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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80화 (1,170/1,794)

템빨 60권 - 15화

“그대는 초조하지 않았나?”

그랜드마스터는 과묵하다.

인류를 구원하려다가 실패하고 칠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사연을 고백한 뒤로,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먼저 운을 뗀 것이다.

본격적인 퀘스트를 알리는 전조와도 같았다.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지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괜찮았습니다. 마스터께서 어련히 좋은 때에 지시를 내려주시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지발의 태도가 깍듯한 이유는 단지 호감도를 의식해서가 아니다.

인류를 지키고자 신에게 맞서 싸웠던, 그리고 다시 또 싸우기 위해 준비 중인 잊힌 옛 영웅을 향한 존경이었다.

“사실 무익한 살생은 피하고 싶었다.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을 해치는 순간 과거의 나를 잃을 것만 같아서였지. 추악한 신들이 뒤집어씌운 오명이 낙인이 되어 내가 진짜로 악인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석양에 타는 저녁놀을 배경삼아 걸으며,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노을에 붉게 물든 손이 마치 피에 젖은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손엔 이미 많은 피가 묻었어.”

제국 건국 과정에서 수만 단위의 살생을 일으켰던 <사하란의 검>은 지크프렉터가 사하란에게 친히 만들어준 것이다.

제국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들은 무저갱을 통해 대륙을 넘고자했던 지크프렉터의 염원에 황실이 부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약속을 잊은 황실을 벌하고자, 부모에게 칼을 겨누는 자식에게 힘을 실어줬던 인물 또한 지크프렉터였다.

칠선인을 부활시켜 거짓 된 신들을 벌하겠다는 미명하에 지크프렉터가 저지른 피의 복수극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내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신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이미 강을 건너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악(惡)이어야한다.

세상에서 칠악을 지우고 다른 선인들의 명예를 되찾는 대신 내가 일악이 되리라.

“다른 사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쯤이면 양저우의 궁전이 불타오르고 있겠지. 우리는 이곳에서 씽왕의 퇴로를 막는다.”

“....예.”

<쫓겨난 신들의 행방> 퀘스트가 <6악 지크의 결의>로 바뀐 것을 확인한 지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하는 지크프렉터의 선택을 보고도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이건 씽왕의 판단이 어리석었다. 그랜드마스터는 한 달 이상의 유예를 줬지만 씽왕이 고집을 꺾지 않은 거니까.’

후우....

심호흡하는 지발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 주 전 멀리서 목격했던 씽왕의 근위대는 평균 360레벨을 자랑하는 정예들.

그랜드마스터가 곁에 있다지만 자칫 방심했다간 역으로 당할 것이다.

***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었어?”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준다.

멋대로 성벽을 넘어 궁전에 침입한 수잔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던 한 달 동안의 인고가 끝났으니 해방감마저 느꼈다.

“우리가 도적떼마냥 너희한테 금품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단지 환국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달라고 부탁 했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라고 생색내면서 거부했던 거야? 동쪽 인간들은 죄다 너희처럼 정나미가 없니?”

꽈작!

궁전의 입구를 지키던 마지막 병사의 투구가 일그러졌다.

역수로 쥔 검의 손잡이를 내리친 수잔에 의해서였다.

수백 명의 병사들을 살육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귀기가 서렸군.’

정상적인 사고관을 지닌 인간은 아니다.

판단하며 주위의 기척을 다시 한 번 읽은 근위대장이 씽왕에게 속삭였다.

“그 정체불명의 초월자는 함께 오지 않은 듯합니다. 그자가 도착해서 상황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피신하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자가 오히려 퇴로를 막고 있다면?”

“수백 년 동안 왕가에만 전해져온 비밀 통로를 그자가 알아냈다고 생각하긴 힘들군요.”

“알겠소.”

근위대장은 씽왕의 안전을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의 판단을 의심해선 안 됐다.

고개를 끄덕인 씽왕이 순순히 옥좌에서 일어나자 미소를 거둔 수잔이 버럭 소리쳤다.

“어딜 도망쳐! 환국의 위치를 알려달라니까!!”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고작 수백 년 전의 인물이 아니다.

신들의 협약에 의해 세계가 한 번 멸망하기 전.

