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11화
<새로운 전설의 등장! 궁성의 정체는 역시 지슈카일까?>
<템빨국, 총 6명의 전설을 보유하게 돼....>
<란스티어의 출현.... 그의 정체를 유추하기 어렵다.>
『전설의 궁수는 지슈카일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입니다. 그녀에게 전설의 자격이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반면 란스티어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당연히 페이커겠죠. 노말 클래스로 살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 최강의 어쌔신이 아닌 이상에야 누가 란스티어의 자격을 얻겠습니까?』
『란스티어는 어떤 경지를 뜻하는 이름이 아니라 이클립스의 수장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즉 이클립스 출신의 플레이어나 NPC가 란스티어에 등극했다고 보는 게 합당한 추론이죠.』
『제 생각도 같아요. 템빨국에서 활동 중인 페이커가 란스티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놈들은 맨날 왜 저러는 거야?”
포식이불족발 해남점.
족발 3점을 깻잎에 얹어 입 안 가득 넣은 극검이 우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혈통이 전설의 어쌔신으로 전직한 마당에 자꾸만 아니라고 우겨대는 패널들의 무식한 자태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채운 포식이불족발이 씁쓸하게 웃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두 명의 전설이 전부 템빨국 소속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20억 명이 넘는 플레이어 중에 전설이 된 플레이어는 채 10명이 안 된다.
한데 그들 대부분이 템빨국 소속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란스티어의 정체가 페이커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사람들의 박탈감은 더 커질 거고 템빨국에 괜한 적개심을 품을 테니까.”
“스스로 노력해서 이룩한 경지인데 왜 남들이 박탈감을 느끼고 적개심을 품느냐 이거야.”
“노력만으론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고나는 재능도 운이라는 거야. 그들은 박탈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지.”
포식이불족발이 말하는 그들.
그 평범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포식이불족발이었다.
포식이불족발은 최근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유니크 클래스 <던전 제작자>의 한계는 상위 사냥터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상위 사냥터일수록 지형이 험난해 던전을 만들 공간 자체를 찾기가 힘들었고, 설령 공간을 찾아낼지언정 몹의 리스폰 시간이 너무 빨라 던전을 건설할 시간이 없었으니 ‘던전에서 강한’ 포식이불족발의 저력이 쉽게 발휘되지 않았다.
한숨 쉬는 포식이불족발에게 극검이 콧방귀 뀌었다.
“난 노말 클래스에 딱히 천재도 아닌데도 사냥 잘하는데?”
“그야 넌 템빨....”
반사적으로 반응하던 포식이불족발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노력을 강조하는 극검에게 템빨이란 말을 꺼내 그의 노력을 부정해버렸으니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극검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짙게 웃었다.
“그래, 템빨이다. 재능과 행운이라는 불합리에 가로막혀 노력을 부정 당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템빨이 존재하는 거라고.”
“....!”
“이제 슬슬 결정해라. 애매한 포지션에 있지 말고 템빨단 1군에 가입해. 그리고 갓리드에게 템빨 좀 받아서 나랑 같이 즐겜하자.”
“....”
사실 극검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한 번에 2명의 전설을 얻은 템빨국에 조만간 사나운 풍파가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자신 나름의 방법으로 대책을 마련 중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리드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아. 압도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에 질투할 엄두조차 못 내는 거지. 내 생각엔 템빨국도 그리드처럼 만들어야 돼. 압도적으로 강해져야만 사람들이 감히 적대심을 품지 못할 거고 그때야 비로소 템빨국은 안전해질 수 있다.”
짝!
극검이 손뼉을 치자 수십 명의 청년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극검의 뒤에 도열하고 선 그들은 모두 대한애국협회 소속의 게이머들이었다.
극검이 템빨국을 위해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다.
“포식아. 너도 우리와 함께하자. 우리랑 같이 템빨국을 더 강하게 만들자.”
***
“....”
루나를 잃은 아그너스는 3일 내내 가만히 있었다.
