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22화
“언젠가 우리가 전쟁에서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적이 아닌 아군이길 바란다.”
부바트에게 커다란 감격을 주었던 말이다.
목표로 삼아 왔던 지존에게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들은 부바트가 느낀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이 컸다.
훗날 지존과 함께하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기에 그는 더 큰 열정을 품을 수 있었고 쉬지 않고 노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망도 컸다.
“시시하다.”
국대전 불참을 선언했던 그리드의 그 비수 같은 한마디가 부바트에게 상실감을 안겼다.
“우리를 훼방 놓기는커녕 돕다니……! 우리는 너의 경쟁자조차 못 된다는 뜻이냐!!”
급기야 재회한 그리드가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자 부바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2년 전의 그 말은 겉치레에 불과했을 뿐이냐…….
부바트는 그리드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고, 그런 부바트의 시선을 그리드는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너희를 도운 이유는 너희를 무시해서가 아니야. 단지 도리를 행했을 뿐이다.”
“……!”
부바트의 정신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분노에 매몰되어 협소해졌던 그의 사고가 불시에 회복됐다.
그 결과.
“초연화.”
“십자인대 후리기!”
부바트는 그리드와 함께하겠다던 꿈을 이뤘다.
동대륙의 ‘신’들에게 그리드와 함께 무력으로 항거했다.
의외로 두렵지 않았다.
최강의 군중제어기를 자랑하는 자신과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리드가 함께인 이상 상대가 설령 신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암 드래그!!”
“연살화극.”
저항이 불가능한 군중제어기에 이어지는 일격필살의 공격.
그리드와 부바트의 조합은 역대 최강을 논해도 좋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전생에 부부였던 것은 아닐까 의심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한 궁합을 자랑했다.
“쿨럭, 쿨럭!!”
“이놈들……! 이놈들이!!”
벌써 몇 번째인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땅에 메쳐지고 칼에 찔리며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양반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여기서 부바트의 약점이 드러났다.
도발기가 없다는 점이다.
보통의 이니시에이터는 군중제어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발생하는 간극을 도발기로 메우고 보조 탱커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부바트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균형의 피해자인 것이다.
크러셔.
저항 불가의 군중제어기를 ‘다수’ 보유한 이 히든 클래스는 밸런스상의 이유로 도발기가 전무했고 탱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드!!”
흙바닥을 뒹굴다가 벌떡 일어난 양반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그리드에게 달려가자 놀란 부바트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필연적으로 딜러에게 집중되는 어그로와 이를 제지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한계에 한탄한 부바트는 그리드의 죽음을 예감했다.
부바트는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템빨왕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
크허어어엉━!
그리드는 딜러가 아니다.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올라운더다.
쩌저저저정!!
“뭣이?”
양반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미 진즉부터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인간 놈에게 단죄를 내리고 싸울의 저승길 동료로 보내 줄 계획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화르륵!!
보폭을 넓히고 상체를 기울여 맹수의 포복 자세를 재현한 그리드는 여태까지와 다른 견고함으로 양반들의 검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불꽃을 소환하고 있었다.
<화염을 부르는 백호 자세>가 불러일으킨 불꽃이었다.
‘이것은 주작의?’
예상치 못한 불길에 놀란 양반들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크나큰 실수였다.
그리드의 생존력이 바퀴벌레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에 저지른 실수.
[<화염을 부르는 백호 자세>의 효과로 생명력 회복력이 50퍼센트 상승합니다.]
[<탐식의 룬>에 봉인되어 있던 대악마 벨리알의 힘을 개방하였습니다!]
[벨리알의 세 가지 권능 전부를 인간이 소화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당신의 육체에 힘을 실어 줍니다. 대악마의 힘이 주는 압박을 견뎌 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 가지 권능을 동시에 소화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벨리알의 세 가지 권능 <어둠>, <불>, <거짓> 중 하나만을 택일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불의 권능을 선택하였습니다!]
[벨리알의 힘이 유지되는 2분 동안 패시브 스킬 <불꽃 여왕>이 적용되며 <여왕의 업화> 마법과 <업화의 길>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불꽃 여왕>의 효과로 생명력 회복력이 300퍼센트 상승합니다.]
[5초 동안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효과로 <재생의 바람>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생명력 회복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화륵! 화르르륵!!
불꽃 위로 불꽃이 겹쳐진다.
콰르르륵!!
거센 바람이 불꽃을 흔들어 기세를 높였다.
“무슨……?”
불길에 휩싸인 그리드를 바라보는 양반들과 랭커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드가 전신에 입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상처들이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금방 딱지가 앉고 다시 새살이 돋기를 반복하며 그리드의 피부를 매끈하게 만들었다.
이는 회복의 수준을 넘어선 기적.
재생의 기적이었다.
“네놈은… 네놈은 도대체 뭐냐!!”
양반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기에 두려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리드는 미지로 다가왔다.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웠다.
“후우…….”
물약을 마셔 마나까지 충분히 회복한 그리드가 두 명의 양반 중 하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이름은 나길.
그리드가 여태껏 만났던 양반 중에서 물리 방어력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가람 바로 다음이라고 평해도 좋을 정도.
