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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04화 (1,194/1,794)

템빨 61권 - 14화

두근!

‘아이린!’

두근!

‘아이린! 아이린! 아이린!!’

궁전으로 달려가는 그리드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아이린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시절과 같은 젊음을 되찾은 아이린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지 상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인!!”

아이린의 웃는 얼굴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순보까지 쓰고 말았다.

기사들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궁전에 도착한 그리드가 아이린의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부인....?”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거울 앞에 앉은 아이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울고 있는 듯했다.

“저, 전하? 돌아오셨군요.”

그리드의 방문을 뒤늦게 눈치 챈 아이린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녀를 빼 길게 내린 은발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가린다.

“혹시 울고 있었소? 무슨 일이 있던 게요?”

아이린이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린이 그 손길을 피했다.

“왜 그러시오? 어째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거요?”

설마.... 설마 뭔가 잘못 됐단 말인가?

온갖 불길한 생각이 그리드를 덮쳤고,

“저는.... 저는....”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장내에 아이린의 떨리는 음성이 되풀이됐다.

힘겹게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은 그리드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젊고, 아름다웠다.

눈가와 입가에 새겨졌던 작은 주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조금씩 메말라갔던 피부엔 윤기가 돌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깊이 묵어가던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다행히.

정말로 다행히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도리어 바람이 이루어졌다.

십년감수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아이린의 떨리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하루아침에 얼굴이 이렇게 변해버렸어요. 저는.... 저는 괴물이 된 걸까요?”

“....!!”

아이린이 겁에 질린 이유를 뒤늦게 깨닫는 그리드였다.

설마 이런 반응은 예상 못했던 그리드가 아이린의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괴물이라니, 당치도 않소. 젊음을 되찾은 건 응당 기뻐해야할 축복인데 어찌 근심한단 말이오?”

“....전하께서는 혹시 내막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게....”

그리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신격의 개념을 이해시킨 후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아이린의 신격을 쌓기 위해 노력했는지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잠자코 얘기를 듣던 아이린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깊은 눈동자에 어떤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부인?”

마냥 기뻐할 줄 알았던 아이린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자 그리드가 당황했다.

불안할 정도로 굳게 닫혔던 아이린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제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부인의 기쁨이 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깜짝 이벤트로....”

“돌아가 주세요.”

“....응?”

“혼자 있고 싶어요.”

“부, 부인?”

아이린은 따로 특별한 단련을 하지 않았다.

비록 신격을 쌓았다곤 하나 그녀의 신체능력은 일반인보다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손을 그리드는 함부로 떨쳐내지 못했다.

맥없이 떠밀려 방에서 쫓겨나 굳게 닫힌 방문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이, 이게 무슨....?”

***

“그토록 금슬이 좋던 두 분께서 어쩌시다가....”

“전하의 외출이 잦다보니 왕비님께서 불만을 품으실 때도 됐지.”

왕궁엔 그리드와 아이린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귀환하고 3일이 지나도록 아이린의 외출이 없었고, 식사도 꼭 따로 하였으니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보였다.

“전하.”

“.....”

“전하!”

“어, 응?”

영혼 없는 인형마냥 멍하니 음식을 깨작이던 그리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끼눈 뜬 라우엘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왔어?”

“아까 전부터 옆에 있었습니다만. 도대체 언제까지 넋을 잃고 계시려는 겁니까?”

그리드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매일 한계까지 대장일이나 사냥을 하다가 돌아와서 스태미나가 회복되는 동안 국왕의 업무를 돌보는 식으로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했다.

심지어 식사 시간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아이린이나 로드와 식사 약속이 잡힌 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그런 사람이 벌써 3일을 아무 것도 안 하고 궁전을 배회하는 중이다.

대장간과 사냥터 근처에 얼씬도 안할뿐더러 이동 중에 습관처럼 만들던 속옷조차 기억에서 지운 듯했다.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께서 이토록 시간을 낭비하시니 안타깝군요. 로드 왕자도 전하를 걱정하느라 요즘 통 수업에 집중을 못하는 눈치입니다.”

“아이린은? 아이린은 걱정 안 해?”

“알현을 허가해주지 않아서 만나진 못했지만... 아마도 걱정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하....”

“한숨 좀 그만 쉬세요. 신민들이 동요합니다.”

“왜일까.... 아이린은 대체 왜 화가 난 걸까?”

라우엘은 지금의 템빨국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세계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리드는 라우엘이 이번 사태를 분석하고 해결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라우엘은 여자의 마음을 몰랐다.

천재적인 두뇌와 잘생긴 외모를 겸비하긴 했지만 온종일 Satisfy에만 몰두했으니 연애할 시간이 없었고 여성의 마음을 학습할 기회가 전무했다.

하지만 <여성 NPC 공략법>의 저자이기도 한 라우엘은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했다.

“화나신 이유야 간단하죠.”

비록 연애는 못해봤지만 삼라만상을 깨우친 내가 이 세상에 모르는 것 따윈 없다....

단언하며, 라우엘은 아이린의 심리를 분석해주었다.

“전하께서 아이린 왕비님의 모습으로 깽판을 치고 다니셨다면서요? 동대륙인들이 왕비님을 폭력적인 마초녀로 기억하게 될 텐데 왕비님 입장에서 기분이 좋겠습니까? 네? 안 그래도 시 짓기와 꽃꽂이가 취미이신 고상한 분의 이미지를 엉망으로.... 어휴.”

