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09화
4황자 에단의 반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황제가 되지 못했고, 모친을 구하지 못했으며, 죽음으로써 반역의 대가를 치렀다.
감히 황제에게, 심지어 부친에게 칼을 겨눴던 그는 본래 제국 역사에서 지워졌어야할 존재다.
콧대 높은 제국은 황자의 반역을 기록하는 일을 수치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제국은 에단의 이름을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에단은 앞으로의 제국 역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다.
그의 반역이 너무 큰 변화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황제를 죽였고, 제국과 세계를 바꿨다.
그래, 황제를 죽였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는 건국 황제 사하란의 검의 힘을 등에 업은 에단에게 시해 당했다.
물론, 쥬앙데르크에 의해서 피신 당했던 그리드는 쥬앙데르크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쥬앙데르크의 죽음을 분명하게 명시했었다.
피로 물든 궁전에 남아있던 건 실제로 에단 한 사람 뿐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쥬앙데르크가 살아있다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알이 빙의했던 아그너스를 토벌하고자 했을 때.
생각보다 더욱 더 멀쩡했던 그랜드마스터의 모습을 목격한 그리드는 어쩌면 쥬앙데르크도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당시엔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쥬앙데르크의 곁에는 마갑 첸슬러가 함께였다.
마갑 첸슬러는 ‘불멸’이라는 수식언을 지닌 인물.
그의 마갑이 쥬앙데르크를 지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맞아. 살아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쉽다.
적기(赤氣)를 다루는 쥬앙데르크의 무력은 서대륙에서도 최고 수준.
황제가 아닌 쥬앙데르크 개인 또한 대륙 최강의 ‘세력’ 중 하나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굉장한 무력을 지닌 사람이 쥬앙데르크였다.
클라스에 맞게 기왕이면 더 극적으로 멋지게 등장해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멋진 등장의 기회는 비교적 최근에도 있었다.
다섯 대악마가 공습해왔을 당시.
그리드가 13위 대악마 벨레드에게 쥐어터지고 있을 때 ‘세상을 구하고자 참전했다.’는 대사 한 번 읊어주며 나타나 도와줬으면 엄청 멋졌을 것이다.
한데 이런 식의 생존 소식이라니, 솔직히 영 허접하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리드가 반문했다.
“쥬앙데르크가 살아있다고? 어떻게 알게 된 건데?”
“전직 퀘스트 때문에 당대 란스티어를 추적하다가 알게 됐다.”
란스티어의 술법은 그림자에 상처를 남긴다.
술법에 정통한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희미한 흔적이 무저갱의 입구에 남아있었다.
“당대에 란스티어가 있어?”
“그래.”
“설마 이클립스의 본거지까지 찾아낸 거고?”
“맞다.”
“....!”
한때 최강의 어쌔신 집단이었던 이클립스.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이클립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었고 그리드 역시 이클립스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리드는 이클립스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대 란스티어의 제자인 카심과 도란이 란스티어의 술법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클립스를 단순히 퇴물 취급했었다.
한데 새로운 란스티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모자라 황궁에 있던 쥬앙데르크의 신변을 확보할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유지하고 있었다니?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페이커가 덧붙였다.
“베인의 정체가 바로 란스티어였다.”
“....!!”
상황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한 마디였다.
쥬앙데르크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베인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베인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는데 란스티어의 술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었어.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그래, 쥬앙데르크조차 놈의 실체를 몰랐을 거다.”
의도적으로 쥬앙데르크에게 접근한 베인은 긴 세월에 걸쳐서 신뢰를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의 그림자로 곁에 머물 수 있던 걸 테고.
“왜지? 베인 그놈은 황궁에서 뭘 얻으려고 했던 거지?”
“쥬앙데르크 그 자체.”
“....?”
“이클립스의 본거지에서 쥬앙데르크의 적기가 착취되고 있다.”
“....!!”
적기는 사하란 혈통의 상징이다.
오직 황족만이 계승하는 힘으로, 특히 쥬앙데르크의 적기는 굉장히 강한 편에 속한다고 들었다.