“여왕의 업화.”
최대 마나의 90퍼센트를 소모하는 극강의 마법이 태동한다.
따악!
<부조리의 반지>의 성능으로 마나 소모력을 절반 감소시킨 그리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발현된 그것이 나길의 몸에서 솟구치며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
눈을 뒤집은 나길이 맥없이 쓰러졌다.
물리 방어력이 높은 대신 비교적 낮은 마법 저항력을 제대로 공략당한 후폭풍이었다.
“놈!!”
또 한 명의 형제가 쓰러지자 격분한 양반 도담이 도끼눈을 뜨며 현무의 힘을 개방했다.
그의 검끝에 집결한 수기가 폭포수처럼 쏘아져 그리드가 일으키고 있는 불길을 좌우로 갈라냈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영혼은 지옥에 던져 주마!!”
치이이익!!
강력한 수기와 화기가 충돌하며 일으키는 수증기가 일대를 지배했다. 짙은 연기에 시야가 가려진 부바트와 랭커들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하늘을 향해 포효할 뿐이던 현무의 시선이 지상을 향해 있음을.
현무의 붉은 안광이 격류를 일으키는 도담에게 꽂힌 채 흔들리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콰쾅!!
서로를 소멸시키고자 애쓰는 불꽃과 격류의 사이에 선 그리드와 도담이 검을 맞부딪치자 발생하는 충격파가 수증기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부바트와 랭커들의 시야에 쉬지 않고 검격을 나누는 그리드와 도담의 모습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치이이이이익!!
그리드와 도담의 검이 맞물리자마자 다시 짙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부바트와 랭커들의 시야를 가렸다.
콰앙! 콰앙!
치이이익!!
같은 일이 반복됐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자욱하게 일어난 수증기의 중심부에 충격파가 발생할 때마다 그리드와 도담의 모습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두 사람의 전투가 잠시라도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다시 또 수증기가 들어차며 사람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차원이 다른 전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랭커들이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무렵이었다.
파지직!
갑자기 전류가 튀어 오르더니 잿빛 수증기가 온통 황색으로 물들었다.
도담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뭔가 큰 희열을 느끼는 눈치였다.
“죽어라, 인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최초의 메테오가 일으켰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기엔 충분할 정도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리드와 도담이 수백, 수천 번의 경합을 벌이는 동안 발생했던 수증기와 먼지를 모조리 불사른 전류가 일으킨 폭발이었다.
도담이 청룡의 숨결을 운용한 것이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연쇄되는 폭발과, 그 속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감상하는 도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네놈이 주작을 부활시킨 당사자렷다.’
인간이 일으키는 불꽃의 해일에서 도담은 주작의 숨결을 느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인간. 내가 두 개의 숨결을 동시에 운용하는 시점부터 네놈에겐 승산이 없었던 게다.’
갑자기 일어난 전류에 대응할 도리가 없었으리라…….
파직!
파지지직!
수증기를 모조리 소멸시키고 남은 잔류가 덧없이 점멸하는 모습을 쓰윽 훑어본 도담이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인간의 시신을 굳이 찾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소멸했을 테니까.
“그만 일어나라, 나길.”
형제를 부축해 일으킨 도담의 시선이 얼어붙어 있는 부바트와 랭커들을 훑는다.
힘을 모은 덕분인지 용케 목숨들은 붙어 있었지만 성한 놈이 없었다.
“너희들은 곧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쿵.
부바트와 랭커들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침입자를 격퇴하기는커녕 도운 부바트와 방관했던 랭커들 모두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채 고개 숙였다.
고개를 숙인 이유는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도담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숨겼을 뿐이다.
파직!
마지막 남은 잔류의 단말마일 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린 도담이 나길을 데리고 한 걸음 옮길 때였다.
찰랑.
도담의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파지직!
이어서 강렬한 소음이 뒤따랐다.
그제야 도담은 자각할 수 있었다.
목이 베였다.
“……?”
의지와 달리 기울어지는 시선을 통해서 도담은 보았다.
뇌광에 휩싸인 인간의 모습을.
“뇌… 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다섯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 갑니다.]
한 줄기 번개가 되어 오존들을 관통했던 청룡의 무시무시한 권능이 도담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진다.
청룡이 지나는 경로에 있던 오존들 전부가 마력을 상실하고 당황했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서사의 시작은, 잊힌 신화의 회상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으윽!”
마력을 잃어 백호의 숨결을 운용할 수 없다.
반쯤 베인 목에서 흐르는 피를 직접 손으로 지혈하는 수밖에 없다.
부축하고 있던 나길을 떼어 낸 도담이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을 쥐었다.
그리고 인간…….
[그는, 잊힌 신을 재현하였다.]
…아니, 뇌신에게 겨누었다.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뇌신의 권능은 물리력에 면역하는 것.
술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콰직!
콰지지직!!
그리드가 도담을 베고 다시 나길을 벤 뒤 또 도담을 베기를 반복했다.
그가 지나는 길에 남는 청색의 전류가 어지러운 나선을 그리자 마치 청룡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거짓 신화로 덧칠된 땅 위에 진실의 낙인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