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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55화 (1,145/1,794)

템빨 59권 - 12화

갓 핸드의 자아는 마법으로 빚어진 창조물이 아니었다. 타인의 영혼을 때려 박아 넣은 물리적 결과물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진실을 마주한 그리드가 큰 혐오를 느꼈다.

옛 교황들의 영혼이 각인돼 있었던 검과 관의 모습이 갓 핸드에 겹쳐 보여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파그마 당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거지?’

당신의 정의는 과연 올바른 것이었나?

<자아 부여> 스킬의 발동 조건은 ‘상대방의 동의’이다.

이를 토대로 파그마와 여제의 관계를 추측한 그리드의 파그마를 향한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래도 파그마가 마냥 10새끼는 아니다.... 라고 믿어왔던 그의 신뢰가 깨지기 일보직전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당신은 브라함 외의 벗마저 배신했던 건가?’

꽈드득, 이를 갈던 그리드가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표정을 풀었다.

번헨 열도에서 홀로 대악마들의 침공을 막아내고 쓸쓸히 죽어갔던 파그마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이다.

그래, 모진 후회의 격랑에 잠겼던 파그마는 이미 충분한 고통을 맛봤었다. 이제 와서 자신마저 그를 비난하는 건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다.

결론을 내린 그리드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온갖 감정과 상념을 내려놓았다.

그는 파그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퀘스트를 수락한다.’

파그마를 이해하고, 동정하며, 존중하되 공경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뜻을 명확히 하고자, 그리드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파그마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파그마와 다른 길>

전직 퀘스트

탈리마에 도착한 당신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제의 정보를 수집하고 파브라늄의 탄생 경위를 파악하십시오.

진행형 퀘스트다.

그리드가 일을 진행해나갈수록 내용이 채워지는 형식의 퀘스트.

이제 막 발단에 불과한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그리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짜고짜 무릎 꿇고 사죄하는 그의 태도에 짐짓 당황하고 있던 드워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그리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단지 파그마의 기서를 읽고 그의 기술을 이었을 뿐인 사람입니다. 파그마와 일면식도 없죠. 파브라늄의 실체도 몰랐고, 여제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부디 적개심을 풀고 이야기해주십시오. 여제란 누구입니까? 파브라늄에 그녀의 영혼이 깃든 경위는 무엇이고요?”

“으음....”

사자머리 펠롯을 비롯해 파그마를 실제로 만나봤던 드워프들은 파그마가 어떤 인물인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만이 정의이며,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필연이라는 듯이 행동했던 놈은 결코 타인에게 무릎을 꿇는 성격이 아니었다. 완고한 신념을 똘똘 뭉쳐 아집으로 승화시켰던 놈은 늘 타인을 내려 봤다.

‘....그리드라는 이름이었나?’

파그마의 후예이되 정신이 아닌 기술만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인물.

확실히, 그는 파그마와 달랐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조차 그를 인정했다는 풍문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하되, 우선 대화는 진행해 봐도 좋지 않을까?

여제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파브라늄이 결국 그리드의 손아귀에 있음을 상기한 펠롯이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벨 비 탈리마. 드워프 역사상 최초로 신화가 ‘될’ 무구를 제작하신, 우리의 전대 왕이셨소. 그분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황제로 섬겼지.”

펠롯은 마리벨을 곁에서 보좌했던 왕실 대장장이 출신이다. 예절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집념으로 죽음을 초월해 수백 년을 살아왔다.

보통 드워프와 달리 성숙한 그는 먼저 예의를 갖춘 그리드에게 똑같은 예의로 화답했다.

“안목과 실력 모두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신 분이셨소....”

옛 기억을 떠올리는 펠롯의 눈동자에 과거가 투영된다.

그리드의 의식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드워프는 무엇이든 잘 만든다.

타고난 손재주와 심미안 덕분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을 구별할 줄 알았고, 그것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직 황금만을 녹여 세운 드워프 왕궁이야말로 드워프 기술력의 결정체였다.

“훗훗훗.”

아직 여제라고 불리기 전.

언젠간 전설이 ‘될’ 무구를 여러 번 제작함으로써 왕의 자격을 증명한 마리벨은 자신의 왕궁을 사랑했다.

드워프 일족 최고의 심미안을 타고난 그녀는 자신의 왕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깨지고 말았다.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

흑발, 흑안의 인간.

상처 입은 짐승을 연상시키는 쓸쓸한 눈빛의 소유자, 파그마가 탈리마를 방문한 그날.

마리벨의 미적 기준이 격변을 맞이했다.

‘꺄악! 아름다워!’