해일 같은 힘과 태양 같은 열기, 물질에 대한 구속력과 생명에 대한 지배력....
쥬앙데르크의 적기가 발휘했던 그 강렬한 힘은 그리드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한데 그 역사적인 힘이 이클립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데?”
“베인에겐 적통성이 없다. 그는 단지 전대 란스티어의 오른팔이었을 뿐 정식으로 란스티어의 술법을 배운 게 아니야.”
반란을 일으켜서 전대 란스티어를 살해한 후 오직 기록을 통해서만 술법을 배운 케이스다.
독자적으로 술법을 익혔다는 뜻인데 그 과정에서 명백한 한계를 느끼고 외부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에너지로 적기를 선택한 거고?”
“아마도. 란스티어의 술법은 그림자라는 개념을 물질로 구분시켜 통제하는 힘이니까.”
“???”
“물질에 대한 구속력을 높이는 적기와 란스티어의 술법의 상성이 매우 좋다는 뜻이다. 베인은 란스티어의 술법을 완전하게 완성시키기 위해서 쥬앙데르크에게 접근했던 거겠지.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적기를 빼앗을 의도로 말이다.”
“아....”
좋다.
모든 정황이 파악됐다.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좋아. 이클립스의 본거지로 안내해줘. 함께 이클립스를 때려 부수고 쥬앙데르크를 구출하자.”
“....”
“....?”
당장 떠날 채비를 하던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이커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페이커가 말했다.
“넌 나서지 마라.”
“...??”
“베인은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고, 이클립스와의 관계는 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내가 굳이 네게 찾아와 이번 사실을 알린 이유는 쥬앙데르크의 처우를 논의하기 위해서였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
돌이켜 생각해보면, 페이커는 단 한 번도 그리드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항상 그리드의 뒤를 지키며 자신의 일은 묵묵히 해결했었다.
비단 페이커 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궁성으로 전직한 지슈카가 그렇듯 십공신 대부분이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왔다.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맞아. 페이커는 내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 하물며 전직 퀘스트를 내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건 페이커 입장에서 자존심 상할 문제지.’
반면 나는 힘들 때마다 기사 소환으로 도움을 요청하곤 했었는데...
새삼 깨닫고 민망함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페이커가 질문했다.
“쥬앙데르크를 살리길 바라나?”
쥬앙데르크는 적이었다.
단지 그리드와 템빨국의 적이기에 앞서 차별과 폭력을 통해 대륙의 정세를 최악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쥬앙데르크라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하란 제국의 황제라는 족속들이 모두 그랬었다.
바사라 이전까지의 황제들 말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살리고 싶어. 그자에겐 신세진 게 있으니까.”
“카심과 피아로가 알게 되면 원망할 수도 있다.”
“아니, 쥬앙데르크는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의지로 역사에서 퇴장한 인물이야. 이미 한 번 목숨을 바쳐서 사죄한 그를 피아로와 카심이 아직까지 원망할 리 없어.”
“틀렸습니다.”
대화 중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카심이었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저는 아직도 그자를 원망합니다. 죽어서도 그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카심.”
내 생각이 짧았던 건가.
난처해하는 그리드에게 카심이 이어 말했다.
“그렇기에 그자가 살아남길 바랍니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바사라 황제가 바꾸는 세상을 목격하고, 자신의 죄를 절실히 깨달으며, 후회하길 바랍니다.”
“.....”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리드와 카심 모두가 황제의 생존을 원한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페이커의 망설임은 끝났다.
“그럼 쥬앙데르크는 살리겠다.”
“잠깐...!”
그대로 떠나려는 페이커를 그리드가 멈춰 세웠다.
페이커는 이미 한 번 실패하고 죽음을 겪었다.
정말로 혼자서 괜찮은 걸까?
그리드의 근심을 읽은 페이커가 드물게 피식 웃었다.
“아까는 쥬앙데르크의 처분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빈틈을 드러냈을 뿐이야. 걱정할 필요 없다.”
베인은 분명히 강했다.
란스티어의 술법을 봉인한 상태에서도 제국의 기둥으로 손꼽혔을 정도다.
