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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45화 (1,135/1,794)

템빨 59권 - 02화

‘결국 다 똑같은 인간일진데.’

인종은 다양하다.

피부색과 체격, 체취, 사상과 법규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부분이 있었고 그건 개성이자 문화로 존중 받아야 옳았다.

하지만 역대 제국의 황제들은 다른 인종을 미개하고 불길하다며 폄하했고 차별했다.

수없이 많은 아픔과 죽음의 발단이었다.

“기다리도록 하죠.”

다리가 짧고 등이 굽은 후족.

타고난 신체적 특징 탓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하는 그들의 행군 속도는 유난히 느렸다. 자꾸만 대열에서 이탈하는 그들을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귀찮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황제 바사라는 달랐다.

선두의 행렬에게 잠시 멈추라고 명령한 그녀가 모두에게 확실히 못박아두었다.

“후족의 걸음걸이에 맞춰도 시간적 여유는 충분해요. 그렇기 때문에 후족 분들께 함께해달라고 부탁한 거고요.”

괜한 초조함으로 타인을 비방하지 말라. 또한 저들에게 함께해달라고 부탁한쪽은 우리다.

재차 상기시킨 바사라가 뒤늦게 다시 대열에 합류한 후족의 족장에게 목례했다.

족장은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

“그런 말씀 마세요. 감사해야하는 쪽은 저희니까요.”

후족의 숫자는 채 1,000명이 안 된다.

제국의 차별로 인해 설 자리를 잃어 긴 세월 동안 고립 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서주었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몸을 타고났음에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을 차별하고 핍박해온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들의 따스한 마음씨를 바사라는 진심으로 존경했다.

“폐하, 저곳입니다.”

바사라의 말이 맞았다.

후족 탓에 행군이 몇 번이나 지체됐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포함한 5개국, 5부족 연합군은 정해진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스파치 운하.

아크 왕국의 명물 중 하나다.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물이 웅장하되 고요하여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주민들은 모두 대피시켰나요?”

산등성이에 올라 도시 곳곳을 살펴본 바사라가 묻자 아크 왕국의 공작 켈파토가 정중히 대답했다.

“예, 폐하. 군대를 투입하여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바사라의 시선이 도시의 한 귀퉁이에 고정됐다.

“제 눈이 잘못 된 게 아니라면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빈민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까지 통솔해서 대피시키기엔 인력도, 시간도 부족했고 평소 많은 범죄를 저지르던 무리인지라 이참에 벌을 받게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굶주림이 일으킨 범죄였겠죠.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건 이 나라고요.”

바사라가 사늘하게 말하자 불사왕 그렌할이 거들었다.

“이만한 운하 도시에 일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빈민가가 형성된 것을 보아 세율을 어지간히도 높게 잡았나 보오?”

“그 부분에 대해선 국가 내부의 사정이기 때문에 딱히 드릴 말씀이....”

“당장 병력을 투입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도록 하세요.”

시치미 떼는 켈파토의 말을 중간에 자른 바사라가 명령하자 제국의 군대가 즉시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반면 눈치만 살피는 아크 왕국의 병사들에게 맹수왕 모르이즈가 으르렁거렸다.

“너희 나라의 백성들을 살리겠다는데 뭣들 해? 어서 가서 안 도와줘?”

“받들겠습니다!”

정작 켈파토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아크 왕국의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제국의 공작인 모르이즈가 자신들의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즉시 명령을 받들고 행동에 나섰다.

표정을 굳히는 켈파토에게 창성 레이첼이 속삭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범죄를 옹호해선 안 되는 법이죠. 빈부의 격차란 반드시 생기는 법이라 제국에도 빈민은 존재하고요.”

“각하....”

켈파토의 얼굴이 드디어 활짝 폈다. 이상론이나 펼치는 황제와 다른 공작들의 가식에 지쳐있던 와중에 자신의 입장을 헤아려주고 공감해주는 같은 편이 생겼으니 기뻤다.