망자의 군단을 부활시킨답시고 묘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식음을 전폐한 채 방 안에 틀어박혔다.
[사망하였습니다.]
아사(餓死).
극히 소수의 플레이어만이 체험한다는 죽음을 겪고, 또 다시 겪는다.
여파로 강제 로그아웃 당한 그는 Satisfy에 다시 접속한 후에야 깨달았다.
“....내가 미쳤었군.”
루나는 가짜에 불과했다. 그녀는 부활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던 그 사실들을 꽤 오랫동안 망각했었다.
“저기, 괜찮아요?”
“네가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슬그머니 다가와 묻는 의원 헤라를 아그너스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그너스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병신 같아서 동정심이라도 느낀 거냐?”
유페미나를 떠올리며 묻는 아그너스에게 헤라가 쏘아붙였다.
“제가 왜 당신을 동정해요? 전 인질이라면서요? 도망치면 지옥 끝까지 쫓아와서 죽이겠다면서요? 단지 무서워서 도망치지 못했을 뿐이에요.”
“꺼져. 이제 넌 필요 없으니까.”
곤륜삼을 다려 만드는 탕약.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는 그 신약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그너스는 헤라를 인질로 붙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요 없어졌다.
아그너스가 부활시키고 싶었던 루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이구 좋아라. 알았어요. 그럼 전 냉큼 떠나도록 하죠.”
지난 한 달.
아그너스를 곁에서 지켜본 헤라는 솔직히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었다. 딱히 어떤 정이 들었다는 뜻은 아니고, 송장을 붙잡고 애절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모습이 단순하게 불쌍했다.
자신이 그를 곁에서 보살피면 그가 정신을 회복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애초에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별세계 인물이다.
이 싸가지가 미쳤든 말든, 앞으로 어떤 고통을 겪던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 마디만 하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좀 그만 끼쳐요.”
쾅!
짐을 챙긴 헤라가 미련 없이 집을 떠나자 허름한 폐가에 고요가 도래했다.
아그너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침묵이었다.
“상태창.”
몇 시간이 지났을까.
멍하니 앉아 가만히 있던 아그너스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루나를 만든 이후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시스템을 직시하고 이곳이 가상의 세계임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353레벨.
마지막 기억보다 레벨이 무려 4개나 떨어져 있었다.
“킥, 어지간히도 뒤지고 다녔군.”
창밖을 보니 동이 터오른다.
거리로 나간 아그너스는 온갖 인간 군상을 목격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은 영원히 거머쥐지 못할 행복이 거리엔 너무나도 흔했다.
“큭큭.... 크하하하하핫!!”
아그너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악(惡)으로 뭉쳤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바알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대소를 터뜨린 그가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주변에 인적은 없었다.
설령 인적이 있었더라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망자 소환.”
일단은 레벨을 올린다.
그리고 루나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최강의 사자(死者)들을 창조하여 전설에 등극하고 세계에 불행을 전파하리라.
흐트러져있던 녹발을 쓸어넘긴 아그너스의 금안이 언덕 아래 도시를 차갑게 응시했다.
***
‘빨리 다녀와야겠는데.’
지슈카와 페이커.
무려 2명의 템빨단원이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했다.
덕분에 템빨국의 전력이 급격히 상승했지만 그리드는 기쁨보다 불안이 앞섰다.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논리로 플레이어를 강제하는 Satisfy의 엿 같은 시스템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강해진 템빨국은 더 강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
에피소드 개연성이야 충분하다.
이클립스가 숨겨놨던 비밀병기가 페이커에게 복수하러 찾아올 수도, 궁성이 되기를 꿈꿨던 어느 무신의 추종자가 지슈카를 습격할 수도 있는 거니까.
나라가 전란에 휩쓸릴지 모를 이런 상황에 자리를 비우려니 그리드는 영 찝찝했다.
하지만 백린목을 팰 수 있는 사람은 그리드가 유일하다.
장작을 구하기 위해선 그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전설의 나무꾼은 없나?’
