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53화 (1,143/1,794)

템빨 59권 - 10화

드워프의 집념은 죽음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비유나 과장이 아닌 사실적 표현이다.

드워프의 평균 수명은 인간의 3배에 불과했지만 때때로 엘프보다 오래 사는 드워프가 나타나곤 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진 결코 죽을 수 없다... 라는 집념으로 끝끝내 살아남아 수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다.

‘....아이템 만들다가 죽는 걸 까먹는다니.’

보통 성격들이 아닐 것이다.

드워프의 성격은 케를을 통해서 충분히 학습하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울화통 터지는 일이 많을 터.

하지만 인내해야한다.

드워프와의 교류는 오랫동안 꿈꿔온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딱! 딱딱딱!!

화산지대의 뜨거운 열기가 템빨골들의 내구력을 빠르게 감소시킨다.

녀석들이 녹아 사라지자 노에와 랜디를 소환하려던 그리드가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분화구로부터 흘러내리는 용암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높은 경사를 자랑하는 산등선이 일대에 꺼지지 않는 불길이 계속해서 솟구쳤다.

이곳에 노에와 랜디를 풀어놔봤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역소환될 것이 뻔했다.

‘애들 레벨 좀 올리려고 했더니 힘들겠네.’

염룡의 화산지대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평균 레벨은 360. 간간히 등장하는 정예 몬스터의 레벨도 400에 불과하다.

카오스 산맥 최후의 능선에 출몰하는 몬스터의 평균 레벨과 비교하면 훨씬 낮은 셈이다.

광란의 왕 벨레드와 싸우고 괴완공 살레오스를 레이드하는 과정에서 415레벨을 달성한 그리드는 화산지대의 몬스터에게 별다른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템빨골과 노에, 랜디는 달랐다.

녀석들에겐 이곳의 몬스터가 딱 좋은 사냥감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에 지배당한 이 땅을 녀석들의 사냥터로 삼기엔 무리가 컸으니 아쉬울 따름.

‘뭐, 차라리 잘 됐지.’

본래 목적에 집중하도록 하자.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애들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워프와의 만남을 위해서다.

스파앗!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몬스터를 무시하고 전력으로 내달렸다.

화산지대의 뜨거운 열기도 전설의 대장장이인 그를 위협하진 못했다. 이전보다 발동확률이 높아진 순보의 힘 덕분에 어지간한 랭커들은 반나절을 이동해야 도착했을 산의 정상에 고작 30분 만에 도착한 그가 백두산천지보다 몇 배는 큰 거대한 분화구의 전경을 시야에 담았다.

“휘유.”

분화구에 자리 잡은 도시를 보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족히 1만 가구는 될 것 같은 중소도시가 분화구에 속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도시 어디에도 용암의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산등성이에 끊임없이 흐르는 용암의 파도는 이 분화구로부터 분출된 것이 아니라 어떤 마법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뜻이다. 일종의 결계라고 할까.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군.’

탈리마와 세계의 단절은 단지 트라우카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워프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깨달은 그리드가 산의 정상에서 뛰어내렸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했고, 아득하게만 보였던 탈리마의 전경은 순식간에 확대됐다.

탓.

지상에 떨어지기 직전에 용의 날개를 펼쳐 가볍게 착지한 그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탈리마.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꿈꿨을 환상의 도시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따앙! 따앙! 따앙!!

“....?”

도시 초입부터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쇠 냄새를 음미하던 그리드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허름한 대장간으로부터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그의 관심을 끈 것이다.

‘장인급.’

어느 나라를 가도 귀빈으로 대접받을 실력자가 이런 허름한 대장간에서 홀로 작업하다니?

흥미를 느낀 그리드가 대장간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따앙! 따앙! 따앙!!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대장간에서도 장인급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었다.

‘라이벌?’

장인의 경지에 오르고도 이런 열약한 환경에서 작업해온 이유는 오랜 세월 경쟁해온 옆집 대장장이와의 승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과연 드워프의 집념이라는 건가. 뭐, 나라도 그랬겠지만.’

망치질 소리만 듣고 영화 한편의 줄거리를 만들어낸 그리드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귀를 의심했다.

뒷집 대장간에서도, 뒷집의 옆집 대장간에서도 장인급 대장장이들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미친.”