그러니까 이 시대의 인류는 아직 탄생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인물이다.

그가 지닌 능력들은 당대의 인간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고, 수잔은 그 능력 중 일부를 학습했다.

츠카카카카칵!!

수잔의 분노에 감응하여 떠오른 고대의 룬어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회전하며 형태를 잡았고,

“헤이로!”

콰드드드드득!!

주문에 호응하여 발사됐다.

체인 라이트닝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체인 라이트닝과는 비교가 안 되는 범위와 위력을 자랑하는 번개의 분사가 궁전 전체를 장악하며 씽왕과 근위대의 몸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근위대장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주술 차단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이 나라의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하물며 정체불명의 외인들이 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와중에 방비를 허술히 했을 리 없다.

엄청난 예산을 투자해 동쪽의 주술과 서쪽의 마법 모두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부적들을 궁전 곳곳에 덕지덕지 붙여 놨다.

한데 소용이 없다니....?

“크흠!!”

잠시 넋이 나가있던 근위대장이 콧김을 내뿜으며 몸을 일으켰다. 언월도를 종으로 휘둘러 때마침 다가온 수잔의 공격을 막아낸 그가 갈! 소리치며 금나수를 펼치자 수잔의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콰앙!!

“큭....! 천한 것이 감히!”

대사하란 제국의 기사였던 나를.

그랜드마스터께 선택 받은 사도인 나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다니!

이마의 상흔을 붉히며 치를 떤 수잔이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온 언월도를 방패로 막아냈다.

하지만 불완전한 자세로 견딜 수 있는 무게는 크지 않았고, 그녀의 작은 몸은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간 뒤에야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 틈에 활을 꺼내 시위를 당긴 근위대장이 혀를 내둘렀다.

‘체면치레를 하다니?’

조금 전 수잔이 나려타곤의 수법을 썼다면.

즉, 땅바닥을 뒹굴었다면 근위대장의 공격을 충격 없이 회피할 수 있었다.

한데 굳이 방패를 세워 충격을 흡수하고 빈틈을 드러냈다.

바보 취급당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자존심 강한 놈이다.

피잉!

쏘아진 화살이 몸을 일으키고 있는 수잔의 어깨에 박힌다.

“윽!”

미간을 찌푸린 수잔이 휘청, 쓰러질 듯 하다가 자세를 고치는 동안 근위대장과 씽왕은 전력으로 내달려 궁전을 떠났다.

“잡아....! 놈들을 잡으라고!!”

눈에 불을 켠 수잔이 꿱 소리쳤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우는 수백 명의 근위대에게 발이 묶여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큰 소리 칠 입장이 못 됐다.

“수잔! 고작 한 명을 감당 못해서 놓치는 거냐!!”

“칫!”

그랜드마스터께선 명하셨다.

환국의 위치를 알아오라고.

그분의 명령은 반드시 이행해야하는 것.

“헤이로!”

파직!

고대의 룬어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수잔의 두 다리에 흡수됐다.

직후.

쿠왕!!

수잔은 80미터 거리에 있는 비상구를 단 1초 만에 주파했다. 그리고 어두운 복도를 달리고 있는 근위대장과 씽왕의 뒤를 바짝 추적해 검을 휘둘렀다.

“뭣이!”

등을 베인 근위대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초월한 속도를 목격했으니 현실감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아.... 하아.... 말해.”

수잔은 제국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베인츠 가문의 방계다.

직계인 메르세데스와 달리 가문의 비기를 전수 받는 호사를 누리진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철저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검술은 예리했고 체력은 강철과도 같았다.

고대의 룬 술식으로 일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발생한 온갖 부작용을 빠르게 회복한 그녀가 씽왕의 목에 검을 겨눴다.

“자, 말해. 환국은 어디에 있지?”

그냥 대답 한 마디면 될 걸 왜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걸까?

수잔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녀의 분노에 찬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씽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줄 수 없다. 짐이 그대의 물음에 답하는 순간 현무의 가호가 무너지고 씽은 쑥대밭이 될 테니.”

실제로 환국과 양반을 목격하지 못한 외부인에게 환국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환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가 된다.