눈꽃처럼 빛나는 파그마의 피부 앞에서는 태양 아래 황금조차도 거무튀튀해 보였고, 황금비에 가깝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왕궁의 구조는 파그마의 신체 비율 앞에서 조악한 것으로 전락했으니....

“꺄악! 꺄아악!!”

“....?”

드워프 왕궁을 오징어로 만드는 파그마의 출현은 마리벨을 환호케 만들었다.

첫눈에 파그마에게 반해버린 그녀는 파그마에게 헌신했고, 두 사람의 협력은 오랜 세월 고착되어왔던 대장기술의 수준을 급격히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파그마는 전설 등급까지 성장할 여지가 있는 무구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마리벨은 신화 등급까지 성장할 여지가 있는 무구를 만듦으로써 ‘세상 모든 무구의 어버이’가 될 거라는 뜻을 품은 <여제>의 칭호를 얻었다.

***

“....지독한 얼빠였군.”

펠롯의 회상이 끝나자 현실로 되돌아온 그리드의 감상은 간단명료했다.

“얼빠?”

“아니, 혼잣말입니다. 그보다 마리벨 여제께서는 정말로 뛰어난 대장장이셨군요. 이미 전설이라고 불리었던 대장장이 파그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실 정도였다니.”

“세상 모든 무구의 어버이가 되실 거라는 칭송을 괜히 받으셨겠소? 본래 전설의 대장장이는 파그마가 아닌 여제의 것이 됐어야만 했소.”

‘확실히....’

마리벨이 만든 무구들이 죄다 성장형 노말, 레어 등급이 아니라 깔끔하게 레전드리 등급으로만 제작됐어도 전설이라는 타이틀은 마리벨이 먼저 거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원했던 이유는 마리벨의 욕심에 있었다.

‘작품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했던 게 문제야.’

마리벨은 완벽주의자였다.

검 한 자루를 만들어도 많은 부분을 고려해서 ‘단점은 없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이상적인 물건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녀가 만든 무구들은 대체적으로 잠재력이 높았지만 조악한 면이 있어 당장의 등급은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 잠재력을 완전히 개화했을 때의 기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높았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만든 작품들은 어디까지 성장했을지 궁금하다.

과연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서 그녀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형태를 이루는데 성공했을까?

‘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던 그리드는 문득 자신의 마음이 들떠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감춰져있던 역사를 알게 됐단 사실에 흥분한 것이다.

Satisfy가 얼마나 넓은 세계인지, 그리드는 마리벨 여제의 존재를 통해서 재차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어딘가에서 제2의 마리벨, 제2의 파그마가 태동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경쟁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계하고 스트레스를 느꼈을 테지만 그리드는 정 반대인 것이다.

그의 그릇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있었다.

“여제의 발전은 탈리마의 모든 드워프에게 귀감이 되었고 탈리마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소. 그때는 트라우카가 어떤 도둑놈을 잡겠답시고 떠돌아다니던 시절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탈리마를 왕래했고 탈리마산 무구들은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지. 우리들의 그 시절은 행복했소.”

“짧은 행복이었군요.”

“그렇소. 봄날처럼 짧았지. 그 시절이 지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탈리마는 고단한 겨울을 해매고 있소이다.”

펠롯의 눈시울이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쏟아지려는 울음을 참아내려는 듯, 이를 꽉 깨문 채 입술을 씰룩거리던 그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잊지 못하오. 이른 나이에 죽음을 초월하시어 여전히 소녀처럼 젊으셨던 여제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셨던 그날의 악몽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게요.”

“갑자기요?”

안 그래도 불안하던 차였다.

회상 장면에 등장하는 마리벨 여제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렸으니까.

도무지 자연사할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죽었다고....?

‘설마?’

브라함의 등에 칼을 꽂았던 파그마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 없다. 파그마가 여제를 죽였을 리 없어.’

파그마에겐 브라함을 찔러 죽이고 수명을 빼앗은 전력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브라함이 마족이었다.’는 특수한 사항이 적용했기에 성립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래, 파그마가 브라함을 죽인 사건엔 그나마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다.

반면 마리벨 여제는 드워프였다. 언젠가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는 사악한 마족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녀는 도리어 인류의 발전을 주도하는 귀중한 존재였다.

파그마가 그녀를 살해하면서까지 영혼을 취했을 리는 없....

“파그마....! 파그마가 여제를 시해하고 영혼을 탈취해갔던 그날부터 탈리마는 모든 것이 무너졌소이다!!”

“....!!!”

