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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98화 (1,188/1,794)

템빨 61권 - 08화

붉은 검의 소멸은 해진의 심상이 붕괴됐음을 뜻했다.

이곳이 가짜 세계라는 사실에 의지해서 연명하리라 믿고, 진짜 세계에서의 역전을 꿈꿨던 그녀는 그 꿈이 허황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 절망해 의지를 상실했다.

현실로 돌아갈지언정 폐인으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글렀군.’

갓 쓴 양반들.

아직은 규칙에 얽매여야하는, 오존에게 사육당하는 단계에 있는 아이들은 저 인간을 감당할 수 없단 사실을 치우는 처음부터 간파했었다.

인간이 품고 있는 아홉 번째 주작의 심장을 느낀 순간 인계에서 살해당했다는 한결의 소식이 떠오르며 퍼즐이 맞았으니까.

그래,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하지만 치우가 잠시나마 기대감을 품었던 이유는 해진의 급격한 성장속도에 있었다.

무신의 심상세계에 자신의 심상을 새겨 넣은 강력한 의지.

해진은 필시 심검의 편린을 보았다. 그리고 심검은 신살의 단서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검은 아직 채 벼려지기도 전에 쪼개졌다.

이미 몇 명의 양반을 해쳤을지 모를 인간을 감당하기엔 그녀의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5년 아니, 3년만 후에 이뤄졌어도 결과는 장담 못했을 것이다.

“다음.”

저력의 끝이 어디인가.

치우가 파그마에게 논했던 검무의 궁극은 물론이고 패기 넘치는 검술을 구사해 해진을 탈락시킨 인간이 무대 아래 양반들을 도발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

“....”

인간이 눈만 마주쳐도 불결하고 괘씸하다며 언성을 높였던 양반들이 모조리 입을 닫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감히 자신을 내려 보는 인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해진처럼 의지가 꺾였다거나 전의를 상실했다는 뜻은 아니다.

양반이란 스스로가 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

그들의 자존감은 세계 최고니까.

쉽게 위축될 리 없다.

다만 그리드를 적수로 인정했을 뿐이다.

“해진 녀석, 밥상 한 번 잘 차려놨군.”

가볍게 날아오른 양반 새솔이 갑판 위에 섰다.

그리드를 마주 본 그가 슬며시 웃었다.

“허풍을 잘 치더구나.”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고?

과연 그럴까.

지크의 사도는 이미 너무 많은 기술을 사용한 상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이다. 더 이상 사용할 비기는 거의 남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게다가 기술이란 심, 기, 체 전부를 소비하는 법.

이미 한 번 사용한 기술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선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지크의 사도는 현재 빈틈투성이에 가까웠다.

‘첫 번째 시련에서 드래곤을 베었던 그 검술만 주의하면 될 터.’

그것만큼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기왕이면 3번째 차례로 나서는 편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차례를 미뤘다가 사냥감을 아예 놓쳐버리면 그보다 허무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제길 새솔 녀석, 평소에는 게으른 놈이 이럴 땐 가장 빠르군.”

다른 양반들의 생각 또한 새솔과 같았다.

하지만 새솔에게 차례를 빼앗기는 바람에 나서지 못하고 쯧, 혀만 찼다.

새솔이 청룡의 숨결을 몸에 둘렀다.

파직! 파지직!!

뇌광이 비산한다 싶더니,

스팟!

안 그래도 가벼운 새솔의 몸이 한결 더 가볍게 뻗어나갔다.

쾌속.

그리드와의 거리를 불시에 좁힌 그가 요란하게 펄럭이는 도포의 틈새로 연검을 꺼내자 날카로운 검광이 휘었다.

서걱!

검광은 그리드의 가름에 아로새겨졌다.

곧 솟구칠 선혈의 광경이 새솔의 머릿속에 자연히 떠올랐다.

한데 이변이 발생했다.

그리드는 외상을 입지 않았다.

