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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30화 (1,120/1,794)

템빨 58권 - 10화

“반용족의 겉모습은 인간과 똑같지만 옷을 벗겨보면 달라. 중요 부위마다 비늘이 돋아있어서 급소를 노리는 게 도리어 악수가 된다. 어지간한 검격으로는 비늘을 벨 수 없거든.”

그리드를 쫓아 연무장에 도착한 라덴이 정좌하고 경청했다.

불과 1시간.

그리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반용족을 사냥하고 돌아왔노라 주장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거리라는 개념에 발목을 잡혔다.

하지만 진실일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기적을 실천해 오신 우리의 왕께서는 허튼 농담을 하실 분이 아니었기에.

“비늘의 형태는 이런 식인데....”

슥슥.

그리드는 급기야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칼날을 미끄러뜨리는 비늘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자 라덴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스킬 <초급 미술>을 습득하였습니다.]

[보기 힘든 반용족의 비늘을 완벽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초급 미술>이 <중급 미술>로 승급합니다!]

높은 손재주 덕분일 것이다.

손으로 하는 일은 기본 이상 하는 그리드였다.

“이러니까 반용족의 변신이 무서운 거다. 녀석들이 변신을 하는 순간 면상.... 아니, 안면을 제외한 신체 모든 부위가 비늘로 뒤덮이면서 도검불침을 이루고....”

그리드는 반용족의 신체적 특징과 전투 방법, 속성, 기술뿐만 아니라 공격력과 방어력, 마력과 저항력 등의 상세 스펙까지 낱낱이 수치화시켰다.

고작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반용족을 낯설어했던 그가 반용족 전문가로 변모해버렸다.

누가 보면 마치 수십 년 동안 반용족을 연구한 사람 같았다.

이쯤 되자 라덴의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졌다.

전하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 없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허풍을 섞으신 게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 생겼다.

반면 스테임 공작의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역시 전하십니다! 제 사위답습니다! 제 딸아이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이린은 제게 과분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늘 부족한 남편이었던 반면 그녀는 언제나 최고의 부인이었죠. 아까워하셔야합니다, 장인어른.”

“전하...!”

“....”

이것이 진정한 신뢰인가.

그리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스테임 공작의 모습을 보자 라덴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리드 전하를 감히 잠시나마 의심한 자신을 모자란 놈이라고 꾸짖었다.

이후 몇 분을 더 설명하던 그리드가 라덴에게 질문했다.

“머릿속에 그려져?”

라덴은 천재다.

질문의 요지를 바로 파악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주신 정보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 쉽게 그려집니다.”

가상으로 반용족을 이미지화했다는 뜻이다.

이제 라덴은 반용족, 그중에서도 헬타본이라는 중상급 전사를 머릿속에 구현시킬 수 있었다. 그를 상대로 가상의 전투를 진행하는 게 가능해졌다.

<혜안>이 제공해준 완벽한 정보와 라덴의 재능이 결합해 탄생한 결과였다.

휴대용 용광로와 백린목 장작을 꺼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부터 나는 철을 칠 테니 너는 전투 경험을 쌓아놓도록 해.”

주섬주섬.

급기야 모루와 망치까지 꺼내 드는 그리드였다.

연무장에서 대장일을....

일반적인 관점에선 매우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템빨국의 백성인 라덴은 그리드가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라덴이 검과 방패를 꺼내 쥐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상의 반용족을 만들어 자신 앞에 세웠다.

“큭!”

그리드의 정보를 토대로 구현 된 가상의 반용족, 헬타본은 엄청난 신체능력을 자랑했다. 라덴을 속도로 웃돌아 거리를 빠르게 좁히더니 기술로 방패를 무력화시켜 붙잡았다. 그리고 방패 째 라덴을 지면에 메친 후 브레스를 쏘아 라덴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허억....! 허억!”

첫 번째 가상 전투에서 고작 20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라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리드는 이제 막 장작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라덴을 힐끔 쳐다본 그리드가 핀잔을 주었다.

“벌써 끝났어? 설마 처음부터 변신한 놈이랑 싸운 거야?”

“변신 상태가 놈들의 전력인 이상, 변신을 시킨 다음 싸워야만 연습이 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흠.... 마음대로 해봐.”

반용족이 변신하기도 전에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변신 상태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라덴에겐 그 정도의 화력이 없었다.

납득한 그리드가 풀무질을 시작했고, 다시 눈을 감은 라덴은 재차 가상의 헬타본을 만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검과 방패를 버리고 메이스와 단창을 들었다.

