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04화
5마리의 대악마가 출현했다는 표현이 과연 옳은가?
각종 언론이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한 이유는 단순했다.
슈트리오의 손.
인계에 강림한 다섯 대악마 중 하나는 대악마가 아닌 대악마의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간의 관심은 슈트리오의 손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13위 대악마와 19위 대악마가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바쁜 와중에 12위 대악마의 한쪽 손 따위를 지켜봐서 뭐하겠는가?
사람들은 슈트리온의 손이 가장 먼저 토벌당할 거라고 예상했다.
각국 언론 역시 칼라탄 요새를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샌가....
콰아아아아아아앙!!
칼라탄 요새의 상황을 집중 조명 중인 방송사들의 시청률이 고공행진하기 시작했다.
칼라탄 요새, 헨루투 요새, 릴차드 요새, 펠트리노 요새, 하스파치 운하의 모든 상황을 교차 중계 중인 방송사에는 칼라탄 요새의 비중을 높여달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이 쇄도했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이이익!!』
카메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현장을 지켜보는 해설진마저 질리게 만드는 흉포함.
요새의 성벽과 높이가 똑같을 정도로 거대한 슈트리온의 손은 레베카교의 성기사들을 파리 잡듯이 짓뭉개버렸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지진에 카메라들이 흔들려댔으니 현장의 아비규환이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꺄아아아아아악!!”
“아, 악마....! 악마....!!”
하늘을 가득 뒤덮는 손이 한 번 떨어질 때마다 동료들이 곤죽이 되어 죽는 모습을 목격하고 겁에 질린 레베카교 사제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교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벌써 3회째 교황직을 연임하게 된 데미안의 통솔이 무용지물일 지경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피부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슈트리온의 손은 주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때려죽이거나 움켜쥐어 죽였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도 참혹하여 맞서 싸울 용기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놈! 이 얼마나 잔인한 본성이란 말인가!!”
백색의 날개를 활짝 펼쳐 자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한 템플러의 단장조차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천사인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빛의 고리가 막대한 신성력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붉은 손의 진격을 멈추지 못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일방적인 살육은 계속됐다.
요새와 함께 통째로 사람들을 짓뭉개는 슈트리온의 손의 기세가 워낙 맹렬하여 영원히 멈추지 않고 대륙을 짓밟고 다닐 것처럼 보였다.
-저게 살레오스보다 훨씬 센 거 아니냐? 손바닥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땅이 아주 아작이 나버리네....
-그리드도 한 방에 뭉개질 듯.
-저쯤 되면 즉사 판정이 있을 지도 몰라.
레베카교의 성기사단은 무장이 튼튼하기로 유명하다. 수호기사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의 방어력과 버프를 겸비한 그들은 일선을 책임질 수 있는 탱커였다.
한데 그들조차도 슈트리온의 손에 뭉개지는 순간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일격필살의 수준을 넘어 일격학살이다.
땅을 한 번 후려칠 때마다 수십 명의 성기사와 사제들을 짓뭉개 죽이는 슈트리온의 손의 위용은 감히 <최종보스>라는 타이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사벨 쨩, 우리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올해 국대전 마왕 토벌전에서 무려 4시간을 죽지 않고 버텨 <좀비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교황 데미안.
마왕 토벌전을 겪은 이후 급격히 자신감이 상승했던 그가 마치 드레비고에게 절망하던 시절처럼 기운을 잃었다. 자신의 통솔에 따르지 않고 흩어졌다가 각개 격파당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지켜본 끝에 눈시울마저 붉혔다.
의기소침해져서 울먹이는 그의 손을 이사벨이 꼭 붙잡아주었다.
“괜찮아요. 여신께서 우리에게 가호를 내려주실 거예요.”
덜덜덜.
이사벨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슈트리온의 손의 흉포함에 잔뜩 위축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그녀를 보자 데미안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눈가를 훔친 데미안이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말했다.