잊기는커녕 환국과 양반의 존재를 널리 알려 신격에 일조하는 셈이니 기필코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속내를 수잔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설령 이해했다고 해도 묵살했을 것이다.

타인의 사정 따위 자신과 상관없었으니까.

“그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자.”

독살스레 웃은 수잔이 씽왕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었다.

일부러 급소는 피했다. 인질로서 가치 있는 존재를 굳이 초장부터 죽여서야 손해다.

“....!?”

수잔이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씽왕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은 순간, 슬쩍 손을 움직여 칼날을 비껴낸 씽왕의 비수 같은 수도가 그녀의 심장에 꽂혀왔기 때문이다.

만약 한 발만 늦게 피했어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으리라.

“짐 또한 호신을 위해 무예를 익혔다.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진 않을 게야.”

서대륙에선 볼 수 없는 기수식을 취한 씽왕이 고요한 시선으로 수잔을 바라본다.

수잔은 직감했다.

‘강해?’

최소 솔로 넘버 나이트급이다.

옛 칠공작의 말석 정도는 꿰찰 정도쯤 될 듯하다.

결국 그 정도뿐이라는 이야기다.

“귀엽네.”

놀란 것도 잠시.

킥, 콧방귀 뀐 수잔이 검 한 자루를 더 꺼내 쥐었다.

쌍수검의 기수식을 취하는 그녀의 기도가 여태까지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랜드마스터가 친히 보강해준 네오 베인츠식 검술의 위력이 편린을 드러내는 것이다.

움찔, 놀라는 씽왕의 표정이 이어서 와락 무너졌다.

복도 뒤편에서 수잔의 동료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목격한 까닭이다.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

“템빨국의 왕비마마께서 입장하십니다.”

굵직한 중년 남성의 음성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아름다운 은발을 편하게 올려 묶은 그녀는 가벼운 경장차림에 심지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리의 소년들을 연상시키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품이 넘쳤다.

워낙 고귀한 외모 때문이었....

“여어. 내가 바로 템빨국의 왕비 아이린이다.”

“....”

“....”

수잔 일행은 물론이고 씽왕조차 귀를 의심하며 잠시 굳었다.

일국의 왕비를 자처하기에는 말투가 너무 가볍.... 아니, 저건 가벼운 수준이 아니라....

당황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뒤늦게 아차 싶었던 걸까.

은발 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저는 템빨국의 왕비 아이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잡아!”

수잔 일행에겐 은발 미인의 말투나 정체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방해받기 싫었다. 우선 저 요상한 불청객을 포박해놓은 뒤 뒷일을 진행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딱히 시간이 낭비될 건 없었다.

태어나 햇볕 한 번 쬐지 않은 것 같은 저런 가녀린 여성 따위, 네오 적기사 단원이라면 누구나 단 1초 만에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어딜 만져?”

“....!”

스스로를 템빨국의 왕비라고 밝힌 은발의 미인.

그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네오 적기사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린 것이다.

“그걸 사네?”

콰작!

목을 베인 여파로 꺽꺽, 피거품을 물며 주저앉은 네오 적기사.

룬어의 힘을 빌려 재생을 시도하는 그자의 안면에 은발 미인의 무릎이 꽂혔다.

오로지 살인에 초점을 맞춘 자비 없는 일격....

정말이지 처참한 광경이다.

하지만 수잔 일행과 씽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은 ‘아름답다’였다.

비산하는 핏줄기가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의 끝을 붉게 물들이자 꽃잎이 막 피어난 듯한 착각을 일으킨 까닭이다.

“씽왕, 우선 귀하를 돕겠소. 흠흠, 돕겠어요.”

끄덕끄덕.

넋이 나간 씽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이년! 정체가 뭐냐!!”

수잔의 우선 표적 순위가 바뀌었다.

쌍수검을 요란하게 휘두르는 그녀의 귓전에 은발 미인의 중얼거림이 스며들었다.

“남에 마누라한테 어디서 이년, 저년이야.”

“....!?”

동료들을 등지며 은발의 미인과 가까워진 순간.

수잔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은발 미인의 손에 쥐어져있던 투명한 검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화기가 수잔에게 경고를 보냈다.

‘위험...!’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궁전의 긴 복도가 통째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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