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템빨 60권 - 01화
란스티어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과거 최강최악의 암살집단으로 악명을 떨쳤던 <이클립스>의 수장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칭호였다.
하지만 제25대 란스티어가 전설의 어쌔신에 등극하게 되면서 잘못 된 인식이 세간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본래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불러왔던 밤의 이름이 경외의 대상으로 칭송 받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음지를 벗어나 본질을 잃은 거지. 그때부터 이클립스의 입지가 흔들렸다고 하는군.”
그림자의 왕 카심.
지난 몇 년 동안 페이커에게 란스티어의 술법을 가르쳐온 그가 오늘 처음으로 이클립스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금일부로 란스티어의 술법을 전부 습득한 페이커에게 마음을 연 눈치였다.
란스티어의 술법을 익혔다는 건 즉, 란스티어가 될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니까.
페이커는 이클립스를 공부하고 이해해야했다. 그게 그에게 새롭게 부여 된 의무다.
“란스티어와 함께 양지로 끌려 나온 이클립스는 너무 빨리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신비감을 잃은 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언급되고 관심을 받다 보니 의뢰인들은 꺼려하기 시작했지.”
암살조직이다.
언제나 은밀하게 활동해야하는 그들이 대중의 관심을 받아서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의외의 상황에서 여러 가지 제약이 발생했고 사람들의 의뢰는 눈에 띄게 줄었다. 란스티어에게 절대 복종했던 조직의 어쌔신들이 란스티어에게 불만을 품었다. 조금씩, 보이지 않게 조직의 위계가 붕괴됐다.
“책임을 통감한 25대 란스티어가 은퇴했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조직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고 서대륙 전체를 장악했던 정보망은 작동을 멈췄지. 최강의 암살집단이 평범한 수준으로 전락한 셈이야.”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국의 재능 있는 소년들을 납치해서 암살자로 육성했던 이클립스의 시스템이 붕괴된 탓에 란스티어의 이름을 이을만한 인재가 부재에 놓인 것이다.
란스티어의 술법은 점차 퇴보하고 말았다.
카심과 도란의 스승이었던 32대 란스티어의 대에 이르러선 기술의 많은 부분이 소실 됐을 정도로 말이다.
“네가 란스티어의 술법의 진정한 극의를 탐구하기 위해선 전대 란스티어들의 기록을 열람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클립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야. 그들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어쩌다가 연락이 끊긴 겁니까?”
카심은 32대 란스티어의 직계 제자였다.
이클립스의 후계자인 그가 이클립스와 연락이 끊겼다는 건 조금 의아하다.
페이커가 질문하자 카심이 설명했다.
“스승님의 은퇴 시기가 다가올 무렵부터 이클립스엔 내란의 징조가 있었다. 원인은 나와 도란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의 재능이 부족해 술법의 절반씩만을 체득했으니 조직원들이 불안을 품은 거다. 스승님께서는 나와 도란이 협력해서 하나의 란스티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하셨지만 글쎄.... 당사자인 나와 도란조차도 과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으니 조직원들이 느끼는 불신은 훨씬 더 컸겠지.”
“결국 반란이 일어난 겁니까?”
“그래, 간부들의 지지를 얻은 2인자가 노쇠하신 스승님을 몰아냈다. 나와 도란을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으신 스승님께선 이후로 산속에서 우리를 가르치시다가 몇 년 뒤에 작고하셨지.”
“....”
“스승님께서 떠나신 후, 도란은 평범한 삶을 선택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어. 너도 알다시피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이클립스의 행방을 추적했다. 정당한 후계자만이 열람할 수 있다는 전대 란스티어들의 기록을 되찾아 조금이라도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클립스의 행방을 추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어.”
“.....”
“하지만 최근에 아주 중요한 흔적을 발견했다. 제국의 무저갱에 이클립스의 자취가 남아있더군.”
바사라 황제가 아이린과 로드를 제국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그때 호위로 따라나선 카심은 한때 복수의 대상이었던 제국의 내부를 관찰하며 만약 자신이 끝까지 제국과 싸웠다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지금쯤 무저갱에 갇혀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우울한 마음으로 무저갱을 방문했다가 이클립스의 자취를 엿보았다.
“이클립스가 그곳을 찾았다는 건 죄수 중 누군가에게 용건이 있었다는 겁니까?”
페이커가 질문했다.
본래 과묵한 그가 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다는 건 그에게도 란스티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증거였다.
카심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맞다. 현재로썬 그렇게 추측하는 게 합당하지.”
“알겠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왕비와 왕자의 호위를 부탁합니다.”
단서를 잡았으니 행동만이 남았다.
제국은 템빨국에 호의적인 입장이니 무저갱을 조사할 수 있게끔 배려해줄 확률이 높다.
판단한 페이커가 카심에게 목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금세 그림자에 녹아들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카심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란스티어.... 부활하는가.”
***
세계는 크게 3개로 나뉜다.
지옥과 지상, 그리고 천국.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서대륙과 동대륙도 결국 지상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묶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드래곤 레어만큼은 예외다.
드래곤 레어는 지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상과는 완전히 별개의 공간으로 치부됐다.