“맞아. 괜찮아. 내가. 바로 이 좀비 마왕님께서 교인들을 지킬 테니까.”
최대한 멋진 표정을 짓고 말하는 데미안.
이사벨의 떨리는 손을 꽉 쥐어준 그가 최초의 성검을 꺼냈다.
금빛의 섬광이 소용돌이치며 일대에 가득 내려앉은 마기를 흩어냈다.
“성하께서 좀비.... 마왕이요?”
“아, 아니, 저 좀비 같은 마왕 놈을 내가 해치우겠다고.”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고 정정하느라 잠시 기세를 잃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만 믿어.”
데미안은 교황으로써의 각오를 제대로 다졌다.
혼란 속에서도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이사벨과 레베카의 딸들.
그녀들을 지켜야할 사람은 바로 자신임을 상기하며, 최초의 성검에 신성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쿠웅!!
날파리 쫓듯이 연신 대천사를 위협하던 슈트리온의 손이 갑자기 데미안을 향해서 방향을 꺾었다.
짙은 마기를 풀풀 풍기는 슈트리온의 손.
이성이 없어 본능에만 충실한 놈에게 있어서 교황의 신성력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여신의 대행자답게 ‘레베카의 신성’을 지닌 데미안이 대악마의 첫 번째 표적이 되는 건 당연했다.
“하, 하지메마시떼.”
상대는 손일뿐인데 어째선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다.
어색하게 웃은 데미안이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흔들자 슈트리온의 손이 광란의 질주를 개시했다.
손가락으로 대지를 힘껏 집더니, 대천사와 템쁠러들을 무시하고 성큼 이동해 데미안에게 쇄도해왔다.
“히, 히야아아악!!”
성이 통째로 떨어지는 듯한 압박감.
시야를 가득 채우며 떨어지는 붉은 손의 기세에 질색한 데미안이 비명을 지르며 최초의 성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성스러운 황금빛의 기둥이 솟구쳐 나와 슈트리온의 손바닥을 때렸고,
움찔!
슈트리온의 손이 등장 이후 최초로 움직임을 멈췄다.
놈이 매연처럼 내뿜고 있던 새카만 마기도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물론 잠시뿐이었다.
꿈틀.
슈트리온의 손가락이 곧바로 다시 움직인다 싶더니 새카만 마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동시에.
타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직 완전히 수복되지 못한 마기의 틈새를 꿰뚫고 파고든 녹빛의 탄환이 슈트리온의 손바닥을 관통하자 찌르르, 슈트리온의 손바닥이 짧은 경기를 일으켰다.
놀라는 데미안의 귓전에 유라의 외침이 스며들었다.
“좋아요! 이대로 계속 마기를 거둬주세요!”
“하, 하잇!!”
교황과 데빌 슬레이어.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최강의 조합이 <마신>이라는 이명을 지닌 초거대 대악마 슈트리온의 손에 상처를 새기기 시작한다.
***
<화신의 폭풍>은 그리드의 심상이다. 정확히는 주작의 심상의 편린이었지만 주작의 9번째 심장을 품은 그리드는 이를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화신의 폭풍은 그리드로 인해 존재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은 그리드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그리드의 소유였다.
하지만 벨레드는 무한의 검기를 가로채 자신의 무기로 삼아버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나의 심상이 어째서 소유권 잃은 물체로 구분된단 말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콰르륵!!
굉음을 토하며 날아온 성벽의 파편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그리드가 등을 뒤로 꺾은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카창!!
그리드의 가슴을 노리고 꽂히던 벨레드의 뒤꿈치가 묵색 칼날에 가로막혀 튕겨나간다. 곧바로 회수해 재차 발차기를 날리는 벨레드의 연속공격을 갓 핸드로 막아낸 그리드가 뒤로 물러나면서 이를 갈았다.
‘이것 봐. 갓 핸드는 못 건들잖아.’
갓 핸드는 그리드의 물건이다.
