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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92화 (1,082/1,794)

템빨 56권 - 20화

키야아아아아아━!!

“으윽!”

거대하고 흉측한 것은 원초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법이다.

현무는 단지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을 뿐이었지만 하이랭커들은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현무의 거대함에 위협을, 생김새에 혐오를 느꼈다.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가 느끼는 혼란은 오히려 더 컸다.

아는 게 많기에 발생한 부작용이다.

‘이게 사방신이라고?’

그리드는 알고 있다.

사방신은 인류의 염원으로 탄생한 수호신이다.

인류의 안정과 번영을 돕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당연히 인류에게 호의적이었고 존재 자체가 인류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추측 따위가 아닌 실제다.

주작의 부활이 남방을 풍요로 물들이는 광경을 그리드는 목격한 바 있다.

한데 현무는 전혀 달랐다.

현무의 부활은 북쪽의 풍요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뱀의 비늘에서 스며 나오는 검고 끈적한 액체로 대지의 문명을 부식시켰고, 거북이 등껍질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분화구가 내뿜는 연기로 하늘의 태양을 가렸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죽음이……!]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하는 초월자의 격이 그리드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쉬지 않고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탓에 그리드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건 수호신이 아니야.’

급기야 웅덩이를 이룬 검은 액체의 규모가 점차 커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리드는 확신했다.

‘흉신이다.’

주작과는 전혀 다르다.

현무는 단지 존재만으로 인간의 목숨과 운명을 옥죄는 해악이었다.

본래부터 그랬던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십이지들은 말했다.

현무는 사방신 중에서도 가장 순수했다고.

현무가 인공적인 물질을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이유 또한 결국 인간을 위해서라고 했었다.

‘자연을 보존함으로써 인류의 터전을 지키는 거라고 했던가.’

군대가 없으면 전쟁도 없다는 주장과 비견될 정도로 극단적인 논리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현무의 모든 행동은 인류를 위하는 마음, 혹은 본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현무가 내뿜는 독무가 태양을 완전히 가린 탓에 세상에 밤이 찾아왔다.

생명을 시들게 만드는 이 어둠이 과연 인류를 위함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뭔가가 잘못됐다.’

부활의 발단부터 기이하다.

양반들이 의도적으로 풀어놓은 듯하다.

‘현무를 이 꼴로 만든 것도 놈들의 짓이겠지?’

그리드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그때였다.

“빌어먹을! 보물을 숨겨 놨다더니 괴물을 숨겨 놨었군!”

“양반에게 속은 거다! 도망쳐야 돼!”

“하지만 퀘스트를 실패하면 우린 전부……!”

“퀘스트 내용은 보물을 지키라는 거였잖아! 하지만 우리는 지켜야 할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여기선 도망치는 게 맞아!”

하이랭커들이 소리치며 분주히 움직였다.

과연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나서 현무의 비늘을 타고 떨어지는 검은 액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모습들이다. 독무에 조금이라도 피부가 닿을 때면 즉시 해독제를 꺼내 마시는 동작도 신속했다.

하지만 일부 마법사들의 사정은 썩 여의치 않아 보였다.

지력에 스탯을 투자하는 탓에 신체 능력이 비교적 낮은 그들은 곳곳에 고인 검은 웅덩이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동시에 피하기 벅차했다.

“어이! 이리로 와!”

탱커들이 마법사들을 돕고자 나섰다.

마법사들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방패를 세워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액체를 막았다.

현무의 권능을 모르기에 행한 어리석은 실수였다.

치이이익!

“헉?”

검은 액체에 닿은 탱커들의 방패가 부식되어 쥐에게 뜯긴 걸레처럼 변했다.

보통의 물건도 아니고 호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어구조차 무방비하게 녹아 버릴 줄은 예상치 못했던 탱커들이 무척 당황했다.

키야아아아아아아━!

현무는 지상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보살펴야 할 인류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여전히 하늘을 향해 포효했고, 녀석의 목청이 떨릴 때마다 물결치는 비늘들의 틈새에선 또 새로운 검은 액체가 스며 나와 비처럼 흩뿌려졌다.

