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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83화 (1,173/1,794)

템빨 60권 - 18화

“무릇 식물이란 볕이 드리우는 장소에 흙과 물을 마련해주면 잘 자라는 법인데 재배가 불가능하다니 흥미롭군요.”

상전들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중이었다.

한데 템빨왕비의 호위무사쯤 되는 자가 불쑥 끼어들자 씽국 귀족들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앞으로 템빨국이 씽국을 어찌 대할지 어렴풋이 예상하고 한숨 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기색을 읽은 그리드가 오해를 풀기 위해서 피아로를 소개했다.

“이분은 템빨국의 공작이며 대장군직과 농부직을 역임하고 계시는 피아로 공이세요. 템빨왕 전하께서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벗이죠.”

“....!”

피아로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벗....

그리드가 평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절실히 알게 되어 기쁘고 감격적이었다.

웅성웅성.

찔끔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무는 피아로에게 귀족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고 왠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피아로를 보면서 과연 대장군이라 그런지 위풍이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즉에 피아로를 소개 받았던 씽왕이 술렁이는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술잔을 한 바퀴 돌린 후에 아이린 왕비님을, 술잔을 두 바퀴 돌린 후에 피아로 공을 정식으로 소개드릴 예정이었소. 한데 대신들께서 인내심이 부족하시어 순서가 앞당겨지고 말았군.”

“죄송합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자신들의 태도를 책망하는 씽왕에게 귀족들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가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부끄러운 죄인이라도 된 마냥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씽왕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눈치였다. 씽왕이 유능한 왕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제 불찰입니다. 일개 신하되는 자가 전하들의 대화에 허락도 없이 끼어들었으니 책망 받아 마땅하나이다.”

피아로 또한 씽왕에게 정중히 조아렸다.

상대는 그리드가 친히 혈맹을 맺은 나라의 왕이다. 존중하는 게 당연했다.

고맙다는 듯이 미소지은 씽왕이 씽의 귀족들에게 피아로를 다시 한 번 소개시켰다.

“왕비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피아로 공은 대국 템빨국의 군권을 쥐고 있는 가장 높은 귀족이시오. 대신들께서도 피아로 공을 소홀히 대해선 안 될 것이오.”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열렬히 소개하는 씽왕과 힘차게 대답하는 귀족들.

그들 모두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피아로를 대장군이자 농부라고 소개했던 템빨왕비의 말을 뻔히 듣고도 잘못 들은 거라고 흘려 넘기려고 애썼다.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짓는 피아로의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농부가 아니라 농업장관이라고 소개할 걸 그랬나? 그럼 사람들이 귀를 의심하진 않았을 텐데.’

피아로의 정체성은 농부다.

대장군이나 공작이라는 지위보다 농부라고 불리는 걸 기뻐했다.

그리드는 피아로의 대외활동을 위해서라도 농업장관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야할 것 같다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행정관 라빗의 얼굴이 떠올라 난처했지만 말이다.

‘피아로에게 줘야할 녹봉이 너무 늘어나선 안 된다고 반대할 것 같은데....’

뭐, 나중에 따로 합의하면 될 일이다.

상념을 떨쳐낸 그리드가 씽왕에게 부탁했다.

“연회가 끝나는 즉시 호두나무 숲을 방문하고 싶네요.”

“곧 해가 저물 터인데 하루 푹 쉬시지 않고요?”

물론 기왕이면 쉬고 싶다.

여행 내내 피아로에게 혹사당한 것으로 모자라서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치른 까닭에 체력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랜드마스터의 방문이 머잖은 상황에 시간을 낭비하긴 싫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게 템빨 왕가의 신조입니다.”

“과연.... 훌륭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친히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

호두나무 숲의 모습은 상상과 달랐다.

나무마다 황금호두가 주렁주렁 매달려 금빛으로 물든 숲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보통의 숲과 다를 게 없이 녹림이 펼쳐졌다.

‘무조건 황금호두만 맺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5미터쯤 자란 호두나무 앞에 다가선 그리드가 가지에 맺힌 열매들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눈에 보이는 열매 전부가 금색이 아닌 녹색 과육에 둘러싸여 있었다.

빌어먹을 확률형 게임답게 황금호두도 확률적으로 맺히는 듯 보였다. 그것도 극악의 확률로 말이다.

투툭. 툭.

관리인이 큰 고리를 흔들어 열매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씽왕이 그중 하나를 집어 과육을 벗겼다. 그러자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호두씨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역시나 평범한 호두에 불과했다.

“황금색 열매는 잘 맺히지 않나보네요?”

“열매는 모두 녹색입니다. 과육을 벗겨냈을 때 씨를 감싼 껍질의 색깔이 갈색이냐, 황금색이냐에 따라서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며 대략 300개의 열매 중 하나 꼴로 황금호두가 나타나지요.”