그리드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회상 장면에 등장했던 마리벨 여제의 천진난만한 미소와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파그마의 모습이 그의 하얗게 질린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털썩!

맥없이 무릎 꿇은 펠롯이 그리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부디....! 부디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주시오!!”

“부탁한다!!”

“제발!!”

오열하는 펠롯의 애원이 신호가 되었다.

수백 명의 드워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그리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내 남은 생을 모조리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곁에 붙어 작품과 교감하는 법을 알려주겠소!!”

띠링~

퀘스트 내용이 갱신됐다.

<파그마와 다른 길>

전직 퀘스트

당신에게 진실을 전한 펠롯과 드워프 대장장이 일동이 간청합니다.

현재 <탐욕>에 깃든 마리벨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드워프 왕궁으로 이동, 여제의 영혼을 해방.

퀘스트 클리어 결과:파브라늄의 자아 상실.

퀘스트 클리어 보상:<고급 에고 아이템 제작기술> 획득.

<고급 에고 아이템 제작기술>

종류:패시브

아이템 제작 시, 일정 확률로 제작 아이템과 교감하여 아이템의 혼을 일깨웁니다.

“....!”

그리드는 <자아 부여> 스킬과 <에고>라는 개념의 차이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진즉부터 눈치 챘다.

자아 부여는 ‘실존했던 존재의 영혼’을 대상 아이템에 억지로 때려 박는 것이고, 드워프들이 말하는 에고란 아이템을 생명으로 승화시켜 혼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드가 한 번은 우연히, 최근엔 운 좋게 제작했던 에고 아이템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경우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하는 자아 부여와 달리 부담감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난가 하는, 성능의 고하는 솔직히 말해서 분별하기 어렵다.

고등급의 에고 아이템을 목격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으므로 당연하다.

“당신은 파그마와 달라 필시 작품과 교감할 수 있을 게요!”

“.....”

그리드는 신중했다.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채 고민을 거듭했다.

<탐욕>을 잃을 수도 있는 대목임을 눈치 챘으니 신중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고민은 짧았다.

“알겠습니다.”

수천, 수만 명의 드워프에게 한(恨)을 새긴 여제의 영혼....

그것을 굳이 감당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어디에도 없다.

찝찝해서라도 곁에 두기 싫다.

제2의 파브라늄엔 내가 원하는 에고를 새길 것이다.

더 나은 에고를 새길 때까지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지금의 탐욕보다 더 나은 광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파그마의 광물이 아닌 나의 광물을 갖고 싶기도 하고....’

결심한 그리드가 당황하는 펠롯을 재촉했다.

“어서 여제의 영혼을 해방해드립시다.”

“지, 진심이오?”

“저는 탈리마와 척을 질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감사....! 또 감사하오!!”

“우와아아아아아!!”

오랜 세월 동안 적막만이 맴돌았던 탈리마에 드워프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수백 년만의 축제를 맞이한 것처럼 드워프들의 표정은 밝았다.

[드워프 장인 ‘펠롯’과의 호감도가 최대치로 상승하였습니다.]

[탈리마에 거주 중인 드워프들과의 호감도가 80 상승하였습니다.]

[탈리마에서 아이템을 구매 시, 최대 80퍼센트의 가격 할인 혜택을 누립니다.]

[탈리마의 상인들은 당신이 판매하는 아이템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매입할 것입니다.]

‘좋아.’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는 어느새 드워프 왕궁에 도착해 있었다.

펠롯의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향한 그는 곧 허겁지겁 달려오는 드워프 국왕과 만나게 되었다.

“엄마! 엄마아아!!”

“....”

허옇게 센 턱수염을 복부까지 기른 드워프 국왕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광경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다.

갓 핸드를 던져준 그리드는 파그마가 탈리마에 머물 당시 어린소년에 불과했을 국왕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파그마는 여제를 죽이지 않았어.’

적어도 파그마는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고 공감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니라는 뜻.

‘아마도....’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리드는 믿고 싶었다.

“그럼 이제 영혼의 해방이라는 것을 시작해보도록 하죠.”

갓 핸드를 품에 안고 엉엉 우는 드워프 왕의 상태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기는 요원해 보였다.

판단한 그리드가 펠롯에게 눈짓하는 순간이었다.

뻥!

드워프 왕을 걷어찬 갓 핸드가 일제히 중지를 치켜세웠다.

“....”

“....”

“....”

궁궐에 적막이 도래했고, 그리드는 재차 확신했다.

‘역시 여제는 파그마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야.’

마리벨 여제는, 마리로즈를 품기 위해 관짝이 되기를 자처했던 교황 크레이슐러와 동류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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