그리드의 손을 떠나서 스스로 행동한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실제로 벨레드는 갓 핸드를 자신의 무기로 삼지 못했다.
한데 무한의 검기는 무슨 수로....
“....아!”
깊어져만 가던 그리드의 의문이 불시에 걷혔다.
무한의 검기를 얻었던 그날의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주작의 9번째 심장>에 절대자의 힘이 깃듭니다.]
[<화신의 폭풍>에 새로운 필드 효과, <무한의 검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시스템은 분명히 명시했었다.
화신의 폭풍에 깃든 무한의 검기는 절대자의 힘.
즉 1좌 하야테의 힘이지 그리드의 힘이 아니다. 그리드는 하야테의 힘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랬군. 그래서 벨레드가 자신의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거야. 무한의 검기의 진짜 주인인 하야테가 곁에 없었기 때문에....’
벨레드가 화신의 폭풍의 ‘화염’에는 손을 대지 못했던 광경을 떠올린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결국 무한의 검기는 쓸 수 없는 건가.’
그럼 무슨 수로 이 괴물을 쓰러뜨리지?
깊은 고민에 빠진 그리드의 몸이 점차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뇌신>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투사체의 공격을 막아주는 패시브 스킬 <자동 연성>과 갓 핸드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동 연성과 갓 핸드 없이는 벨레드와 수십 차례의 공방을 나누는 일도 불가능했을 테고, 뇌신이 발생할 여지도 없었을 테니까.
콰르르릉!!
여태껏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그리드가 천둥소리를 신호로 벨레드에게 쇄도했다.
그는 벨레드의 한계를 충분히 엿보고 있었다.
‘내가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벨레드의 공격은 모두 물리 공격으로 분류된다.’
벨레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마법이 날아와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지 않는 이상, 현재 벨레드가 무기로 삼을 수 있는 물체는 대지와 성벽의 파편들뿐이었다.
뇌신 상태의 그리드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
역시나.
성벽의 파편들을 무기로 삼은 벨레드의 모든 공격은 번개로 변한 그리드의 몸을 그저 관통하고 지나갈 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벨레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당혹감이 그리드에게 희열을 선사했다.
“신격.”
13분을 버텨야한다고?
“잠재력 개방.”
아니, 죽일 거다.
콰르르르르르륵!!
앞선 전투에서 전개 도중 취소됐던 초연살파극의 검무가 벨레드를 집어삼켰다.
비명을 토한 벨레드가 마력으로 그린 오망성에서 마법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면, 그리드는 정말로 자신의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콰콰콰콰콰콰쾅!!
“쿨럭....! 커헉!!”
뇌신 상태의 그리드는 물리공격에 면역하지지만 마법공격에는 방어력, 저항력이 적용되지 않은 2배의 피해를 입는다.
그를 관통한 벨레드의 흑마법은 정말로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고 한 번 쓰러진 그리드는 쉽사리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넝마가 된 채 연신 피를 토하는 그리드에게 벨레드가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
““인간치고 재주가 많구나. 로노베나 단탈리안이 네놈을 만났다면 낭패를 겪었겠어.””
말하는 벨레드의 표정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
20위대 악마를 멸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간.
어쩌면 훗날 뮐러만큼 강해질 수도 있는 놈에게 자신이 종말을 안기게 됐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느낀 것이다.
급기야 미소마저 그린 그가 마침 뇌신 효과를 잃은 그리드의 심장에 손가락을 겨누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릉!!
““....!!””
벨레드가 밟고 선 대지가 갑자기 꺼졌다.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벨레드의 몸이 그대로 지하 깊숙이 사라져버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향해서 퉤, 침을 뱉었다.
“그러게 발밑을 조심해야지.”
지형을 바꾸는 스킬.
바로 <지신>의 사기적인 효과가 그리드와 벨레드의 사투를 조금 더 장기화시켰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1분....
홀로 13위 대악마와 맞서 싸우는 지존 그리드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전율과 감동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