그를 바라보는 레이첼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내리시는 명령엔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하세요. 당신의 사정 따윈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

황제 바사라는 친화적이고 상냥한 사람이다. 그녀에 의해서 제국이 변했고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친절만으로 사람들을 바꿀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다.

제국이 사람들을 친절하게만 대했다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힘과 권력이 반드시 동반돼야했다.

“앞으로 또 다시 황제폐하의 명령에 불복할 경우 그때는 제가 아크 왕국에 책임을 물도록 할 거에요.”

“....명심하겠습니다.”

퍼어어어어어엉!!

레이첼이 바사라 모르게 으름장을 놓는 그때 마침 운하의 중심에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이어서 붉은 안개가 번지더니 도시 곳곳을 침투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그것은 아직 빈민가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덮쳤고 안개를 들이킨 사람들은 비명을 토하며 괴수로 변해갔다.

기함을 토하는 켈파토에게 레이첼이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이제 알았나요? 앞으로는 무조건 황제폐하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세요.”

“며,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27위 대악마 로노베.

놈이 스스로를 붉은 안개로 만들어 역병을 터뜨린다는 이야기는 이미 접해 알고 있는 켈파토였다. 하지만 역병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괴물로 변신시키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사라와 제국의 공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노베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도 부족했으니까.

이번엔 제국과 아크 왕국의 병사들을 향해서 쇄도해오는 붉은 안개의 경로를 포착한 바사라가 소리쳤다.

“후족 분들께 맡기겠습니다!”

짤랑!

짤랑짤랑!

바사라의 외침과 동시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족들이 저마다 쥐고 있는 지팡이에 달린 방울이 일으키는 소리였다.

기존의 제국이 외도라고 규정했던 토착신을 소환하는 의식의 전조이기도 했다.

『나쁜 안개구나.』

콰르르르르릉!!

방울소리가 계속되자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기의 모습을 한 신의 환영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광풍이 일어났다.

이를 감당 못한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모조리 흩어져버렸고 덕분에 제국군과 아크 왕국군 병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역병을 몰아낼 때 지낸다는 후족들의 의식이 정말로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로 인해 토착신은 모두 외도라고 믿어왔던 제국의 병사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바사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후족을 꺼려했던 그들이 그간 후족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며 진심어린 감사를 느꼈다.

“세희 네가 나설 차례는 없겠는데?”

“정말로 다행이야.”

황제 바사라가 로노베의 역병에 대비해서 준비한 카드는 후족뿐만이 아니었다.

바사라에게 친히 부탁을 받은 성녀 루비 또한 로노베 토벌대에 합류했고, 그녀가 맡은 역할은 ‘역병에 휩쓸린 병사들을 치료해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루비는 두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똑바로 마주해야한다는 것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역병은 번지지 않았다.

후족의 활약이 수많은 사람을 지켜줬고 루비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하핫! 뭐야? 왜 또 안개로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고작 27위 대악마 따위가 우리와 전면전을 해보겠다고?”

“후족의 의식이 영향을 미친 듯하군. 안개로 변신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럼 식은 죽 먹기지.”

이번 토벌대에 합류한 랭커들과 제국의 공작들은 더 큰 적을 경험해본 베테랑들이다.

22위 대악마 베리드와 싸웠던 그들의 입장에서 27위 대악마 로노베는 도리어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전군 돌격!!”

“우와아아아아아!!”

변신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위력을 발휘하는 부류들은 대개 변신 전과 변신 후의 차이가 크다.

아기신이 일으킨 정화의 바람 탓에 더 이상 안개로 변신하지 못하게 된 로노베는 제국의 공작들을 위시한 수십 만 정예대군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

괴완공(怪腕公) 살레오스.

플레이어 앞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10위대 대악마의 포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생김새가 기괴하지 않고 인간과 흡사했으나 20위대 대악마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감으로 플레이어들을 압박했다.

놈과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친 플레이어는 살기를 감당 못하고 공포에 질릴 정도였다.

