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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02화 (1,192/1,794)

템빨 61권 - 12화

어느 지역이든 통곡의 벽은 존재한다.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인 플레이어의 평균 수준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난이도의 구획.

윈스톤의 카오스 산맥이 대표적인 통곡의 벽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곳.

“아름, 아름답구나.”

동대륙의 중심.

거대한 복숭아나무 숲을 감싸는 저수지.

천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놓인 장소이니만큼 범인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이곳 또한 통곡의 벽이라고 불린다.

심지어 동대륙 최악의.

‘싸워볼까?’

숲을 벗어나자마자 귀선을 만난 그리드가 치마의 끝을 접어서 말아 올렸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알고 부자유를 없앤 것이다.

귀선(鬼仙).

신선이 되기를 꿈꿨으나 등선에 실패하고 추락한 이들.

등선 실패의 충격으로 육신과 목숨을 잃고 령(靈)을 주체로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이 저수지 일대에 서식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오존의 의도일 거라고 그랜드마스터는 예상했었다.

신선이든, 귀선이든 결국 오존에겐 장기말이었으니까.

일종의 경비견으로 선택된 것이다.

“살, 살결의 냄새가 매우 좋다.”

귀선이 등선에 실패한 이유는 그들의 본성이 추악하기 때문이다.

또한 령이란 이지가 아닌 본능과 집념으로 움직인다.

귀선은 모두 사악하다는 뜻이다.

일말의 가식 없이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놈들이 바로 귀선이었다.

“내, 내가 잡아먹은 266명의 여인 중에서도 네가 으뜸이야!! 아아! 아아아!! 먹, 먹고 싶구나!! 당장 먹고 싶어!!”

쾅!

본능만 남았기에 강하다.

생전에 연마했던 모든 기술과 도술을 망설임 없이 전개하는 귀선의 전투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천하의 그랜드마스터조차 3명 이상의 귀선이 출몰했을 땐 사하란의 검을 뽑았을 정도.

“....”

환국을 방문하기 전.

그러니까 치우의 시련을 치르기 전의 그리드는 귀선과 굳이 싸우지 않고 그랜드마스터에게 순순히 의지했다.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이 저수지를 건너 복숭아나무 숲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랜드마스터의 비호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화회(花回).”

홀로 귀선과 만난 그리드는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콰륵! 콰르르르르륵!!

자신의 귀를 자른 옛날의 어느 화가가 묘사한 별빛과 달빛의 폭발을 보는 듯하다.

그리드의 주위로 떠오른 수십 개의 검기가 나선을 그리자 세상이 소용돌이쳤고 그 소용돌이는 귀선의 수십 개 도술을 모조리 빨아들여 없앴다.

“....?”

본능만 남았으므로 감정에 충실하다.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사용한 온갖 도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당황한 귀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찰나의 적막이 끝났다.

콰르르르르륵!!

소용돌이에 집어삼켜졌던 귀선의 도술들이 역으로 되돌아간다.

전보다 더 강력한 파괴력과 저주를 품고 저수지를 가르며 귀선에게 쇄도했다.

귀선이 온갖 도술을 일으키고 이를 포착한 그리드가 화회로 반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초 남짓.

황급히 부적을 꺼낸 귀선이 결계를 펼쳐보았지만 역풍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크으!”

풍덩!!

묘기를 부리듯 허공에 떠있던 귀선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수지에 빠졌다.

큰 파문이 일어난 뒤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놈은 저수지의 밑바닥까지 계속,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퍼엉!

귀선은 죽지 않았다.

저수지의 밑바닥까지 잠겼던 놈이 단번에 도약해서 수면 위로 나타났다.

물의 압력을 무시하는 신기였다.

“제, 제길!”

다시 허공에 떠올라 휘청거리는 귀선의 가짜 몸 안에 자리 잡은 새카만 령이 바람 앞의 등불마냥 흔들렸다.

령이 면역하는 것은 물리 공격뿐.

도술에는 다소 취약한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도술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아파! 아프잖아!!”

귀선의 새빨간 눈에 귀기가 서렸다.

등선에 실패하고 추락했을 때 느꼈던 전생의 고통이라도 떠올린 마냥 분노한 놈이 물에 흠뻑 젖은 도포를 펄럭이며 그리드에게 돌진했다.

신선 중에서도 검선(劍仙)이 되고자 했던 놈일까.

채챙! 채채채챙!!

귀선의 검술은 도리어 도술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둥을 일으키는 위력, 동작의 연계마다 피어오르는 구름에 가려지는 노림수.

강력하되 읽을 수 없는 것이 귀선의 검술이었다.

‘이거다.’

그랜드마스터를 잠시나마 현혹했던 검술.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의 어깨를 얕게 베었던 이 검술을 보고 도전정신을 버렸었다.