새솔이 청룡의 숨결을 두름과 동시에 <백호 자세>를 전개해서 방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결과다.

해진의 공격력이 말도 안 되게 강했던 거지, 신화급 방어구를 둘둘 두르고 있는 그리드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건 양반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허, 돌덩이 같구나.’

해진은 이런 놈을 무슨 수로 넝마로 만들었던 거지?

당황하는 새솔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튕겨 나온 연검을 침착하게 회수하더니 회전하며 찔러나갔다.

지크의 사도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과 견갑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노리는 일격이었다.

푸욱!

그리드의 견갑에서 튀어나온 <달아오른 가시>가 새솔의 몸 곳곳을 찔렀다.

하지만 달아오른 가시는 ‘입은 피해의 60퍼센트를 반사’하는 효과를 지닌 패시브 스킬인 바.

그리드는 애초에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달아오른 가시는 새솔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거침없이 뻗어나간 새솔의 연검은 그리드의 겨드랑이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여전히 유지 중인 백호 자세의 힘이다.

약점을 공략 당하고도 그리드가 입은 데미지는 1만 미만에 불과했다.

몇 번 더 공격을 퍼붓다가 떨어져 나온 새솔이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네놈.... 인간이 맞는 거냐?”

양반끼리 싸울 때도 백호의 숨결을 운용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다.

한데 고작 인간이 자신의 공격력을 철저히 무력화시키다니?

“....?!”

인간의 견갑에서 연달아 튀어나온 가시에 몸을 찔린 새솔이 뒤로 물러서다가 표정을 굳혔다.

인간이 풍기는 기운이 종전과 달라진 까닭이다.

고요한 기세가 대기를 진동시키는 꼴이 마치 오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신격>의 파장이다.

아직 선착장에 남은 수십 명의 양반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체력을 비축해야한다고 판단한 그리드는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신격, 아이템 합체.’

쩌어어엉!!

그리드의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무아의 칼날이 염룡검과 하나가 되었고,

-큭큭큭! 제법 괜찮은 녀석이군!!

염룡검의 자아가 흥분했다.

자신이 보다 완전해졌음을 자각한 것이다.

검조차 자신의 변화를 느끼는데 양반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뭐, 뭐냐, 저 흉악한 물건은!’

적색의 화염과 묵색의 화염이 소용돌이치는 장검.

두 자루 신검의 조화가 그리드의 기대조차 넘어서는 위력을 발휘했다.

“연.”

꽝! 꽈과과과과과과광!!

“....!”

“....!”

“호오....”

시간 차 없이 전개되는 수십 회의 검격이 대기를 낱낱이 찢어 소멸시켰다. 그 위로 번져나가는 적색의 화염과 묵색의 화염이 일으키는 폭발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선박의 절반이 사라져버렸다.

무호흡의 공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던 새솔은 백호의 숨결을 전개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본디 백호의 숨결이란 치명상을 막아줌과 동시에 체력과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권능이건만, 상처가 전혀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원인은 달아오른 가시에 있었다.

‘가시에 찔린 대상은 최대 3초 동안 치유 불가 상태가 된다.’는 저주가 새솔의 발목을 붙잡아버렸다.

덜덜.

말문을 닫은 새솔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태어나 최초로 맛본 무력감과 절망감이 그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싸움이 성립이 안 된다.’

새솔의 떨리는 시선은 그리드의 검에 고정돼 있었다.

세계를 소멸시킬 기세로 불타오르는 검.

자신이 저것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저벅.

그리드가 한 발 앞으로 내딛었고,

“져, 졌다!”

새솔은 네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무너진 갑판의 끝자락에 발을 걸치고 선 그가 재차 외쳤다.

“내가 졌어!!”

그리드의 시선은 더 이상 새솔에게 향하지 않았다.

아직 아이템 합체 시간이 유지되는 동안 다음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서둘렀다.

“다음.”

그리드에겐 아직도 보여줄 힘이 많았다.

