지만.
[<주작의 숨결을 흡수한 백호의 숨결>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드는 2개 숨결의 융합에 성공했다.
그리드의 대장장이 기술이 핵세타이아의 기술마저 초월해서?
전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술’로는 2개의 숨결을 융합시키지 못한다. 아예 불가능하다.
그리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작의 숨결이 나를 위해서 희생해줬어.’
백호의 숨결과의 융합을 거부하며 스스로를 불태우려했던 주작의 숨결이 돌연 태도를 바꿨다. 불길을 억누르더니 그리드의 망치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서히 백호의 숨결에 스며들었다.
오직 그리드를 위해서 자존심을 버린 주작의 숨결이 백호의 숨결에게 굴종한 것이다.
이를 흡족히 여긴 백호의 숨결은 주작의 숨결을 흡수해버렸고.
하나로 융합된 숨결의 이름이 ‘주작의 숨결을 흡수한’ 백호의 숨결인 이유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깃들어 있는 이 백색의 영롱한 구슬은 엄밀히 따지면 백호의 숨결로 분류해야 옳았다.
‘완전한 융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리드가 원했던 결과는 단순하다.
주작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의 기능을 모두 온전히 지닌 전혀 새로운 숨결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물은 바람과 달랐다.
백호의 숨결의 기능은 온전함을 넘어서 더욱 강력하게 구현된 반면 주작의 숨결의 기능은 절반가량밖에 구현되지 않았다.
<주작의 숨결을 흡수한 백호의 숨결>
주작의 기운을 흡수하고 더욱 강력하게 거듭난 백호의 기운입니다.
인벤토리에 지니고만 있어도 땅 속성 내성이 60퍼센트, 화염 속성 내성이 20퍼센트, 생명력 회복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백호의 기운을 불어 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의도와 다른 결과물.
하지만 그리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건 실패가 아니야.’
아니, 오히려 좋다.
강화 된 주작의 숨결이 올려주는 화염 내성은 40퍼센트, 강화 된 백호의 숨결이 올려주는 땅 내성은 40퍼센트다.
주작의 숨결을 흡수한 백호의 숨결의 화염 내성이 비교적 낮다곤 해도 그만큼 땅 속성 내성이 올랐고 회복력 상승 옵션까지 추가됐다.
‘이쯤 되면 방어력 옵션이 내 의도보다 훨씬 더 높게 붙겠지.’
주작의 숨결을 흡수하고 강화될 청룡의 숨결과 현무의 숨결이 기대될 지경이다.
‘주작이 내게 정말 많은 걸 줬구나.’
주작을 부활시키지 못했다면 숨결의 융합을 평생 시도조차 못했으리라.
주작에게 새삼 큰 감사를 느낀 그리드가 주작의 숨결을 흡수한 백호의 숨결과 탐욕을 함께 용광로 속에 넣고 제련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야말로 본격적인 제작 단계였다.
‘견갑의 형태는 크게 2개.’
날개처럼 펼쳐진 형태와 둥글게 말린 형태로 나뉜다.
전자는 어깨를 덮는다는 느낌이고 후자는 어깨를 감싼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 견갑의 형태는 전자에 속했다.
기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단지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 어깨를 감싸는 형태의 견갑은 아무나 쉽게 만들지 못했다.
대장장이 중에서도 특히 기술이 뛰어난 장인들만이 어깨에 확실히 밀착되는 둥근 견갑을 제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리드도 둥근 견갑을 제작할 계획이다.
활동성, 방어력, 내구력 등.
날개형 견갑과 비교해서 둥근 견갑의 장점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화려하지 않다는 점이겠지.’
귀족이나 왕족들은 대부분 날개형 견갑을 애용한다. 좌우로 크게 펼쳐진 견갑에 금이나 은을 덧칠하고 각종 보석을 박아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써먹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사치를 부릴만한 입장이 아니다. 보여주기식 예복을 만들 시간에 실용성 있는 장비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서 강해져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궁전에 머무는 시간보다 전선에 서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투왕이기에.
쩌엉-!!
숨결과 하나의 쇳물로 섞여서 흘러나온 탐욕을 그리드가 망치로 후려치자 강력한 반동이 발생했다.
안 그래도 맞을 때마다 가시를 방출하며 그리드를 위협했던 백호의 숨결이 주작의 숨결을 등에 업고 더욱 흉포한 가시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끝이 뾰족하게 갈린 돌이 뜨겁게 달궈진 상태로 튀어나와 그리드의 손목과 팔, 그리고 가슴과 목을 찔렀다.
물론 순순히 당해줄 그리드가 아니었다.
예전, 처음 백호 검을 만들었을 때는 이놈의 가시에 아주 호되게 당했다지만 세월은 흘렀고 그리드는 성장했다.
“야, 야. 진정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그리드가 가시들의 기습을 피해버렸다.
광물을 망치로 때릴 때마다 불규칙한 지점에서 솟구치는 가시를 육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반응하는 식이었다.
“....”
광물이 잠잠해졌다.
망치에 맞아도 더 이상 가시를 쏘지 않았다.
그리드가 자꾸 기습을 피하자 탄복해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거나 하는, 그런 아름다운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뿌득!
뿌드드득!!
그리드가 망치질할 때마다 숨결과 하나로 거듭난 탐욕이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내구력을 자랑하는 절대적인 금속으로 숨결을 억눌러 가시의 방출 자체를 차단시켰다.
그리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쩌엉! 쩌엉! 쩌엉!!
‘대장장이’ 그리드는 지치지 않는다.
작업을 끝낸 후라면 또 모를까, 작업 도중에 쓰러진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다.
꿈틀...! 꿈틀!
그리드의 망치질 횟수가 늘어날수록 숨결은 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부질없었다.
그리드와 탐욕의 무한한 공세 앞에서 녀석은 점차 기세를 잃었고 탐욕에 잠식되어갔다.
그리고 머잖아.
“좋아.”
탐욕과 숨결이 완전한 하나로 거듭났다.
미소를 거둔 그리드가 견갑의 제작에 돌입했다.
목표는 평생템이다.
그리드는 앞으로 평생 두고두고 써도 아깝지 않을 끝판 왕 스펙의 견갑을 반드시 만들어낼 각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