보스나 NPC도 아닌 몬스터로 분류되는 주제에 양반만큼 강한 이놈들과 싸우느라 고생해봤자 아무런 득이 없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극도로 꺼려졌던 귀선이 지금은 적당한 사냥감으로 보였다.

“제(制).”

“....!”

그리드의 몸 곳곳을 베어나가던 귀선의 검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명색이 신선을 꿈꿨던 존재이니만큼 뒷걸음치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드의 기세에 놀라 잠시 경직된 것이다.

고작 0.2초에 불과한 경직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귀선의 검술은 흐름이 끊겼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시야를 현혹하던 구름이 모조리 흩어져 사라졌고, 덕분에 안전을 확보한 그리드는 여유롭게 다음 검무를 연계했다.

“파(波).”

콰콰콰콰쾅!!

검기의 해일이 천지를 격동시켰다.

귀선의 몸이 기우는가 싶더니 그리드의 코앞으로 끌려왔다.

초근접.

검(劍)의 범위가 아니다.

이 상태로 검을 휘둘러봤자 위력이 제대로 발휘될 리 없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귀선이 파의 검기에 얻어맞은 반동에 그대로 몸을 맡겨 뒤로 물러섰지만 무의미했다.

모든 속도 저하와 균형 상실 디버프를 면역했다고 해봤자 이동 속도 30퍼센트 저하의 디버프로부턴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선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귀선을 뒤쫓는 그리드의 검이 훨씬 더 빨랐다.

“극(極).”

즉발 스킬.

무신 치우의 검을 재현한 이 검무는 완전에 가깝다.

어떤 간격에서도, 어떤 궤도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즉시 발동하여 대상을 벤다.

서걱!!

[대상에게 1,095,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

가슴을 베인 귀선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령은 물리 공격을 면역한다.

본래라면 가짜 몸만 베이고 영혼에는 타격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영혼에 미세하게나마 고통이 느껴지는 것이다.

당황하는 귀선의 피통을 확인한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유용하군.”

<그리드식 전투술(중급)>Lv.7

무기 착용 시,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이 25퍼센트 증가하고 모든 공격의 명중률이 7퍼센트 상승합니다. 또한 마법의 캐스팅 시간이 7퍼센트 단축됩니다.

★물리 공격력 특화, 혹은 마법 공격력 특화가 가능합니다.

★물리 공격력에 특화 시, 마법 공격력 증가 효과와 명중률 상승효과, 캐스팅 단축 효과가 비활성화 되는 대신 물리 공격력이 15퍼센트 추가로 증가합니다.

★마법 공격력에 특화 시, 물리 공격력 증가 효과와 명중률 상승효과, 캐스팅 단축 효과가 비활성화 되는 대신 마법 공격력이 15퍼센트 추가로 증가합니다.

*현재 상태:마법 공격력 특화

<염룡검>의 가장 중요한 옵션은 ‘물리 공격력을 화염 속성 마법 공격력’으로 전환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염룡검의 힘으로 물리 공격력을 마법 공격력으로 치환하고 전투술을 마법 특화시킨 그리드는 검사가 아닌 마법사에 가까웠다.

비록 극의 검무가 물리 공격력 계수를 지녔다고 하지만, 그리드는 순수한 마법 공격력만으로 귀선에게 제법 큰 피해를 입혔고 극의 부가 효과로 귀선의 방어력을 하락시키는데 성공했다.

회심의 일격은 당연히 이거다.

“화(花).”

그리드의 검무 중 유일하게 마법 공격력 계수를 지닌 검무.

퍼펑!

[대상에게 3,170,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극보다 도리어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아름다운 꽃잎들.

방어력이 하락한 상태로 표식이 찍혀 검기의 폭격을 허용한 귀선이 기세를 잃고 부적을 꺼낸다.

푸른 부적이었다.

불리해지면 도망칠 때 사용하는 도주용 부적.

저 부적의 용도를 몰랐던 그랜드마스터는 다 잡은 귀선들을 놓치고 말았었다.

하지만 그랜드마스터 덕분에 부적의 용도를 알아냈던 그리드가 귀선을 놓칠 리 없다.

“초연화(超聯花).”

“....!!”

귀선은 반응하지 못했다.

초연화의 발동과 동시에 순보를 전개, 귀선의 후위를 장악한 상태에서 꽃잎의 검기를 일으킨 그리드 탓이다.

“초월, 자....!”

“알람. 매직 미사일.”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펑!!

거미줄을 만든 빛의 섬광이 새카만 영혼을 꿰뚫고, 꿰뚫고, 다시 또 꿰뚫는다.

급기야 육신을 버린 영혼이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발악했지만 그리드가 잠시 일으킨 화신의 폭풍에 집어삼켜져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여기서 며칠만 머물다가 갈까?”