“젠장……!”

방패를 잃은 탱커들과 그들의 뒤에 숨은 마법사들의 안색이 모조리 창백해졌다.

그들의 머리 위로 집채 같은 크기의 검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실드!”

“안티 매직!”

마법사들이 각종 마법을 전개했지만 부질없었다.

실드는 액체의 질량을 감당하지 못했고 안티 매직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죽는다!’

랭커들이 떠올림과 동시에,

스파앗!

금발의 침입자.

누군가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드의 기사라는 그자가 검은 물방울과 랭커들의 사이에 나타났다.

웬일인지 갑옷과 투구는 벗고 있었다.

티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견갑과 각반, 그리고 부츠를 무장한 상태였다.

투콰악!!

본래라면 랭커들을 적셨어야 할 물방울이 금발의 기사를 덮치며 사방으로 튀었다.

치이익!!

금발 기사의 견갑과 각반, 그리고 부츠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 이봐!”

“꺄악!”

백골조차 남지 않고 녹아 죽을 것이다…….

어째서 저자는 우리를 도운 것일까?

금발 기사의 이해할 수 없는 희생에 놀란 랭커들이 비명을 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치익!

꽈득! 꽈드득!

치익!

꽈득! 꽈드득!

검은 액체에 닿자마자 녹는다 싶던 금발 기사의 견갑과 각반, 그리고 부츠가 곧바로 복구됐다. 그리고 다시 녹기를 반복하더니 또다시 형태를 되찾았다.

그와 같은 과정이 빠르게 수십 회 반복하는 동안 금발 기사의 육체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상하지 않았다.

단지 티셔츠만이 녹아 사라졌을 뿐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랭커들에게 반 나신이 된 금발 기사가 말했다.

“이 액체는 인공적인 물질을 소멸시킬 뿐이지 생물에겐 무해해. 그러니까 다 벗고 뛰어서 도망쳐라.”

“엣?”

벗으라니?

여성 랭커들이 난처해하는 반면 망설임 없이 아이템을 벗어 던진 남성 랭커들은 금발 기사에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은 우리의 적이잖아! 왜 갑자기 우리를 돕는 거지?”

금발 기사.

아스모펠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를 적이라 생각한 적 없다만.”

적으로 여겼다면 보자마자 죽였을 것이다.

나의 검은 너희들의 방패를 꿰뚫는 수준을 넘어서 갑옷까지 양단할 수 있었으니까.

“잔말 말고 어서 피해.”

그리드가 재촉했다.

그리드는 랭커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경위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저들 또한 하늘의 부름에 이끌려 왔을 테지.’

저들은 양반 혹은 오존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조만간 뼈저리게 후회할 신세들이다.

굳이 나까지 저들에게 고통을 안길 필요는 없다.

가람에게 학살당했던 대장장이들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가 착잡한 심경으로 현무를 올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세상에서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포효하는 놈의 모습은 대악마보다 더 악마 같았다.

“어……?”

금발 기사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자리를 벗어나고자 급히 움직이던 랭커들이 갑자기 석상처럼 굳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금발 기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찌직.

[<베리드의 인피면구>의 내구력이 1 하락하였습니다.]

대악마 중에서 신과 비견될 만한 존재는 몇 없다.

하물며 서열 22위에 불과한 베리드는 신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베리드가 만든 인피면구는 현무의 권능 앞에서 무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찌지직.

내구력 하락의 반동으로 인피면구가 벗겨진다.

화려하게 나부끼던 금발이 짧은 흑발로 변하였고 차분했던 눈매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확 펼쳐지는 가슴과 두꺼운 허리를 구성하는 근육이 무신의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그리드?”

금발 기사의 실체를 알게 된 랭커들이 경악하더니 이내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렸다.

그들을 엄습하는 감정은 분노였다.

“그리드!”

급기야 랭커 몇 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홀로 현무를 마주하고 선 그리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부바트, 셰인, 로넘 등.