릴차드 요새의 상황을 중계하던 해설진이 끝내 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보십시오. 살레오스와 똑바로 마주보고 설 수 있는 사람은 채 20명도 되지 않습니다.』

릴차드 요새에 집결한 사람들의 면면은 터무니없을 만큼 화려했다. 수천 명의 플레이어 중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나이트처럼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 받는 비공식 랭커들이 대거 참여한 상태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패배를 섣불리 떠올리지 못했다.

한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력화된 것이다.

그리고 살레오스의 성격은 더없이 치밀했다.

보통의 다른 대악마와 달리 쓸데없는 대사를 남발하며 폼 잡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해치웠다. 자신의 살기를 감당 못하고 무력화된 사람들부터 철저히 노려서 적의 숫자를 철저히 줄여나갔다.

여태껏 플레이어들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해왔던 다른 대악마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탓에 위기의식을 느낀 18명의 최상위 랭커들이 바빠졌다.

이대로 계속 전력을 잃었다간 꿈도, 희망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레오스의 살육을 저지하고자 시도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쩌어어어엉!!

“....쿨럭!!”

살레오스의 괴완은 이치에 어긋나는 힘.

상대가 누구이든 힘겨루기에선 ‘무조건’ 이긴다.

살레오스는 자신을 폭격하는 모든 공격을 힘으로 맞상대해 파쇄시켰고 이어서 대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싸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되질 않았다.

“이거.... 반격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야할 것 같은데?”

“기습이 통하질 않는데 무슨 수로?”

상황을 분석하는 사람들에게 타르마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벌써 두 번의 암습에 실패한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바로 그때였다.

스아앗....

또 다른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있는 살레오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대한 낫이 살레오스의 두꺼운 목에 걸리더니 베어버렸다.

타르마를 비롯한 최상위 어쌔신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암습.

<사신> 나이트의 궁극기였다.

살레오스의 목은 그대로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한데.

““흡.””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낀 살레오스가 즉시 숨을 들이키며 목에 힘을 주자 그의 목을 끊어놨어야 할 거대한 낫이 역으로 반 토막 나고 말았다.

어둠 속에 고요하게 떠올라있던 나이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꽈장!!

살레오스의 주먹이 나이트의 옆구리에 꽂혔다.

요란한 파쇄음과 함께 나이트의 갑옷이 산산 조각났고 멀찍이 날아가 뒹군 나이트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미친....”

도대체 무슨 수로 공략하라는 거지?

뒤늦게 공포를 극복하고 전투에 참여하려던 플레이어들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처음부터 동료애 따위는 없던 그들은 이 일방적인 학살에 자신들이 굳이 참가해야하는 건지 의문을 느꼈다. 어차피 깨지도 못할 퀘스트 보상에 집착해 개죽음을 당하느니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억 명 시청자들의 야유와 비난?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애초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TV 앞에 모여 앉은 비겁한 겁쟁이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를 비난한단 말인가?

마음을 정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뒷걸음치기 시작하다가 멈춰 섰다.

저벅. 저벅. 저벅....

이 많은 사람들을 집결시킨 원인.

한때 천외천이라 칭송받았던 검성 크라우젤이 묵묵히 전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그러나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시선은 수천 명의 랭커를 압도하고 있는 살레오스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다. 순순히 받아들여라.””

제 발로 걸어오는 인간의 용기를 치하해준 살레오스가 벼락처럼 전진해 주먹을 날렸고,

휘릭.

크라우젤은 검으로 말했다.

더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일검을 휘둘러 살레오스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살레오스의 입가에는 조소가 걸렸다.

츠칵-!

주먹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기 전까진 말이다.

‘베였다고?’

흔들리는 살레오스의 좌우 눈동자 위치가,

스륵....

비스듬해졌다.

시야가 어색해진 것을 자각한 살레오스가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쩌적!

쩌저저저저저저저적!!

자신이 등지고 선 ‘세계’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음이 보였다.

““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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