그리드가 귀선 사냥을 가치 없다고 판단했던 이유는 귀선이 양반만큼 강하되 몬스터, 그중에서도 령 속성 몬스터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한 마리 사냥에도 개고생이 필요한데, 개고생을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경험치로 한정 됐으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판단했다.

귀선과 싸울 시간에 양반과 싸워서 사방신의 숨결이나 새로운 에피소드를 얻는 게 훨씬 더 이득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드는 강해졌고, 귀선은 더 이상 부담되는 적수가 아니다.

“....며칠만 더 머물다가 가자.”

결국 마음을 정한 그리드가 본격적인 귀선 사냥에 돌입했다.

령 속성 몬스터는 아이템을 거의 드롭하지 않았지만 귀선이 워낙 강하고 특별한 존재인지라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마리당 무려 2.1퍼센트의 경험치....

남들에겐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리드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사라질 생각을 않았다.

***

‘너무 신났나.’

오래간만에 사냥에 몰입했다.

워낙 경험치가 잘 올라 템빨골과 노에, 랜디까지 동시에 육성하며 제대로 뽕을 뽑았으니 신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무려 3일을 저수지에 머물렀다.

그 결과 귀선을 찾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등선에 실패한 신선’이라는 설정 탓인지 귀선은 개체 자체가 적었고 리스폰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피아로가 걱정하기 전에 서둘러서 돌아가 볼까.”

더 이상 잡을 사냥감이 없어서 떠나려는 게 아니라 피아로를 걱정해서다.

노에에게 재차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그리드가 템빨콘의 등에 올라탔다.

초 관련 검무들이 모두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린데다가 스태미나도 많이 소모된 상태였기 때문.

지친 마당에 불확실한 순보에 의지하기보다는 템빨콘을 이동수단으로 삼는 편이 백배 천배 나았다.

“가자.”

끼히힝!

힘차게 대답하는 템빨콘의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초승달처럼 휘는 눈빛이 능글맞다.

아이린의 모습을 한 그리드가 썩 마음에든 눈치였다.

“아, 맞다. 이 모습은 이제 필요 없겠군.”

[<베리드의 인피면구>를 벗었습니다.]

끼히힝....

힘차게 내달리던 템빨콘이 갑자기 기운을 잃고 구슬피 울었지만 그리드는 무시했다.

***

“아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씽왕은 벌써 3일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빠르면 나흘, 늦어도 이틀 전엔 돌아왔어야 할 템빨 왕비가 감감무소식이었으니 근심이었다.

사악한 양반들에게 혹 변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 자꾸만 머릿속에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

은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도리였다.

“당장 병사를 풀어라.”

결국 참지 못한 씽왕이 왕명을 내렸다.

무려 1만의 병사.

왕도에 있는 병사 전부를 템빨 왕비 수색에 투입했다.

템빨 왕비가 혹 변고를 당해 난처한 상황일 수가 있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려는 의도였다.

명령을 받든 병사들이 출정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전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고요?”

일주일 넘게 호두나무 숲에 틀어박혀 있던 피아로가 왕궁에 돌아왔다.

농부이기에 앞서 템빨국의 대장군.

필시 엄청난 용장일 것이 분명한 그의 분노를 예상한 씽왕과 대소신료들이 긴장했지만 의외로 피아로는 침착했다.

“기대되는군요.”

아니, 피아로는 도리어 기뻐하는 눈치였다.

주인이 감감무소식인 마당에 저토록 환히 웃다니?

‘거짓 충성이었나?’

의심마저 품는 씽왕에게 피아로가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는 더욱 더 강해지셨을 겁니다.”

“....?”

템빨 왕비는 잠시 환국을 방문하겠다고 떠났다.

수련을 목적으로 떠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데 강해졌을 거라니?

섣불리 이해하지 못한 씽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피아로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산산조각 났다.

“....?”

놀란 씽왕이 피아로의 손을 보자 그의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오싹!

의문을 느끼던 씽왕이 경기를 일으켰다.

어려서부터 양반들을 보아온 까닭에 강자의 기척에 익숙한 그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점차 대전에 가까워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말이다.

‘누, 누구냐? 저 괴물은?’

양반 중에서도 가람을 연상시키는 괴물.

저만한 기운을 지닌 존재가 인간일 확률은 지극히 낮다.

‘설마?’

현무의 가호가 약해진 건가?

이 나라는 또 다시 양반의 침략을 허용했단 말인가!

겁에 질린 씽왕이 좌절하는 그때였다.

“주군을 뵙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아로가 대전의 입구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어서 나타난 인물은....

“오랜만이군, 피아로.”

초상으로만 접했던 템빨왕 그리드였다.

템빨국의 실세인 줄 알았던 템빨 왕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는 그를 보고 씽왕은 전율했다.

소문보다 못한 사람은 많이 봤어도 소문 이상의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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