“그거였나!!”

큰 깨달음을 얻은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축객령을 무시하고 아이린이 기거하는 궁전으로 달려가더니 베리드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다시 한 번 동대륙에 다녀오겠소! 부인의 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동대륙을 여행하며 부인이 얼마나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인물인지 널리 전파하고 오겠....”

신나서 떠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서늘한 시선을 보고 요점을 잘못 파악했음을 눈치 챈 것이다.

***

“후우....”

로그아웃한 신영우가 한숨부터 쉬었다.

기분이 영 우울했다.

젊음을 되찾고 기뻐할 아이린과 함께 행복을 나눌 생각에 들떴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답답했다.

“영 입맛도 없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배가 보내는 공복 신호를 무시하고 외출복을 차려입은 영우가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유라의 할아버지.

다름 아닌 이진명 회장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파티를 즐길 여유가 전혀 없었지만 한 달 전부터 잡힌 일정이라 이제와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린....”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끝내 못 봐서 아쉽다.

화난 이유를 몰라 달래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이리인!!”

부와아아아앙!!

외부순환고속도로에 진입한 영우가 힘차게 엑셀을 밟자 십삼이가 우렁찬 배기음을 토했다. 마치 영우의 마음을 위로해주려는 듯했다.

***

“소식은 들었어요. 많이 우울한가보네요.”

파티에 참석하기 전.

우선 유라와 만난 영우는 백화점을 방문했다.

이진명 회장의 선물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아이린이.... 아이린이 궁에 틀어박혀서 안 나와.”

평소 영우는 유라 앞에서 아이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아이린이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유라에게도 상담을 요청했다.

“기껏 열심히 아이린의 신격을 쌓아주고 젊음을 되찾아줬는데 뭐가 문제지? 왜 기뻐하기는커녕 화가 난 걸까?”

이진명 회장의 취향은 의외로 서민적인 것 같았다.

명품관이 아닌 국내 브랜드관에서 넥타이핀을 고른 유라가 그것을 영우에게 매칭시켜 보며 말했다.

“아이린 양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을 거예요.”

“마음의 준비?”

“혼자 떠날 준비요.”

“.....”

“오랫동안 쓸쓸하고 무서웠겠죠.”

영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홀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린이 느꼈을 고독과 공포를 말이다.

그래서 이번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녀를 홀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그녀가 자신과 함께 늙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아이린 양은 슬픔을 이겨냈을 거예요. 그녀는 강하니까요. 홀로 떠나는 날 당신께 미소를 보여줄 거라고 다짐했겠죠.”

“.....”

“근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젊음을 되찾은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통보도 없이 말이죠. 아마 그녀는 혼란스러운 게 아닐까요? 기쁘면서도 바보가 된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녀에게 사전에 상의를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

영우가 드디어 문제점을 파악했다.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음을 깨닫고 이를 악 물었다.

쇼핑을 끝내고 차로 돌아와서도 스스로를 책망하는 그에게 유라가 손을 내밀었다.

가늘고 흰 손에 조금 전에 산 초콜릿 하나가 놓여있었다.

“드실래요?”

“응....”

며칠 동안 하도 신경을 쓰다 보니 당이 떨어졌다.

백미러에 비치는 자신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져있음을 엿본 영우가 초콜릿을 건네받는 순간이었다.

“....!”

유라가 영우의 손을 낚아채 꼭 쥐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당황하는 영우에게 유라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아이린 양의 혼란은 머잖아 끝날 거예요. 곧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며, 행복으로 충만해지겠죠. 그러니까 이제 그만 걱정하고 그녀의 마음이 정리되길 기다려주세요. 자, 웃어요.”

“....고마워.

언제부터였을까.

차를 탈 때면 유라의 왼손이 늘 내 손을 붙잡아준다.

새삼 깨달은 영우가 며칠 만에 드디어 미소를 되찾았다.

***

붉은 현자 하스터.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로 기적의 5인방 중 하나다.

어떤 게임에서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그의 목표는 당연히 지존.

언젠간 반드시 그리드를 따라잡겠노라 꿈꿔왔던 그가....

“좋아, 이걸로 확실해졌다.”

“쿨럭! 쿨럭!!”

평범한 하이랭커들 즉, 노말 클래스 전직자 10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죽어가는 그의 얼굴을 짓밟고 선 하이랭커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플레이어간의 격차는 좁혀질 것이다.... 임철호 회장의 말이 사실이었어.”

상태이상 저항은 무적이 아니었다.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답게 몇 개나 되는 상태이상을 저항했던 하스터가 우리의 발밑에 깔려있음이 그 증거다.

상태이상 저항을 공략하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했고, 우리는 그 방법을 밝혀냈다.

“다음 사냥감은 그래.... 유라가 가장 적당하겠군.”

콰작!!

하스터를 잿빛으로 산화시킨 하이랭커들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들의 목적은 정의의 실천.

운 좋게 히든 클래스를 얻고 다수 위에 군림했던 소수를 차례차례 격파하여 공평한 게임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유라를 사냥하는 영상을 촬영해서 전 세계에 전설 공략법을 전파하도록 하자. 그게 우리의 의무니까.”

게임이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

만인에게 평등해야하는 법이다.

소수의 특권을 허용해선 안 된다.

예전 모바일게임 시장이 쇠퇴했던 이유도 소수 핵과금러들의 횡포 때문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Satisfy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다수를 위해!”

“다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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