이미 400레벨을 가뿐히 넘기는 그의 진짜 실력은 전설에 근접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수백 명의 부하까지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페이커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심과 도란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전대 란스티어의 술법을 그는 이미 완전히 습득한 상태였으니까.
스르륵.
그림자에 녹아들어 사라지는 페이커.
점차 멀어지는 그의 기척을 도중에 놓치고 초조해하는 그리드에게 카심이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템빨국 내에도 페이커보다 강한 인물은 단 4명밖에 없으니까요. 베인은 페이커의 적수가 아닙니다.”
당대 란스티어는 베인 따위가 아닌 페이커다.
페이커는 역사상 최강의 란스티어 중 한 명이 될 테니까.
카심은 확신했다.
“두 번째 전설의 어쌔신은 전하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결과는 3일 후에 증명됐다.
[새로운 란스티어가 탄생하였습니다.]
[전설의 어쌔신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림자를 유영하는 비수가 비명 없는 죽음을 생산할 것입니다.]
란스티어로 등극한 누군가는 그대로 전설이 되었고, 그 누군가란 베인이 아닌 페이커였다.
깊은 새벽.
“....또 다시 신세를 졌군.”
초췌한 몰골의 쥬앙데르크와 첸슬러가 그리드 앞에 당도했다.
그들을 인도해온 페이커가 자신의 그림자에 스며드는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는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두 번째 전설의 어쌔신은 전하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카심의 확신이 현실이 된 것이다.
“살아 계실 줄 몰랐습니다.”
분명히 곁에 있음에도 기척을 느낄 수 없는 페이커의 실력에 경탄하며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쥬앙데르크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제국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닐 것이다.
역시나.
“짐은 아니,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오.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두 번 다신 없을 게요.”
“그러시다면 폐하께서 머무르실 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염치는 없소.”
그리드의 호의를 쥬앙데르크는 단칼에 거절했다.
새하얗게 탈색 된 머리카락과 비쩍 마른 몸.
대륙을 호령했던 옛 황제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한 쥬앙데르크는 막연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는 첸슬러와 함께 대륙을 유람할 계획이오. 새로운 황제가 바꿔갈 세상을 지켜보며 내 과오를 뉘우치고, 후회하며 여생을 보낼 거요.”
“....”
카심의 뜻대로 됐다.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기껏 변해가고 있는 세계에 쥬앙데르크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리드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고의 권력과 무력을 지녔던 존재가 이토록 초라해질 수 있단 사실에 깨닫는 바가 컸다.
자신은 쥬앙데르크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떠나십시오.”
대전의 문을 연 그리드가 쥬앙데르크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전 시대의 통치자를 향한 예우 따위가 아닌, 자신을 도와주고 배려해줬던 은인을 향한 예의였다.
“.....”
목례로 화답한 쥬앙데르크가 대전을 나섰다.
그의 시선이 왕궁 곳곳을 살폈다.
어쩌면 옛 벗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이내 찾지 못하고, 서운함을 내색하지 못한 채 조용히 왕궁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첸슬러라는 새로운 벗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는 그리드에게 그림자 속 페이커가 갑옷을 건네 왔다.
“첸슬러의 갑옷이다. 네게 주고 싶다더군.”
착용자에게 ‘절대 죽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인다는 마갑(魔鉀).
파그마의 눈으로 그것의 정보를 읽은 그리드가 비화를 발견하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염룡검을 꺼내 일으킨 불길로 불태웠다.
소문의 마갑은 첸슬러의 충의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으니까.
쥬앙데르크가 살아있는 이상, 첸슬러의 불멸은 마갑이 없어도 유지될 것이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미소 지은 그리드가 페이커에게 제안했다.
“버스 태워줄까? 1렙 됐잖아.”
“괜찮다. 레벨은 퀘스트로 복구할 수 있더군.”
“뭐....?”
“.....”
X망겜.
그리드의 욕설이 새벽녘의 왕궁에 메아리쳤다.
이날 이후.
사냥터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정체불명의 노인과 중년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플레이어들의 후기가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