백호 자세와 쿨타임을 공유하지 않는 <화염에 휩싸인 백호 자세>를 비롯한 사신의 스킬들, 새로운 다섯 종류의 융합 검무들, 룬에 깃든 대악마들의 힘과 브라함의 마법들, 갓 핸드와 탈수를 적극 활용하는 템빨 공세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양반들을 몇 명이나 더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양반들이 나서질 않았다.

기고만장한 표정을 잃은 채 선착장에서 술렁이는 양반들 모두 다른 이의 등을 떠미느라 바빴다.

그만큼 아이템 합체의 위력이 컸다.

어떤 기술이든 궁극에 이르는 순간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을 발산하게 마련인데 그리드의 템빨이 딱 그랬다.

짤랑.

“다음 도전자는 없는 건가?”

급기야 치우가 직접 나서서 물었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양반 하나가 와중에 자존심을 챙기려고 들었다.

“저자가 지크의 사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착각해 만전을 기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또 맞설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는 반드시....!”

소리치던 양반이 입을 다물었다.

늘 무표정하던 치우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까닭이었다.

“아.... 으아아....”

무신의 분노는 그 어떤 신의 분노보다 무서운 법이다.

입을 다문 양반은 소멸을 직감했고 주위의 다른 양반들은 식은땀에 젖은 채 시선을 깔았다.

다행히 치우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함부로 지껄인 양반을 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반은 안도하지 못했다.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을 체험하게 되었으니까.

“착각하지 마라.”

짤랑.

“저자는 지크의 사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다.”

“....!?”

“....!?”

근거는 충분했다.

타렌의 권능인 <신장>을 습득한 인간이 지크의 사도일 리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저갱에 봉인당해 있는 타렌이 사도를 키웠을 리도 만무하다.

저 인간은 칠악성을 섬김으로써 강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우뚝 선 존재다....

깨달은 양반들의 눈빛이 변했다.

전투에서 패배했던 해진, 새솔의 눈빛과 꼭 빼닮은 눈빛이었다.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치우의 심상세계에 홀로 우뚝 선 당신의 모습을 오존이 가만히 지켜봅니다.]

[양반들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당신의 부인 ‘아이린’의 환국 내 명성이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양반들은 당신의 부인을 굳이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약자는 아이린을 경외할 것이며, 강자는 아이린을 존중할 것입니다.]

[오존이 당신의 부인에게 큰 흥미를 느낍니다.]

[당신의 부인 ‘아이린’이 <환국의 종사>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나이스.”

단테가 신격을 얻었을 당시 떠올랐던 알림창은 단 두 줄에 불과했다. 워낙 짧아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풍사’가 한결의 시체를 밟고 선 당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하였습니다.

당신의 기사 ‘단테’가 환국과 적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내용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신격을 얻었고 활력을 되찾았다.

그에 반해 아이린은 무려 환국의 종사로 등극했다.

오존의 흥미를 끌었고 양반들에게 경외 받게 되었다.

엄청난 신격을 쌓았을 게 분명했으므로 그리드는 기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귓가로 치우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나만큼은 그대를 기억하겠다.

“....!”

의미심장한 말에 이어서 그리드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잘 다녀왔나?”

그랜드마스터가 곁에 있었다.

환국 어귀.

복숭아나무가 늘어진 그곳의 풍경은 그리드가 치우의 시련을 치르기 위해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의외로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것이다.

마치 꿈을 꾼 듯한 기분이다.

멍하니 서있던 그리드가 문득 양반들과 눈을 마주쳤다.

시련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에게 멸시를 보냈던 양반들이 살짝 목례했다.

“....한 수 제대로 배웠소.”

“....??”

저 콧대 높은 놈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아해하던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양반들 중에서도 유독 기고만장했던 해진이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헤헤 웃고 있었는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템빨여왕이 수잔을 학살하던 광경을 떠올린 네오 적기사들이 관심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그때였다.

[플레이어 최초로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리드의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의 성적은 1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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