기사라는 클래스의 최고 강점은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

쩌엉!

라덴의 투창 실력은 일품이었다. 직선으로 쇄도한 그의 창이 순식간에 헬타본에게 도달했다.

라덴은 이미 창을 뒤따라 달리고 있었다.

날개로 투사체를 막을 때 발생한다는 반용족의 약점을 공략할 의도였다.

한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텅!

헬타본이 날개를 접지 않고 라덴의 투창을 그냥 몸으로 맞았다. 그리고 라덴의 창은 놈의 비늘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덥썩!

마침 헬타본에게 근접한 라덴의 얼굴을 헬타본이 한 손으로 거머쥐더니 씨익 웃었다. 제 발로 달려온 겁 없는 먹잇감을 조롱하는 듯한 미소였다.

쩌억.

흔들리는 라덴의 시선에 헬타본의 벌어지는 입이 보인다.

곧바로 새카만 브레스가 쏘아졌다.

“....허억! 허억! 허억!!”

또 다시 처참하게 패배한 라덴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어떤 시도조차 못했던 첫 번째 대결과 달리, 어떤 시도라도 해본 두 번째 대결은 그나마 후회가 남지 않았다. 마음이 개운했다.

‘전투종족이라더니 과연, 반용족은 전투에 능숙하구나. 내 공격이 위험이 되지 않는 걸 바로 파악하고 무시하다니....’

그리드의 설명만 들었을 때는, 반용족에게 투사체를 막는 ‘본능’이라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드가 뭐만 던졌다하면 바로 날개를 접어 방어부터 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그리드였기 때문에 성립된 결과였다.

그리드의 공격력을 좌시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날개를 접었던 것이리라.

“음...? 쿨럭, 쿨럭.”

아직 시간은 있다. 조금 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자.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라덴이 기침을 토했다. 놀라 주변을 둘러본 그는 사방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들어차있음을 발견했다.

장작이 불타면서 발생한 연기였다.

프론티어 성의 기사전용 연무장은 면적이 수백 평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아무래도 실내이기 때문에 환기가 원활하지 못했다.

휴대용 용광로에서 뿜어진 연기가 연무장을 가득 채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음....”

스테임 공작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공손히 건넨 라덴이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풀무질을 끝낸 그리드는 생전 처음 보는 새카만 구슬을 꺼내 제련 단계에 돌입하고 있었다. 연무장 가득 차오르는 이 매캐한 연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

라덴이 카오스 산맥의 환경을 떠올렸다.

숨조차 편히 쉴 수 없는 장소다.

굴뚝 없는 실내에서 장작을 태우신 전하의 의도를 알 것 같다.

‘전하께서는 카오스 산맥의 환경을 재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래, 지금 나는 전하께서 그러셨듯이 카오스 산맥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이 싸움에 적응할 수만 있다면, 프론티어에서 반용족과 싸울 때는 상황을 여러모로 쉽게 느낄 수 있을 터.

이를 악 문 라덴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가 선 장소는 카오스 산맥이 되었다.

전보다 훨씬 더 혹독한 환경에서 전투를 시작한 그는 반용족 헬타본에게 패배하고, 패배하고, 또 패배하기를 반복했다.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가 찾아올 때까지 100회 가까이 대결을 반복했지만 1분 이상을 버틴 건 단 4회에 불과했다.

“음, 좋아.”

마침 그리드가 망치질을 끝내고 있었다.

그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물건은 묵색의 철봉이었다. 속이 텅 빈 철봉.

그 빈속에,

철컥!

그리드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칼날을 삽입했다.

얇고 짧은 칼날이 철봉 속에 쏙 들어갔다.

“....?”

저게 뭐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도구가 라덴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라덴의 집중력은 매우 뛰어나다.

자신의 본분을 상기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상의 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번 환경은 평온했다.

그리드가 사용 중인 휴대용 용광로의 불씨가 꺼지고 연기가 모두 사그라진 여파였다.

라덴의 시야와 호흡이 정상으로 회복됐다.

“하하핫!!”

라덴의 상상 속에서 연전연승을 겪은 반용족은 한껏 오만해져 있었다. 신난다는 듯이 웃으며 라덴에게 쇄도했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반용족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정교했다.

쩌엉!!

반용족이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오자 발생한 풍압을 기울인 방패로 흘려보낸 라덴이 이어서 날아오는 발차기를 메이스로 쳐냈다. 메이스와 충돌한 반용족의 정강이쪽 비늘에 아주 작은 흠집이 생겼고 라덴은 이를 기억했다.