더 많은 분야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
세력이 커지고 할 일이 늘어날수록 인재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앞으론 나도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어.’
현재 템빨단의 총원은 3천 명이 넘는다.
그들 중 90퍼센트 이상을 라우엘이 섭외했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전 체다카 길드원들과 전 자이언트 길드원들이었다.
그리드가 데려온 템빨단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대신 그리드는 네임드 NPC들과 대장장이들을 섭외하는 등 백성의 숫자를 늘리는데 일조했지만 길드원과 백성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NPC와 플레이어의 역할도 철저히 구분 됐고 말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아이린의 뺨에 입술을 맞춘 그리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초조한 속내를 전혀 내색하지 않는 환한 얼굴이었다. 근심과 걱정을 엿볼 수 없었다.
덕분에 그리드를 배웅하는 아이린의 마음도 한결 편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고작 장작 패러 가는 건데 조심할 것까지야.”
다시 한 번 아이린을 안심시킨 그리드가 힐끔, 스틱세이를 돌아보았다.
수업 중에 호출을 받고 달려온 스틱세이가 한탄했다.
“요즘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저를 흉보는 눈치입니다. 학장이란 작자가 걸핏하면 수업 중에 자리를 비우니 곱게 보이지 않겠지요.”
“그럼 본격적으로 제자를 키워보는 건 어때? 내게 새로운 이동 수단 아니, 당신의 역할을 대신할만큼 훌륭한 마법사를 제공해줘. 그럼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흐음, 제자라....”
템빨 아카데미의 학생 수백 명이 이미 스틱세이에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로드 또한 따로 개입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스틱세이의 제자라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스틱세이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건 지식과 정령술 뿐이었기 때문이다.
스틱세이는 자신을 상징하는 마법이나 하이엘프의 비전은 아직 누군가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삶이란 무한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굳이 타인을 통해서 유지를 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5분 대기조마냥 매일 그리드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소화하다보니 피로도가 상당한 까닭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참에 제자 한 명 제대로 키워봐야겠군요.”
결심하는 스틱세이.
그의 의도는 매우 불순한 것이었지만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로 선택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과 축복을 거머쥐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단, 그리드의 텔셔틀이 돼야 한다는 의무가 부여되긴 했지만 말이다.
“잘 생각했어.”
스틱세이의 결심이 그리드를 기쁘게 만들었다.
대현자의 제자라니.
필시 큰 힘이 될 것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매스 텔레포트의 마법진 위에 오르는 그리드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전하!”
“응?”
피아로였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그리드가 스틱세이의 마법 발동을 저지했다.
“무슨 일이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어?”
동대륙에 피아로가?
평소엔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는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설명했다.
“황금 호두가 자라는 환경을 제 눈으로 정확히 살펴야겠습니다.”
“아....!”
<황금 호두>
자연이 내린 축복이라고도 불립니다.
동대륙 모든 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이 즐겨먹는 간식이자 비약입니다.
동대륙 어딘가에는 이 호두를 주식으로 삼는 영물이 존재할 것도 같습니다.
복용 시 모든 능력치가 1시간 동안 10퍼센트 상승합니다.
또한, 매우 낮은 확률로 능력치 하나가 영구적으로 5 상승합니다. 호두 껍질을 잘 깔수록 능력치가 오르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무게:0.1
황금 호두는 그리드가 처음 동대륙을 발견했을 때 챙겨온 영약이다.
피아로에게 재배해보라고 권유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재배에 실패하고 골머리를 썩는 눈치였는데 이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듯했다.
“전하의 도움으로 익힌 무쌍심법 덕분에 경지가 올라 논밭을 더 잘 가꾸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동대륙의 환경을 서대륙에 재현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지 않을 듯합니다.”
“좋아, 같이 가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황금 호두는 기본적으로 버프 음식이지만 그리드의 손재주가 결합되면 엘릭서로 거듭날 확률이 높았다.
만약 황금 호두를 템빨국에서 재배하게 된다면 역사상 최초로 엘릭서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