드래곤을 지상의 신이라 칭송하는 무리들에겐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드래곤을 인류의 위협으로 경계하는 무리들에겐 지옥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으로 취급 당해왔다.
즉, 천국이자 지옥인 곳.
드래곤 레어에 감히 제 발로 찾아가는 멍청이는 역사상 몇 명 없을 것이다.
한데 그 멍청이가 하필 그리드의 곁에 있었다.
[플레이어 최초로 <염룡 트라우카의 둥지>에 입장하였습니다.]
[드래곤 레어를 지키는 몬스터 무리와 고차원의 마법 함정을 돌파한 당신의 위업은 전설로 남을 것입니다.]
[최초 입장 보상으로 초월의 격이 개방됩니다.]
[이미 초월의 격이 개방된 상태입니다. 보상 변경으로 초월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약점 공격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약점 막기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드래곤의 결계? 흥, 이 몸께서는 뚫으신지 오래다.”
“.....”
드래곤 레어는 과연 엄청난 공간이었다.
최초 방문 보상이 무려 초월의 격이라니....
서사시를 1편 썼을 때 얻는 보상과 동등하다.
레어를 방문한 일이 그만큼 대단한 위업이라는 뜻.
예상치 못하게 큰 보상을 얻은 그리드였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일단. 일단 그것부터 내려놔요.”
정령왕들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브라함을 그리드가 진정시켰다.
여태껏 몇 번이나 브라함의 트롤링을 겪어온 그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이미 한 번 브라함에게 도둑질 당했던 염룡이 아무런 대비도 안 해놨을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추적 마법? 그런 거 달려있으면 염룡한테 꼬리 잡히는 거 아닙니까? 그대로 추격당해서 당신은 물론이고 템빨국까지 멸망할 수 있다고요.”
그리드의 우려는 타당했다.
하지만 브라함은 콧방귀 뀔 따름이었다.
“네놈은 드래곤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
“도둑놈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한다? 흥, 그래서야 자신이 도둑놈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물, 심지어 신조차도 하등하게 보는 드래곤이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네놈은 전혀 모르는군.”
‘그래도 자기가 도둑놈인 건 아네.’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확답을 요구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 훔쳐가도 우리의 흔적이 남을 일은 없다, 이겁니까?”
“맞다.”
“....실화?”
자신감 넘치는 브라함의 표정이 그리드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의 시선이 레어의 구석으로 꽂혔다.
과연 드래곤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더니, 온갖 종류의 금화와 보석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저게 다 얼마치야?’
그리드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든다.
십공신에게 최대한 많은 포대자루를 챙겨 놓으라고 귓속말을 보낸 그가 보물 산으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침입자에게. 침입자에게 경고합니다.
-물러나세요. 그 이상의 행동은 무력으로 진압하겠습니다.
브라함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4기의 정령왕이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도난 방지 시스템이 탑재된 듯했다.
‘드워프들에게 정령왕을 빼앗은 이유가 이거였어?’
브라함의 추측과 다르게 아무래도 염룡은 도둑놈을 의식한 듯하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함정을 설치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우연히 드워프에게 빼앗은’ 정령왕을 이용해서 방비를 구축한 것이고.
눈치 챈 브라함이 대소를 터뜨렸다.
“큭큭....! 크하하하핫!! 도마뱀 새끼도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지금이 웃을 때요?”
질색한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붙잡혀 있는 정령왕들을 빼앗아 풀어줬다.
이 이상 선을 넘었다간 정말로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
그런 그리드의 태도가 브라함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요.”
“칫, 알았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약 염룡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했다간 대륙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으니 양보하는 수밖에.
“이제 어서 돌아가.... 응?”
브라함을 재촉해 떠나려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보물산이 등지고 있는 석벽에 꽂혔다.
“저, 저건?”
드래곤의 숨결이 빚은 화석.
앙트리노 덕분에 정보량이 급격히 늘어난 광물 사전에 기록돼 있는 광물이다.
드래곤의 숨결에 최소 200년 이상 노출 된 석벽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자라는 광물이라고 명시돼 있다.
드래곤의 속성에 따라서 광물의 속성도 변한다고.
“....?”
투덜거리며 텔레포트 마법을 준비하던 브라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콧김을 토하는 그리드의 모습이 브라함을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드가 질문했다.
“이놈들.... 조용히 해치울 수 있을까요?”
그리드의 손은 정령왕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이 동그래져서 몸을 떠는 정령왕들과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본 브라함이 한숨 쉬었다.
“조금 전까지 염려하던 것들엔 무슨 의미가 있던 거지? 녀석들을 파괴해서 염룡을 자극하기보단 잠시 무력화시키는 게 좋겠군.”
스파앗.
브라함의 심상세계가 현현했다.
그곳에 정령왕들을 가둬 넣은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경고했다.
“5분이다. 5분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염룡이 이변을 감지하고 돌아올 거다.”
심상세계의 현현은 매우 큰 파급력을 자랑한다.
자신의 둥지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침범했다는 사실을 염룡은 이내 눈치 채고 말 것이었다.
브라함의 경고를 새겨 들은 그리드가 곡괭이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