탈리마가 얼마나 특별한 도시인지, 드워프라는 종족의 타고난 손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는 대장장이는 세상에 없다. 거의 대부분의 대장장이가 탈리마와 드워프에게 환상을 품고 있을 정도다.

당연히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탈리마에 가면 수많은 장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단, 이런 허름한 대장간이 아닌 드워프의 성에서 말이다.

‘설마 온 국민이 장인인 거냐?’

도시 중심에 우뚝 선 드워프 성을 스치듯 확인한 그리드가 주변의 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도시 초입.

20개의 대장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중 7개의 대장간에서 장인급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 13곳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는 중급 상위, 고급 하위 수준의 대장장이의 것으로 파악됐다.

‘온 국민이 장인은 아니었군....’

이게 정상이긴 하다.

고급 마스터 수준의 대장장이는 손재주와 경험이 뒷받침 되면 이룰 수 있는 경지이다. 타고난 손재주가 높을뿐더러 일평생 대장일만 하는 드워프라면 누구나 고급 마스터의 경지를 이룰 것이었다.

하지만 장인부턴 여러 개의 ‘명작’을 제작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 말이다.

책 한 권 읽었답시고 전설의 대장장이로 전직, ‘비교적’ 높은 확률로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해온 그리드와 달리 고급 대장장이의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기 때문에 장인으로의 성장은 높은 행운과 창의성이 받쳐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

내 존재 자체가 다른 대장장이들에겐 미안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장인을 꿈꾸며 노력 중인 템빨국의 대장장이들을 떠올린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장 처음 확인하려고 했던 대장간으로 다가가 창가에 섰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작은 대장간의 풍경이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용광로 앞에 모루를 펼치고 선 드워프가 열심히 강철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 깃든 뜨거운 열망이 그리드에겐 낯설지 않았다.

칸을 통해서 엿봤던 열망이기에.

‘전설을 꿈꾸는 건가....’

이름조차 모르는, 낯선 대장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응원을 보냈다.

‘부디 전설이 되기를.’

새로운 전설의 탄생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전설은 유일한 존재가 아닌 여럿일 수도 있음을, 이미 칸이 증명해보이지 않았던가.

그리드는 더 많은 전설의 대장장이가 탄생하기를 바랐다.

특별함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을 슬슬 내려놓았다.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너무나도 큰 까닭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자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 그의 입장에선 자신을 대체할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동료들이 사용할 아이템을 만들고, 수리할 수 있는 인재가 말이다.

‘아이템을 만들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긴 하지만 여유가 없군.’

언젠가 모든 일을 끝내고 은퇴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들처럼 작은 대장간을 만들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철을 두드리고 싶다.

작은 바람을 품으며, 그리드는 도시의 중심지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모든 드워프들이 각자의 대장간에 틀어박힌 채 아이템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종종 보이는 드워프들은 막 만들어낸 아이템을 가판대에 올려놓고 다시 또 대장간 안으로 쏙 들어갈 뿐이었다.

외부인이 없다보니 손님도 없어 가판대는 가득 차다 못해 물건들이 흘러넘치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도시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기계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농사를 짓고 식량을 생산, 배급하고 있었으니 굶어죽을 일이 없어서인지 화폐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700만 골드?”

....아니, 화폐에 매우 연연하는 듯하다.

고작 이따위 에픽 아이템의 가격을 양심 없는 수준으로 책정해놓은 걸 보면.

“돈독이 올라도 잔뜩 올랐구만.”

흔해빠진 강철로 1시간이면 만들 아이템에 700만이라는 가격표를 붙여놓고 사라진 드워프를 향해서 쯧쯧, 혀를 찬 그리드가 다른 가판대로 시선을 돌렸다.

레어 아이템은 없었고 대부분 에픽 아이템이 진열돼 있었는데 가격대가 최소 500만이었다. 1,000만이 넘는 상품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리고 1,000만 골드는 한화로 120억의 가치를 지닌다.

‘호구도 안 낚일 가격을 달아놓다니.’

진열 된 상품들을 살펴보는 그리드의 얼굴에 점차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양심 없는 가격대는 둘째 치고 상품의 질 자체가 썩 별로인 까닭이었다.

에픽 아이템 대부분이 중등품에 불과했으며 아주 가끔 보이는 유니크 아이템은 하등품이었다.

‘탈리마에 가면 노점상에도 유니크 아이템이 진열돼 있다더니.’