각국을 대표하는 면면들이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매번 국가대항전 때마다 그리드에게 고배를 마셨다는 점이다.

“그리드! 네가 왜 우리를 돕는 거냐!!”

랭커들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특별한 존재다.

시기하되 선망하며 목표로 삼았다.

그래, 목표다.

그리드가 싫든 좋든 그를 보고 배우며 그림자라도 따라잡고자 발악해 왔다.

그리드가 자신들을 뒤돌아봐 주기를 은근히 바라 왔다.

“너는… 너에게 있어서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냐……!”

부바트가 올해 국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드의 불참 선언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단지 시시하다는 이유로 국대전에 불참하겠다는 그리드의 인터뷰를 보면서 부바트는 각오를 다졌었다.

자신이 강해지겠다고.

반드시 강해져서 그리드가 두 번 다시는 시시하다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끔 콧대를 눌러 주자고.

이번 퀘스트에 참가한 것도 강해지기 위한 일환이었다.

하지만 퀘스트는 기회가 아닌 위기가 되었으며 그 위기를 그리드가 극복시켜 주려 하고 있었다.

부바트는 이 상황을 용납하기 싫었다.

“우리를 훼방 놓기는커녕 돕다니……! 우리는 너의 경쟁자조차 못 된다는 뜻이냐!!”

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쳐 묻는 부바트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잠자코 선 다른 랭커들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리드에게 괜한 투정밖에 못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치가 떨렸다.

랭커들 스스로도 이해 못할 복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해했다.

그리드야말로 약자의 심정을 잘 알았으니까.

“너희들이 뭔가를 오해하나 본데.”

“현무의 분노가 하늘을 향해 있군.”

“자극해서 지상을 불태우게끔 유도하면 된다.”

마침 하늘로 떠올라 저들끼리 대화하는 양반들을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잠재력 개방>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꿔. 너희들에게 다시 끌어내려지는 악몽을.”

“……!”

“내가 너희를 도운 이유는 너희를 무시해서가 아니야. 그냥 도리를 행했을 뿐이지.”

“저놈은 뭐지?”

“없애라.”

스팟!

랭커들과 대화 중인 그리드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세 명의 양반이 공간을 도약했다.

거리라는 개념을 무색하게 만들어서 그리드에게 찰나지간에 도달했다.

‘신’들의 위용에 전율한 랭커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촤르륵-!

세 자루의 연검이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여 그리드를 휘감더니 급소를 찌른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랭커들의 시선으로도 좇기 힘든 빠르고 현란한 협공이었다.

반면 그리드의 공격은 빠르지도, 현란하지도 않았다.

랭커 중 단 한 명도 그리드의 검술에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파르르…….

그리드의 급소를 찌르기 직전에 멈춘 양반들의 검끝이 흔들린다.

“……?”

“……?”

잠시간의 정적.

이어서 양반들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고,

푸화하하하하학━!

양반들의 목과 가슴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쳤다.

삼십만대군 잠행검.

삼십만 명의 적군에게 자각조차 못하는 죽음을 안겼던 무패왕 마드라 최고의 암수가 그리드의 손끝에서 재현된 것이다.

[크리티컬!]

[<삼십만대군 잠행검>의 효과로 치명타 데미지가 2,000퍼센트 상승 적용합니다!]

[<삼십만대군 잠행검>의 효과로 대상이 약점을 노출하였습니다!]

[당신의 육신이 <삼십만대적검>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신체에 큰 부담이 작용하였지만 <주작의 가호가 깃든 백호의 견갑>의 효과로 부상을 방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끅!”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목을 베인 선두의 양반이 특히 큰 중상을 입었다. 눈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피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즉시 백호의 숨결과 주작의 숨결을 운용하여 회복을 시도했다.

상식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반응속도와 정신력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그리드는 양반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신격.”

휘몰아친다.

“잠재력 개방.”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

도륙.

한낱 인간이 신을 처참히 죽이는 광경을 목격한 부바트와 랭커들이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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