쩌정! 쩌저저정!!

그리드가 혜안을 이용해서 수집한 모든 정보의 집합체인 가상의 반용족의 호흡엔 잠시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반용족의 주먹과 발차기가 계속해서 연계됐다. 마치 폭포처럼 멈추지 않고 라덴을 압박했다.

발목을 걷어찬 뒤 얼굴 할퀴기, 이어서 다시 하단을 노려서 균형을 무너뜨리려다가 실패하자 회전하며 상단 차기.

최초의 라덴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이 변칙적인 공세를 5초도 버티지 못했었다. 하지만 100회에 가까운 전투를 겪으며 익숙해진 그는 방패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버텼다.

더 빠르게 방패를 움직였고, 더 절묘하게 방패의 각을 잡았다.

그러자 반용족의 공격에 담긴 기세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발차기를 가로막은 방패의 각도가 90도로 꺾이자 엄한 허공으로 솟구치는 반용족의 다리.

그중에서도 정강이를 노린 라덴이 공격 스킬을 담아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러자.

쩌적!

드디어 처음으로 반용족의 비늘이 깨졌다.

‘아아!’

라덴은 감격했지만,

퍼억!!

비늘을 깨뜨리는 것은 반용족을 공략하는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비늘이 깨지고도 멀쩡하게 움직인 반용족의 후속타가 라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허억!”

또 다시 전투에서 패배한 라덴.

몇 시간 째 혼자서 섀도우 복싱 중인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리드가 손짓했다.

“일로 와봐.”

“예!”

라덴은 과연 기사의 귀감이었다.

피로가 극심할 지경임에도 벌떡 일어나 후다닥 그리드 앞에 달려왔다.

그에게 그리드가 흑색 철봉을 건네주었다.

“그립감 어때?”

“10년 째 써온 애병보다 훨씬 더 손에 익습니다.”

아첨 따위가 아니었다.

라덴은 느낀 그대로 말하며 철봉을 휘둘러보았다.

쐐액!

파공성이 날카롭다.

적당한 무게감이 있어서 위력이 제대로 담겼다. 무엇보다 철 자체에 깃든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잡이에 버튼이 있지? 그거 눌러봐.”

철컥!

라덴이 버튼을 누르자 철봉 속에서 가시 같은 칼침이 튀어나왔다.

속도가 벼락같으니 기세가 상당했다.

암기에 가까운 무기였다.

라덴은 칼침을 넣고 빼기를 반복해보며 철봉의 사용에 점차 익숙해져갔다.

과연 고급 웨폰 마스터리 보유자다운 적응력이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라덴에게 설명했다.

“대 반용족 무기다. 철봉에 깃든 현무 신의 숨결이 반용족의 비늘을 부식시킬 거야. 철봉으로 때려서 비늘을 부순 다음 칼침을 쑤셔 박아. 어때? 간단하지?”

“....예!”

라덴은 기사다. 본래라면 암기 사용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찬밥, 더운밥을 따질 신세가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이 이번 전투에 걸려있었다.

하지만 조금 반신반의했다.

현무라는 신이 그에겐 낯설었을 뿐더러, 이 얇은 칼침이 반용족의 피부를 꿰뚫어 봤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철봉을 회수한 그리드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다.

“전하!!”

다짜고짜 자해하는 그리드의 행동에 경악한 스테임 공작과 라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에게 손짓해 물러나도록 만든 그리드가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철봉 위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용광로의 잔열에 철봉을 살짝 달군 뒤 다시금 단련을 시작했다.

그는 <통한의 가시>를 재현할 의도였다.

대상의 방어력을 일정 수준 무시하며, <저주받은 혈통>과 <찢어발기기>라는 최상급 스킬을 간직한 무기.

특히 찢어발기기는 구속한 대상에 한해서 최대 생명력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이다.

대상의 격이 높을수록 발동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드가 평소 상대해온 적들의 격이 워낙 높아 등한시해온 스킬이지만, 이번에 라덴이 상대하게 될 적은 ‘하급’이라는 수식언을 달고 있다.

굳이 격을 따지자면 낮은 편에 속하는 상대인 것이다.

‘이건 통한다.’

이 현무봉가시(예명)은, 반드시 적의 비늘을 부수고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따앙! 따앙! 따앙!!

단련이 끝나간다.

그리드의 피를 품은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무아지경에 빠진 그리드의 손끝에서 완성되어갔다.

[제작 아이템에 <혈왕의 피>가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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