그 거짓말 같은 소문은 진실이었지만, 기대를 충족할 수준은 아니었다.

탈리마에 품고 있던 환상이 와장창 깨질 지경이다.

“응?”

더 이상의 관광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곧장 드워프 성에 방문해서 왕과 인사를 나누고 에고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판단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그리드가 가판대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대충 늘어진 갑옷들 아래 깔려있는 낡은 건틀렛을 꺼내 쥐었다.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는 아이템입니다!]

탈리마에 방문한 이후 그리드가 사용한 감정 스킬의 횟수는 어느덧 300회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데 드디어 처음으로 특별한 물건을 찾은 것이다.

약간의 기대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건틀렛의 갱신되는 정보를 확인했다.

<사냥을 갈망하는 건틀렛>

등급:유니크

내구력:5/203 방어력:108

*공격 명중률 5퍼센트 상승

*공격속도 10퍼센트 상승

사냥꾼의 습성을 지닌 에고가 깃든 건틀렛입니다.

착용자의 사냥 효율을 극대화시킵니다.

★에고 특성으로 PvE 명중률이 20퍼센트, PvE 약점 공략 확률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착용 조건:레벨 200 이상.

“헐.”

정말로 좋은 물건이다.

PvE 즉, 몬스터와 전투 시 명중률 상승률이 무려 20퍼센트.

거기에 약점 공략 확률도 올려주므로 자신보다 레벨이 훨씬 높은 몬스터도 쉽게 사냥할 것이다.

심지어 레벨 제한이 낮아서 게임을 새롭게 시작하는 플레이어에게 무척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건 1,000만 골드여도 충분히 구매할 가치가 있겠는데?’

세상에 부자는 많다.

세계 최고의 문화이자 경제시장으로 우뚝 선 Satisfy에 수십 억, 수백 억 원쯤 우습게 투자하는 사람이야 셀 수 없이 많았다.

자금력은 충분하지만 게임을 늦게 시작해서 아직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아이템의 가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냥 효율을 높여주는 아이템은 없어서 못사는 게 그들의 현실이었다.

“....?”

이런 좋은 아이템을 왜 구석에 처박아둔 거지?

먼지가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못보고 지나칠 뻔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했다.

건틀렛에 붙어있는 가격이 고작 10만 골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이건 꼭 사야 돼!’

되팔기만 해도 이득이다.

최대 100배의 차익을 노릴 수 있다.

5분 내에 주문 시 10만 원짜리 바지 3벌을 29,900원에 준다는 홈쇼핑 광고를 운 좋게 발견했을 때처럼 흥분한 그리드가 대장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장간에 입장하였습니다.]

[‘파그마의 후예’ 직업 효과가 발동합니다. 고급 대장장이 기술 이상의 스킬을 익힌 대장장이 NPC가 당신을 알아보고 경배할 것입니다.]

“주인장!”

“뭐요?”

“이거! 이거 사겠소!”

오랜 세월 방치된 까닭에 비바람에 노출되고 내구력이 5밖에 안 남은 물건이다. 어서 구입해서 수리부터 해야 한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걷잡을 수 없이 녹슬어서 못쓰게 되는 수가 있다.

조급해진 그리드가 서둘러 10만 골드를 꺼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으로 다가온 드워프 대장장이는 두 눈을 반짝였다.

“호오....? 그 물건의 가치를 알아봤단 말이지? 내게도 100년 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손님이 찾아왔.... 어라?”

쿵!

드워프가 손에 쥐고 있던 대장장이 망치가 맥없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쯧쯧, 대장장이에게 있어서 망치란 즉 무기이고 증명이건만 그걸 저렇게 쉽게 내팽개치다니....

그리드가 혀를 차는 순간.

“파, 파그마의 후예!!”

전체적으로 짧은 체형에 어울리지 않게 기다란 손가락을 펼쳐 그리드를 가리킨 드워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무슨 기차화통이라도 삶아먹은 것처럼 우렁찬 목소리였다.

파장은 컸다.

“뭐라고? 파그마?”

“파그마 육시랄 놈이 돌아왔다고?”

“개보다 못한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옆집, 뒷집, 앞집 가릴 것 없이 몰려온 온 동네 드워프들이 그리드를 포위했다.

그리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여기선 또 누구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데?’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