‘최악이군.’

확률형 아이템인 건 고사하고 겉모습만으로는 황금호두와 일반호두를 구분할 수 없다니....

설령 황금호두 나무의 재배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후 황금호두를 채집할 때 엄청난 인력이 소요될 듯하다.

생각보다 더 큰 돈을 지출할 거라는 뜻이다.

하여튼 거저 주는 법이 없다.

불쾌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와 달리 피아로는 흐뭇하게 웃었다.

“농부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겠군요.”

“아....”

너무 협소하게 생각했다.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경제가 살아나는 법인데 당장 소비될 재정을 아쉬워하고 말았다.

‘이런 쪽은 라우엘이 다 알아서 해왔으니까 아직 많이 부족하군.’

그리드가 새로운 배움을 얻는 동안 피아로는 숲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무들의 간격이 무척 넓군요.”

확실히.

호두나무 하나 당 최소 10미터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무들의 크기가 평균 4~5미터인 점을 감안해봤을 때 이상하리마치 넓은 간격이었다.

간격 사이마다 가끔 보이는 죽은 나무의 흔적을 발견한 피아로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늘이 나무를 가릴 때 떨어지는 온도를 견디지 못하나봅니다. 추위에 무척 민감한 나무로군요.”

“그늘이 진다고 시들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온을 유지해줘야 하는 거야?”

씽은 따뜻한 나라다. 봄 수준의 날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이 날씨에 그늘 좀 진다고 얼어 죽는다니....

“새벽의 온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될 듯합니다.”

황당해하는 그리드에게 대답해준 피아로가 이어서 토지를 살펴보았다.

자갈이 많이 섞인 땅이었다.

“흠....”

퍽퍽!

삽을 꺼낸 피아로가 땅을 파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과연 대장군답게 진지구축의 달인인 것인지 땅을 파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까닭이었다.

장정 10명보다 피아로 혼자서 땅 파는 속도가 몇 배는 빠를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씽왕이 감탄했다.

“마치 어제도 삽질 했던 사람처럼 능숙하고 익숙하구려. 피아로 공께서는 전장에 나가서도 직접 참호를 건설하며 병사들의 귀감이 되어주는 훌륭한 사령관인가 보오.”

“아닙니다. 이건 그저 매일 뿌리채소들을 캐다보니.... 허?”

“....?”

씽왕과 귀족들이 피아로의 영문 모를 대답을 되새겨보기 전이었다.

피아로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의아해하자 모두의 시선이 땅굴 아래로 향했다.

어지럽게 얽혀있는 수십 개의 뿌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뿌리가 너무 길게 자란 나머지 서로 엉켰네? 나무들의 간격이 넓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던 건가?”

“아니요.”

“아닙니다.”

씽왕과 피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근방에 있는 10여 그루의 나무를 쭉 둘러본 그들이 동시에 말했다.

“이 뿌리들은 엉킨 게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

“정확히 열 그루의 나무를 한 그루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황금호두 나무를 옮겨심기 위해선 열 그루의 묘목을 만들어서 뿌리를 하나로 이어야한다는 뜻입니다.”

“흠....”

그리드는 나무에 대해서 잘 모른다. 피아로의 설명을 듣고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눈치인 그에게 씽왕이 설명해주었다.

“황금호두나무 숲을 인위적으로 확산시키기 힘든 이유입니다. 묘목을 만드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지요.”

“왜 불가능한 거죠?”

“보시다시피 이미 숲이 가득 찼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10미터의 간격을 유지한 채 빼곡히 숲을 채우고 있죠. 묘목을 키우기 위해선 그 빈 간격을 이용해야하는데 묘목들이 자라 서로 뿌리를 잇기도 전에 그늘에 시들어 토지의 양분이 됐습니다. 묘목이 자라는데 한 달, 묘목끼리 서로 뿌리를 잇는데 또 세 달이 필요하니 묘목들이 총 120일 동안 그늘을 견뎌줘야 하는데 현실은 채 두 달도 버티지 못하더군요.”

“.....”

분위기가 암울해졌다.

아무래도 황금호두가 큰 수익원이니만큼 씽 또한 황금호두를 재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듯했다.

하지만 황금호두의 재배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불가능의 원인을 재차 상기하다보니 우울해진 눈치였다.

반면 그리드와 피아로는 별로 심각해지지 않았다.

“관건은 템빨국에도 이곳과 똑같은 환경을 조성하는 거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간단하지가 않으니 며칠 더 머물면서 궁리를 해봐야할 듯하군요.”

“....?”

그리드와 피아로가 나누는 대화가 씽왕과 귀족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묘목을 만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기껏 장황하게 설명해주었건만 이해를 못한 건가?

씽왕이 조심스럽게 다시 설명해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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